[우화] 성인식

2010.06.21 05:37

셜록 조회 수:3406

성인식

 

 

어머니는 내가 아주 까만 세상에서 왔다고 했다. 별 하나 없는 곳으로부터. 아주 어두웠던 곳에서 이 세상으로 옮겨져 오면서, 너무 눈이 부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것이 행복한 것인지 아닌지, 어머니는 모른다고 말했다. 다만 딱 하나 잊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잠들때마다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습성인 <깊이>라는 것이다. 나는 아주 깊은 곳에서 왔고, 다시 그 깊은 곳으로 가게 될 거라고. 나는 잠자는 게 그렇게도 좋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처음엔 구름 위에서 떨어진 나무의 씨앗이었다고 말했다. 나의 시작이 너무나 홀쭉했기 때문에 더욱 더 커다란 알통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커다란 알통을 갖고 키가 자라면 내가 떨어져 나온, 구름 위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내가 태어난 곳에 있는 커다란 오동나무를 손도끼로 찍어내면서 끝까지 올라가면 거기엔 황금빛 사과가 열린 나무로 가득한 구름 위의 세상이 있을 거라고. 나는 날마다 도끼날을 갈았다.

 

어느덧 나는 어른이 되었고, 마을의 언덕 위에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다는 고향으로 향했다. 언덕에 올랐지만 나무는 없었다. 회색빛 굴뚝 하나가 우뚝 솟아 있을 뿐이었다. 굴뚝은 너무 높아서 꼭대기가 어딘지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그래도 올라가보자. 내가 갈고 다듬은 도끼로 굴뚝을 찍어내고 손잡이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굴뚝은 너무 단단했다. 도끼를 한번 찍을 때마다 뼈가 울렸다. 바람이 불면 굴뚝이 웅웅, 울었다. 나는 이빨을 꽉 물고 굴뚝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굴뚝의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주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세상이 낮게 깔려 있었다.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세상이라는 게 저렇게 조그맣다니. 저 조그만 곳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고 그렇게나 많은 싸움이 그치질 않는다니. 나는 굴뚝 위에 주저앉았다. 굴뚝의 꼭대기는 울퉁불퉁했다. 마치 아직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은 것처럼. 나는 굴뚝 속을 들여다 보며 소리쳤다. 어이! 굴뚝 속에서 답했다. 어이! 나는 다시 한번 소리쳤다. 넌 뭐 하러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굴뚝 속에서 같은 말을 했다. 정말 난 왜 여기까지 올라온 걸까? 난생 처음 느끼는 허무. 눈꺼풀이 감겼다. 그냥 이대로 잠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누군가가 도끼를 찍으며 굴뚝을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의 인기척이 반가워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의 몸은 굳어있었다. 나는 굴뚝 가장 높은 곳에 마치 시멘트 블럭처럼 굳어 있는 것이었다. 다 알 것 같았다. 그렇군. 조금 있으면 굴뚝을 기어올라오는 저 친구가 내 위에 걸터 앉아 땀을 식히겠군. 그리고는 세상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리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될 거야.  그렇게 해서 허무에 잠겼다가 눈을 뜨면, 이 굴뚝 괴물의 정체를 알게 되겠지. 하지만 그때는 자기 자신도 이 세계의 깊이와 높이에 동참하고 있을 때겠지. 바람이 불자 굴뚝 밑에서부터 웅웅, 하는 신음 소리가 끓는 듯이 올라왔다. 나는 이미 굴뚝의 신음과 나의 신음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