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국정원 고위급 윤상훈

2013.08.30 19:00

고양이맨 조회 수:2842

국정원 고위급 윤상훈

 

 


 

 

 

 

1

 

대한민국에선 웬만한 범죄를 저질러도 그게 남녀 간의 관계에 연관되면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이 안타까웠던 나(=국정원 고위급)는 아주 큰벌을 받아 마땅한 범죄자(서른살 연하의 자기 아내를 결혼 후 허구헌날 폭행하다 아예 목졸라 살해한)를 처벌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단 대한민국에서는 여론으로 마녀사냥하면 웬만한건 다 쓸려버린다. 최근 그런 마녀사냥에 대한 경각심이 생기고 있지만, 마녀사냥 당하는 이가 아내를 학대하다 살해한 남편이라면 얘기는 달라지는 것이다. 우선 그자를 처벌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생각해보았다. 여자이기보다 남자인 경우에 더 처벌을 잘 받게 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나쁘지 않을거라는 고정관념같은게 있다. 여자나 남자나 같은 사람인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런 이상한 고정관념이 있어 어쨌든 남자는 여자보다 더 죄를 저질렀을때 처벌하기 쉽다. 물론 이런 고정관념 때문에 꽃뱀들이 설치긴 하지만.

 

그리고 두번째로 목사. 그렇다. 이 남자의 직업이 목사다. 대한민국에선 웬만한 목사가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그 자는 자동적으로 개독낙인이 찍힌다. 개독이 되면 여론몰이 하기 한층 쉬워진다. 세 번째로 이 남자는 서른살이나 나이가 어린 여자와 결혼했다. 이역시 대한민국에서는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 행위다. 지나치게 나이차가 많이 나는 결혼 말이다. 누구와 결혼하느냐는 자유라 대놓고 그에 대해 욕을 하지 않지만, 언제든지 사고가 터지면 욕할 준비는 되어있는 셈이다. 특히 연하남과 결혼한 여자보다 연하녀와 결혼한 남자가 더 욕을 먹을 용이도가 높다.

 

네 번째로는 뭘 더해야 할까. 남자고 개독이고 지나치게 어린 여자와 결혼했다..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다 적어도 네 가지를 더해야 이 자를 제대로 처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네 가지는 첫째, 성범죄 전과자다. 둘째는 간첩 출신, 세째는 일베충, 네째는 바로..

 

국정원 직원이야.”

? 에이, 설마요 선배..”

 

녀석은 내 말이 그저 농담처럼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국정원인데.. 대한민국 혼기 꽉찬 미혼녀들이 가장 선호하는 남편 직장인데.. 가장 힘이 센 국가기관이고 연봉도 많이 받는데다가(미국으로 치면 FBI니 엘리트들만 정직원이 될수 있는 곳이다. 물론 FBI도 머리는 좋은데 실행에 옮기는건 젬병인 자들이 많지만) 그냥 이유없이 멋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모든 것이 다 바뀌고 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까지는 아니고. 이전 것은 지나갔는데 아직 새것은 안되었으니. 보고 싶어도 볼게 없단 말이야.

그런데 왜 대국정원에서 일개 목사의 살인사건에 신경을 써야하죠?”

대국정원? 이 녀석, 역시 젊은 국정원 요원답게 직장에 대한 자부심이 크구나. 아무리 알바 써서 댓글놀이 했던 직장이라도 그건 알바지 정직원이 아니었다는 것인지. 하긴, 나도 니 나이땐 그랬었어.

왜냐하면 그 목사가.. 간첩 출신이거든.”

네에? 그 목사가요??”

국정원 내부에서도 모든 정보를 다 공유하는건 아니다. 사실 젊은 국정원 요원들은 요즘의 전국민적 국정원 디스 분위기가 억울할 수도 있다. 자신들은 법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채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왜 도매급으로 욕을 먹어야 하는지 말이다. 그래, 요즘 국정원 신입 요원들에게 국정원의 이미지는 그저 영화 <7급 공무원>이나 <쉬리> 같은데의 모습, 그런 기깔나고 멋있는 모습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넌 큰 신경쓰지 말고, 지난번에 경찰이랑 협력수사 한다고 했던 중국인 음식원재료 불법 밀수사건, 그거에 올인하라구.”

원장님께서 저한테 선배를 도우라고 하셨어요.”

? 원장님이?!!”

그래서 하던 일 다 던지고 온건데.. 대뜸 간첩출신인 목사를 잡으라고 하시니..”

아니, 잡으라는건 아니야. 이미 경찰에서 검거했고, 수사 들어가서 검찰에 넘길거야. 근데..”

근데요?”

녀석은 마치 장화신은 고양이처럼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며 있다.

녀석이 이대로라면 흐지부지 처벌을 받게될 수 있어. 그래선 안되거든.”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대한민국에서 죄지은 사람은 법대로 처벌받는 것 아닌가요?”

그게 왜냐하면.. 근데 왜 원장님이 너보고 나 도우라고 하신거냐? 대체 왜? 그런거 시키시면서 뭔가 말씀이 계셨을거 아냐?”

계셨죠.”

그게 뭐였어? 말해봐.”

대외비에요.”

뭐얏! 이 자식..”

언제부터 국정원 내부에 이런 하극상적인 자가 존재했었단 말인가. 나는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찌할 수도 없는 세상이라 꾹 참고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외비라면 국정원 밖으로만 안 알려지면 돼. 나만 듣고 있으니까, 좀 말해주지 않겠어?”

선배는 불안하대요.”

녀석의 말에 난 시멘트 벽돌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사적 복수 전력이 있으시다고.. 근데 이번에 분위기 보니 처리하려는 피의자, 개인적 원한 때문에 뭔가 오버를 할 것 같다, 자네가 가서 그러지 않게 막아라, 그게 국정원을 위하는 일이다.”

“...”

그러셨어요, 원장님이.”

정말 그러셨단 말야.”

, 녹음까지 했는데, 못 믿겠으면 들려드릴까요?”

아니 됐어. 녹음이라니. 너 임마 국정원 요원들끼리의 발언은 유사시 제외하고 녹음 금진데.”

버릇이 돼놔서. 유출시키진 않을거에요.”

인터넷에 올리지 마라.”

안 올려요.”

왠지 올릴 것 같애.”

아 무슨, 그런 말씀을.”

요즘 것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은 어떻게 국정원 신입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알바가 아닌 정직원으로. 또 누구 낙하산을 탄거야.

원장님 걱정하신건 이해하는데, 이번엔 그런거 아니야. 정말 사적 감정 없구, 왠지 내 예감에 이 목사놈은 과소 처벌을 받게될 것 같아서, 그게 부당하게 여겨져서 나서려는 것 뿐이라구.”

그게 문제예요.”

뭐뭣?!”

까마득한 자식이.. 대놓고 그게 문제라니. 하늘같은 선배님에게.

전 하고싶은 말은 다해요. 선배님의 예감 때문에 한 사람을 과중 처벌하게 될 수도 있잖습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신 거냐구요. 예감은 예감일 뿐인데.”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아.”

그거야 알 수 없죠.”

난 직감이라는게 있어. 직관력이 타고났다구.”

그건.. 입증된 바 없으니 무효.”

이 녀석의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으려나. 어디보자.. 어디 입다버린 폴라티같은게..

점심이나 드시러 가시죠. 목사 껀은 어차피 경찰에서 수사끝낼때까지 우리쪽에서 어쩔 수 없는거고. 할 일도 없고 배고프잖아요. 선거철도 아니고.. 정권 바뀐 다음에 더 이상 국내외 간첩들도 설치지 않으니.”

다 먹고 살자는 짓이니까?”

그럼요.”

난 느끼고 있어. 지금은 고요하지만 폭풍전야라구. 곧 국정원 한번 들쑤셔 질거란 말야.”

뭐 어때요. 그래봤자 직원들 짤릴 일은 없구 원장님 목은 달아날수도 있겠지만.”

넌 정말..”

왜요?”

난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밖에 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녀석은 날보다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린 같이 밥집에 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연예인들은 연예인 디씨라는걸 해준다지만 국정원 직원들에게 국정원 디씨다윈 없다. 국정원 디스는 있을지 몰라도.

요즘엔 연예인들도 살기 힘들대요.”

배고팠는지 밥 한그릇을 뚝딱한 뒤 물을 마시며 녀석이 말했다. 뭐야 이놈. 연예인 얘길 하려는건가, 나 그쪽으로는 문외한인데.

연예인 디씨같은 것도 잘 없다 그러더라고요.”

누가 그러디? 연예인 친구라도 있어?”

아는 동생이 연예인 코디거든요. 걔한테서 전해들었죠.”

전해들은 말은 믿을게 못돼. 안그래도, 증권가 찌라시 때문에 국정원이 곧 바빠질 것 같은데, 그게 다 쓸데없는 업무잖아. ‘누가 뭐 어떻더라~’, 대체 그런걸 왜 전하고 또 전하는거야?”

증권가 찌라시에 대한 수사는 재밌을 것 같아요. 확실히 그 내막에 뭔가 있을 것 같으니까.”

재미? 넌 그게 재미로 여겨지냐?”

이왕 일하는거 재밌게 하면 좋잖아요. 왜 자꾸 태클 거세요?”

, 태클.. 끄응..이노무 자슥..

칼바람 한번 불어서 꼰대 선배들 짤려나가구, 국내 주사파들 몇 명 조져주고 나면 이제 남는 일은 증권가 찌라시가 국내의 큰손들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겠죠. 흥미로운 일이에요. 그런데, 목사가 웬 말이냐구요. 그런 시시한 일에 왜 국정원..그것도 고위급이신 분이..”

나 고위급 아니다.”

제가 볼땐 고위급 이시죠. 저보다 훨씬 상사시니.”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야. 이 목사 한명으로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일단락 지어버리게 될 수가 있어. 그러고나서 증권가 찌라시 파면 더욱 좋지 않겠냐.”

여러 문제들이요?”

그래. 개독 문제, 간첩 문제, 일베충 문제, 그리고..국정원 디스 문제까지.”

흐음...”

녀석은 뭔가 생각에 잠긴채 이를 쑤셔대기 시작했다. 젊은 녀석 치고는 상당히 노친네처럼 이를 쑤셔대는 것이었다.

전 아무래도 증권가 찌라시 껀에는 참여 못하겠네요. 이 목사 껀 선배랑 같이 해나가다보면 일이 많아져서.”

그게 뭐.. 많을 것 같지만 안 그럴수도 있고. 의외로 신속하게 해결될 수도 있어.”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만만치 않은데요? 개독에 일베충에.. 그나저나, 일베충은 왜그리들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죠?”

조사해 봐야지.”

일베 재밌는데..”

너두 일베충이냐?”

아뇨. 충급은 아니고..걍 일반 방문자에요. 가끔 가서 보면 웃기거든요.”

그런 웃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꼭 의미가 있어야 웃음인가요 뭐.”

다 먹었으면 그만 일어나자.”

원에 가봤자 할 일도 딱히 없는데..좀만 있다가 가요. 안그래도 편두통이라 머리도 아픈데..”

그래, 넌 제발 좀 쉬어라.”

아니, 사실 맞잖아요. 별 큰 문제도 아닌데.. . 개독은 또 왜그리 싫어하고요.”

개독은.. 그동안 국민들이 가져오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폭발해서 생성된 것이지.”

국정원 디스 문젠 어떻게 해결하시려고요?”

그 목사가 국정원 요원과 관련있다는 식으로.”

어느 요원이랑 관련있는데요?”

.”

녀석은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서울 한복판에서 목없는 북극곰이 어슬렁거리는걸 본 사람같은 표정을 하고는.

거봐요, 결국 선배 사적 복수잖아요.”

아 좀 넘어가 그냥. 공적인 일에 사적 감정 개입안되는 사례가 어딨어. 다 그렇지.”

그래선 안돼요, 우린 국정원이잖아요.”

!”

나는 그러고서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식당 안에 손님은 우리 둘 밖에 없었다.

나머지 얘긴 원에 가서 하자.”

* * *

녀석에게 나머지 얘기들을 해주었다. 국정원 요원과 관계있는 자를 처벌함으로써 국정원 디스 분위기를 일신시키고, 아울러서 간첩인 녀석에게 한방 먹이자는. 녀석은 요새 사실 간첩 없지 않냐며, 그건 좀 국민들에게 안 먹히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평화통일이 되기전까지는 간첩 드립은 언제나 먹히게 되어있다. 간첩은 영화속 인물들로 나와도 증오하는게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그런 식으로 녀석을 설득하려 하자 녀석은 은밀하게 위대하게에는 간첩 나왔지만 그래도 난 그 영화가 싫지 않았다고 했다. 간첩도 어떤 간첩이냐가 관건이라나. 야 이 녀석아. 아무리 젊은 세대라 해도 국정원 직원이 간첩에 대한 마인드가 그러면 어떡해. 하지만 녀석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 어떡하지.. 그래도 별 수 없다. 일단 계획한대로 다 추진해나가자. 그러다가 마무리만 해피하면 만사 오케이잖아.

 

 

 

2

 

나와 녀석의 예상대로 곧 국정원에는 칼바람이 불었다. 부원장이 경질됐고, 극진보 성향의 국회의원 두 명이 구속되었다. 경제수사팀에서는 증권가 찌라시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및 수사가 진행되었다. 증권가 찌라시, 보나마나 뻔하다. 결국 언론사 떡밥 주기 프로젝트 같은거고 언론사는 대기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고.. 어리석은 국민들은 그걸 믿든 안믿든 그런 세력들간의 이득암투 속에서 신경이 쓰일뿐이고.. 여하튼 그래도 제대로된 조사 및 수사는 해야 하는 것이었다. 워낙 오랜 관행처럼 떠다니던 증권가 찌라시이기에, 사상 처음으로 대대적인 조짐질에 들어가자니 국정원의 많은 요원들이 투입되어야 했다.

댓글 알바도 못쓰게 됐으니, 이를 어쩐답니까?”

어떤 개싸가지가 한 소리야. 누군지 얼굴 볼 것도 없다. 분명 녀석이다. 지난 대선 댓글 알바 파동이후 원 내부에선 댓글 알바란 말 자체가 금지어가 된 상태다. 그런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면 역시 그녀석이리라. 저 자식 대체 누구야. 어느 낙하산줄이야, 어느 집 자식이야. 설마 대통령의 숨겨둔 아들놈은 아니겠지. 결혼도 안한 여자 대통령인데 그런게 있을리 없잖아.

우리로서는 뭐..더 많이 일해야 하는 것이지.”

근데 그 국정원 여자 알바.. 대체 진실이 뭐에요?”

뭐긴. 선거때 혼란을 틈타 간첩들이 설쳐대니 국정원에서 대공 업무 수행 차원에서 좀 나섰던건데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고 과하게 나서서 사단난 것이지, 진실은 무슨 놈의 진실.

그 친구는 큰 벌은 받지 않을거야. 그 친구의 잘못이 아냐.”

댓글 작성한건 그 친구잖아요?”

그게..”

망설였다. 이누마에게 다 얘기해줘야 하나. 그 친군 원래 국정원과 큰 상관없는 자다, 그런데 어쩌다 맡게 된 업무가 자신이 대했던 국정원 일부 직원들의 대공적 분위기 때문에 더욱 과장되게 주어졌다고 그 친구가 착각했다, 그래서 자기가 댓글을 단 것이지만 그게 자기가 단게 아니라고 할수도 있는 것이다...같은 얘기 따윌 해줘야 하는거냐구. 이미 다 지난 일인 것을.

, 됐어요, 별것도 아니겠지. 과거일에 집착하긴 싫으니까.”

녀석은 쿨한 척 그렇게 말했다. 그래, 자식아 너 잘났다.

선배, 일단 일베 사이트 뒤질 준비는 끝났습니다.”

해커인 한 후배 요원이 내게 말했다. 곧 일베 사이트를 조작해 그가 일베충이었음을 덮어 씌우는 작업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또하나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바로, 성범죄 전과를 덧씌우는 것이었다. 두 작업 모두 국정원과 경찰 내부에서만 아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게 된다. 다만 목사 그자식만큼은 억울할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뭐, 자업자득이니.

근데..그 목사가 대체 선배한테 뭔 잘못을 한거에요?”

녀석이 손으로 야구공을 주물럭거리며 내게 물었다. 녀석은 야구광이다. 골수 두산팬. OB베어스 시절부터.

궁금하냐..”

그 자가 내게 왜 원한을 사게 되었는지 말하자면, 내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꺼내야한다. 난 모태 기독교인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그러니까 나 학교 다니던 시절엔 국민 학교’, 그때부터 일요일마다 교회학교라는 학교를 또 다녔다. 아니 다녀야했다. 난 그게 너무 싫었다. 내게 크게 와닿지도 않는 기독교라는걸,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 내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분이 그렇게 되신 데에는 또 사연이 있다. 나는 그 사연이 이땅의 개독 문젤 푸는 하나의 솔루션 역할을 할 수 있을거라 믿는데, 여하튼 그 얘긴 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린 내가 엄마 난 기독교 안 믿어요 나 교회 안갈래요할 수 있는 가정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매주 교회에 억지로 가던 나는 어느날 엄마 몰래 교횔 땡땡이 치고 오락실에 갔다. 그 오락실엔 만화책들도 많아서 난 오락하다 질리면 한쪽에 놓여있던 낡은 소파에 앉아 만화책들을 읽어댔다. 그런데..

아 선배! 그 자가 왜 원한을 샀냐니까 왜 잡소릴 그렇게나 길게.. 핵심만 말해요 간단하게!”

녀석의 외침에 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답해버렸다.

그 자식이 울 엄마를 모욕했어.”

* * *

개독 문제. 이 나라의 개독 문제는 결국 대한민국이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조선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이어져온 고질적인 문제. 가부장적인 결혼문화. 그게 개독 문제와 뭔 관련 있냐고? 당연히 있지. 예부터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왔고, 지금은 다행히 바뀌었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때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대부분 불만스러운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참고 지내야 했다. 그게 미덕이니까.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여자들이 숨쉴 구멍이 필요했고, 그게 기독교를 절실히 믿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은 아직도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비롯해 온갖 이즘들로 겉장식은 돼있지만 여전히 구시대적 병폐가 21세기라는 요즘에도 청산되지 않고 남아있는 나라인 것이다. 그런 나라에서 그래도 먹고 살려다보니 많은 이들은 전혀 죄를 짓지 않고는 살수가 없게 되었다. 구조적으로 그런거다. 법에 명시된 죄가 아닐뿐이지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일주일에 한번 그 모인 죄를 교회에서 회개 기도 드리면서 풀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게 대한민국에 기독교가 위세를 떨치게 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를 믿는 이들 사이에서 오버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어느 분야나 하나의 개념이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게 되면, 그 개념으로 더 인정받으려는 오버쟁이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런 오버쟁이들은 언젠가부터 개독으로 불리우면서 절대적인 비난유발자역할을 자임해왔다.

사실 개독에는 두 부류가 있어. 욕먹어 마땅한 개독과 억울한 개독.”

내 말에 녀석은 처음으로 경청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전자는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타인에게 지나친 피해를 입혀. 욕먹어도 싸지. 이번에 처벌하려는 목사도 그런 부류야. 자신이 목사고 아내가 신도란 이유로 그런 범죌 저질렀으니.”

대체 이땅엔 왜 그리도 개같은 목사들이 많을까. 곧 해결될 문제겠지만.

후자는, 사실 자기가 살기위해 기독교에 모든걸 바쳐야 했던 사람들이야. 그들의 신앙심 혹은 신앙행위는 타인과는 무관하지. 그런데 요즘 들어 그런 억울한 개독들은 괜한 개독 마녀사냥 때문에 오히려 피해를 보고 있는게 사실이야.”

그렇군요.”

그런 억울한 개독들이 이땅의 욕먹어도 마땅한 개독들과 개독이라면 무조건 다 욕하는 미치광이들을 한꺼번에 쓸어내줘야 해.”

그게 선배의 사명?”

아니, 내 사명은 아니고. 난 그저, 울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거고. 근데, 개독들을 지나치게 욕하는 분위기도 요즘은 많이 없어져서. 그저 이 목사 녀석만 제대로 처벌하면 일은 끝나는 것이지.”

그 목사가 어떻게 선배 어머님을 모욕했는데요.”

그건 묻지 마!!”

나는 수년만에 그렇게 버럭 소릴 질러놓으니 약간 뻘쭘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목 아래쪽이 쑤셔왔다. 국정원이 뭇매를 맞으면서 특히, 큰소리를 내본적이 없는 나여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녀석은 내 고함소리에 놀랐는지 약간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내게 물었다.

이제 제가 뭘하면 돼요?”

서울 경찰청 성범죄 수사대에 가서 협조 요청해.”

어떤?..”

그 목사놈 성범죄 전과 얹으라고. 뒷일은 국정원에서 알아서 할테니까.”

원장님 허락 떨어진 일인가요?”

물론이지.”

뻥이었다.

저야 뭐..선배가 제 상사분이니 하라는대로 하겠지만.. 경찰쪽에서 어찌 대해줄지..”

이번에 좌파 두명 조지구 증권가 찌라시 대대적으로 때린 후니까, 우릴 얕보지 못할거야. 하자는대로 안해주면 그게 이상한거겠지.”

하긴 그렇군요.”

먼저 청에 가있어, 나도 곧 갈테니까.”

녀석이 나간뒤 난 녀석에 대해 뒷조사부터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과연 저놈의 부모는 누구인가.. 국정원 기밀 DB를 뒤지던 나는 그만.. 봐선 안될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녀석의 아버지가 다름 아닌.. ‘일베대마왕이었다.

 

일베대마왕이라고 있다. 일베충 중의 일베충. 직업은 아이돌 가수 기획사 대표. , 여러분이 상상하는 빠빠 거리는 크머시기 그 그룹 회사 대표 아니다. 오해마시길. 국내에 일베충인 아이돌 기획사 대표가 전부 그 사람인 것은 아니니까. 이번에 이 목사 자식 껀을 진행해가면서 일베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 본 결과(해커인 요원의 덕을 봤지만) 의외로 이 사람이 일베야?’ 싶은 자들이 많이 있었다. 물론 일베 회원이고 일베 방문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마녀 사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난 녀석이 의심스러워진 것이었다. 일베에 대해 호의적인 얘길 했었고.. 평소 하는 행동들을 보면 개념도 없어 보이는데다가 결정적으로, 아버지가 일베대마왕이니.. 일단 일베대마왕인 녀석의 아버지부터 뒷조사를 하다보면 혹시나 녀석에게도 일베충으로서의 잘못이 존재한다는걸 알게 될까 하는 생각에 내심 꺼려지는 나였다. 녀석은 나와 끝까지 함께 해주어야 한다. 이번 목사 녀석을 무기징역 맞게 해야한다. 그러기 전에는 녀석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면 안된다. 원장님이 뭐라 그랬건, 녀석이 나와 함께 한다는 조건 하에 내 호작질을 허용해준 것이고, 그 의도가 무엇이든 나는 그 목사 녀석을 강력히 처벌해 내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내 어머닌 지금 그 자식이 준 충격 때문에 알츠하이머에 걸려 병원에 누워 계시다. 수십년 멀쩡하시던, 억울한 개독으로 살아오신 것 빼고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지내오신 착하고 사람좋은 아주머니가 말이다. 지은 죄라고는 남들 아이 둘 낳아 키우는데 셋 낳은 거밖엔 없다. 그리고 여죄가 있다면, 남편 회사 직원들 점심 싸다주느라 10인분의 밥을 머리에 이고 흔들거리는 시내버스에 탄 죄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정신 나가지 않게 생겼냐고.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게 따뜻이 대해주시던 분인데.

선배님, 전화가..”

생각 속에서 헤엄치느라 휴대폰 벨소리도 못듣고 있었다. 전활 받으니 녀석이다.

선배, 어서 청사로 와주셔야.. 제가 말해선 안 먹혀요.”

지원 요청인가. 그래, 어차피 거긴 가야하니. 가주지.

* * *

그냥 내말대로 해!!!!!!!!!!”

내가 경찰청장 앞에서 외친 건 그거였다. 다른 말들도 했지만 그게 압권이었지. 그러나 청장은 손사래를 쳤다. 그리곤 단호히 말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됩니다.”

왜 안돼?”

선배, 제게는 경찰 조직을 지켜야 하는 사명이 있어요!”

청장은 내 국정원 후배였다. 친하진 않은.

한번만 도와줘!!”

난 공적 명분으로는 안되니 사정조로 나서기 시작했다. 녀석은 그런 내 변화가 흥미로운지 씨익 웃으며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배.. 그런건 알아서 처리하세요. 그리구.. 까놓고 얘기해서 그 목사 자식 무기징역 때려봤자 뭐가 달라집니까..”

울 어머니가 어떤 꼴이신지 너 몰라서 하는 얘기야..”

몰라요 난.”

청장이 매몰차게 말했다.

우린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친한 사이가 아니라. 그건 맞다. 그래도,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나쁜 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죄지은 놈이 처벌을 약하게 받는 사횐거 뻔히 아니까 그 벌을 합당하게 주게 하자는 건데. 어쩌다 이런 내 공적 행위가 사적 복수랑 우연의 일치적으로 맞아 떨어져서 내가 이런 고초를 겪는것인지.

그렇다면 청장님.”

나는 격식을 갖추며 물었다.

대체 왜, 이 사회는 범죄자에게 그리 관대한겁니까. 아니, 왜 처벌을 강하게 주지 않는 것이죠.”

저도 그게 궁금해요.”

녀석이 끼어들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건.. 이유가 있어요. 왜냐면.. 우리 사횐 전과자 되면 인생 쫑 아닙니까. 형 살고 나온다음에 더 살기 힘들게 되기 때문에.. 형을 너무 마이 때리면 너무 가혹한 거라고요..”

그래도 형을 때리는게 옳잖아. 법치주의 국가에서.”

선배, 그건 좀 아니죠. 법 공부 하셨으면서. 법은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아요. 단지 규율할 뿐..”

넌 닥쳐 일베충 새꺄.”

나도 모르게 흥분하면 안해야 될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곤 하는데, 딱 그짝난 거였다. 청장은 일베충이란 말에 녀석을 노려보았고, 녀석은 당황하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저한테?”

암튼.. 그렇다면 나 이대로 그냥 안있어. 법원에 컨택할거야.”

안된다니까요.. 이미 그런 시대 지났어요. 이제 좀 편히 사슈.. 나이도 있는 사람이..”

?”

“...”

청장은 헛기침을 했다.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목사 자식이 무기징역을 받을 가능성은 낮아보여요. 하지만..골탕 먹일수는 있어요. 그렇게 해드릴까?”

나와 청장은 동시에 녀석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지?

뭐 눈치 보아하니 제 뒷조사 하신 것 같은데.. 그래요, 저 일베충예요. 근데 일베충 중에서도 선충이 있고, 악충이 있어요. 문제시 되는 놈년들은 다 악충이죠. 전 선한 일베충, 즉 선충이에요. 그 목사 자식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있지 않겠어요?”

“...”

“...”

예를 들면 가족같은. 그런 소중한 존재를 인터넷 상에서 아작내버리면..”

그건 안돼.”

청장이 할말인줄 알았는데, 내가 먼저 그래버렸다. 녀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아니 그렇게 복수하고 싶어하시면서.. 왜 가족들 골탕먹이는건 안된다고..”

가족은 그 자식과 무관해. 연좌제적 행위 따위 하면 안된다고.”

“...”

청장도 동의하는지 말이 없었다.

아니, 국정원에서 그동안 숱하게 연좌제적 검거행위 해오신 분이..”

그거랑 이거랑은 달라!”

나는 그 한마디를 하고 청장실을 박차고 나갔다. 청장은 허옇게 샌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었고, 녀석은 곧 내 뒤를 쫓아 청장실을 나왔다.

여봐요 선배!”

여봐요? 야 임마! 너 내가 그렇게 만만해보여? 아니면 원래 개념상실 종자야?”

아니이.. 이거 왜 이러세요, 그 자식을 조져 주자니까? 가족을 망치면 그 자식이 고통스러울 거라고.. 그러면 그 자식에게 복수하는게 되는데 왜 거부하는 거냐고요.”

너도 어차피 이 자식아, 국정원 명찰 떼야될 놈이야..”

왜요, 일베충이라서요?”

그래.”

저희 아버지가 누군지도 아셨겠군요.”

그래.”

녀석은 숨을 고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이중 인격이 심하셨었죠. 유체이탈적 삶을 사셨달까..”

“...”

그런 삶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셨어요.. 그쵸?”

내가 어찌 알겠냐.”

아실텐데요..”

녀석이 나를 노려보는건 마치 유희열이 뜨곤 하는 매의 눈보다 강렬한 모습이었다.

좋아요 뭐, 일단 그건 이쯤 하고.. 그럼 저는 여기서 목사 껀에서 손떼고, 증권가 찌라시 팀에 합류하겠습니다.”

니가 떠나면 난 목사 껀을 더 이상 밀고 나가지 못하게 돼!”

그러니까!”

이번엔 녀석이 큰소릴 냈다. 제길, 대한민국에선 여전히 큰소리 내는 사람이 이기나.

그러니까요.. 선배..끝났다구요. 그 목사는 아마 중형 맞을거에요. 인터넷 상에서 여론몰이도 장난 아니니까..”

“...”

그쯤 하시고, 내려놓으시라고요.”

“...”

그리고 정 할 일 없으시면, 저랑 같이 증권가 찌라시 팀에 합류하시든지.”

녀석은 그러고선 앞서 가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대로 끝내도 모든 것이 억울하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언제나 파장 분위긴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래. 그러자. 그래야겠지.. 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여전히 아팠지만.. 내가 그런 식으로 복수하느니 어머니 계신 병실에 한번 더 가보는게 옳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난 뭐하나. 나도.. 증권가 찌라시 팀에 합류해야 하나.

 

 

 

3

 

국정원 고위급 윤상훈. 내 이름이다. 상훈. 상서로울 상 자에, 공 훈 자. 나라에 상서로운 공을 세우라는 의미에서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 그리고 난 그 이름에 걸맞게 국정원에서 수십년 근무하며 나라에 크고 작은 공을 세워왔다. 그리고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매사에 의욕이 없고, 불평불만이 많고, 무엇보다 생각이 많다. 그래서 국정원 요원으로서 일하기도 전보다 어려운데, 그런 내 빈 구석을 녀석이 채워주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뭐지. 정말 내 시대는 간건가. 녀석과 증권가 찌라시 팀에 후발 참여 하고난 후부터 난 자꾸 그 녀석에게 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녀석, 왠지 낙하산 줄이 보통 줄이 아닌 것 같다. 아버지는 일베대마왕이고, 낙하산 줄은 오유표 낙하산 줄인가. 뭐 이건 허섭한 농담이고. 어쨌든 이 녀석이 국정원에 어떻게 들어온건진 모르겠지만, 증권가 찌라시 팀에서 녀석이 보여주는 활약상은 그래도 인정해줄만한 어떤 것이었다. 난 그저 녀석이 말하는대로 따라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증권가 찌라시 수사는 사전 조사 작업만 엄청나게 시간을 들였다. 사실 최근에 여러 연예인들이 곤혹을 치러 사회문제가 되기 전부터 국정원에서는 증권가 찌라시에 대해 내사를 해왔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걸 만드는 이들에 대해 비밀스럽게 조사를 해왔다는 얘기다. 흔히 증권가 찌라시는 증권사 직원들이 만드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조사해보니 사실은 좀 달랐다. 증권사 직원들은 그런 찌라시들을 퍼뜨리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찌라시 안의 내용들을 생산하는 이들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바로.. 유명 언론사였다.

 

내 직감은 녹슬지 않았던 것이다. 유명 언론사는 모두 기업들과 연계돼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언론 기사를 화제로 만들어야 기사가 팔리고 기업의 광고가 팔린다. 일견 언론사들은 증권가 찌라시를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론 언론사 내부에 증권가 찌라시 전담부서를 따로 두고 정기적으로 찌라시 내용들을 만들어내 그걸 증권가에 보내 일종의 세탁을 시킨 다음 다시 자신들이 기사 자료로 활용하는 시스템이었다. 증권가 찌라시, 라는 말부터 언론사에서 만든 말이다. 왠지 허황된 가십이더라도 증권가라는 말이 앞에 붙으면 공신력을 줄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었다.

아직 이렇다할 움직임은 없어요.”

김미영. 이번 국정원 증권가 찌라시 팀의 팀장을 맡은 여자였다. 유명한 문자 피싱녀 김미영 팀장과 이름이 같아 곤혹을 치렀던 적이 있어 원내에서는 알게모르게 유명인사였다.

법적 대응을 하겠다던 연예인 측 대부분 소극적으로 태도 전환 했습니다. 우리가 너무 깊게 파면 괜히 다칠 수도 있어요.”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팀장님.”

녀석이 말했다. 이 녀석, 증권가 찌라시 프로젝트가 적성에 맞는지, 완전 물만난 물고기였다.

뭐죠?”

지금 상황은 억지로 가라앉혀진 상태입니다. 마침 국민 여론도 그 어느 때보다 증권가 찌라시를 혁파하고 싶어하는데, 이때를 놓치면 언제까지나 그런 허황된 소문에 나라가 신경을 써야 하게 될수 있습니다. 제대로 조져줘야 합니다.”

경찰이나 검찰이 할 수 있잖아요 그런건.”

그들이 제대로 못하니까..우리가 나서는 것이겠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녀석을 비롯한 모든 팀원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 나는 뭐, 이런 멋있는 말 한번 하면 안되냐.

괜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뭐, 팀원들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지금까지 조사하고 수사해온 것들의 핵심만 말해봐요. 뭘 얻었고 뭘 해왔죠.”

이번 증권가 찌라시 껀은 사실 국정원 사상 최대의 프로젝트였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어느 조직에서도 하지 못했던, 진정한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그래서 더 이상 댓글알바의 국정원이나 동네북 국정원이 아닌 진정 국민을 위한 국정원으로 거듭나려는. 그렇기에 국정원은 원의 사활을 걸고 매달렸다. 설령 이번 일로 국정원이 폐쇄된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할 정도로.

핵심은 그겁니다. 지성 그룹을 제외한 100대 그룹이 주요 언론사들과 연계되어 이 찌라시의 내용들을 만들고 있고.. 증권사들은 역시 그 그룹들 산하이기 때문에 여과없이 그런 걸 퍼뜨리고 있는 거고요..”

크게 정치적인 문제는 없는 것 같지만.. 사회 혼란을 야기시킨다는게 문젭니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업계측 회사도 이 찌라시를 은근히 즐기는 세력이 있다고 하고요.”

엔터테인먼트 쪽은 찌라시의 피해자 격 아닌가?”

팀장이 묻자, 한 팀원이 대답했다.

사실상 피해자는 연예인 당사자고요.. 어차피 연예인은 독립적인 회사와 같은 개념이니.. 소속사라도 그들이 가치가 없으면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는 구조지요.”

최근에 프리미어 리거 연하남과 결혼한 여배우 있잖습니까.”

있죠.”

그 여배우가 그렇게 명품족이라고 찌라시에 떴었는데.. 그에 대해 소속사는 부정 하지 않았거든요.”

그거야..부정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해서겠지.”

아뇨,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배우가 진짜 그런 골빈년이란 말이야?”

실망인데.. 하는 반응들이 나오는 분위기였다. 난 실망하지 않았다. 명품 좋아하는게 당연한거 아닌가? 한국 여자라면 다들 명품 좋아하잖아?

.. 생각해보니 그 증권가 찌라시라는게, 그런 것 같습니다.”

난 그저 떠오른대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인데, 녀석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주목하니 부담도 되었지만 그래도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그 내용을 보면 별게 아닌데.. 괜히 증권가’, ‘찌라시란 표현이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과장되게 받아들일수 있게 하는 것 같고, 결정적으로 그 내용을 쓰는 문구적 표현들이 마치 어떤 커다란 비밀을 밝혀내는 식으로.. 또는 어떤 대단한 르포 같은 느낌이 들도록 사용되어 있어서, 그래서 그게 문제가 되는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증권가 찌라시 내용들을 제대로 분석해보면 다 그냥 사적인 얘기들이에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수 있는 그런 시시콜콜한 내용들이라서.. 그게 부자연스럽거나 부당하거나 그런건 없거든요. 불법적인 것도 없고.”

아마도.. 이미지를 파는 연예인이 그 이미지에 반하게 행동하는 것, 그런 것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그 연예인과 연관있는, 즉 그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고 있다든지 하는 기업들이 찌라시를 만들어 증권가 쪽에 전해주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군..”

김 팀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화제가 되는 찌라시의 주인공인 연예인이 광고 모델로 있는 기업들만 조지면 되겠네요? 그리고.. 그 연예인과 사적 관계랄까, 그런게 있는 기업들도 함께.”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사료됩니다.”

팀원들 모두 공감하는 듯 보였다.

자 그러면 우선.. 가장 최근에 문제가 된 두 거물급 배우의 이혼설.. 이혼하게 된 속사정이 숨겨둔 자식이 있어서 라고 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두 배우는 정말 행복하게 살줄 알았기에.

그 사건부터 파보자구요. 두 배우가 현재 어느 기업들 광고 모델을 맡고 있죠..”

* * *

어때, 이제야 좀 일할 맛 나?”

화장실에서 꼭 만나게 된다. 직장 내에서 거슬리는 자들끼리는. 마침 내가 소변을 보러 들어왔고, 녀석이 볼일 끝낸 뒤 손씻고 있었던 것이다.

글쎄요.”

기업 수사 들어가니까.. 국정원답고 좋잖아. 악플 달고 그러는거보다야.”

제가 악플 달았나요.”

“...자네 이번에 한 껀 잘하면 승진 쉽게 할 수 있을거야.”

“...”

이번에 손볼 기업이 몇군데 될 것 같은데.. 다 유명 기업이고 국민들은 그런 비리가 있을줄 모르는 회사들이야. 국민들 사이에서 스타가 될수야 없겠지. 우린 경찰이나 검찰이 아니니까. 음지에서 움직이니까 말이야.”

그것도 좀 불만예요. 왜 국정원은 늘 음지에서 양지를 도와야 하는지. 좀 드러내면 안돼요 이제?”

글세.. 간첩들 때문이겠지.”

기업들 수사해봤자.. 그냥 그거로 이번 프로젝트도 일단락 되겠군요. 찌라시 내용 만든 주동자들 회사에서 쫓아내고, 법적 처벌하는 거로.”

다 그렇지 뭐. 대단치 않은 시대야.”

“...선배는, 무슨 낙으로 이 생활 수십년 동안 하셨어요?”

제법 진지하게 묻는 투였다. 글쎄다.. 그냥.. 자부심? 보람?

돈 주니까? 돈 필요하잖아. 글구 월급도 쎄. 누가 무시하지도 않고.”

별 이유 없군요. .”

녀석은 손을 종이 타월에 닦더니 날 보며 씩 웃었다. 나는 바지 지퍼를 올리고선 물었다.

왜 웃어?”

그냥.. 국정원 정직원으로서 오래 버티기 노하우랄까.. 그런게 궁금해져서요. 좀 가르쳐 주십사 하구.”

맨입으론 안돼.”

술 살게요.”

나 금주 금연 금섹 금약 금도야. 오금주의자지.”

오금이 저리는구만.”

최근에 나온 영화 블루레이 박스가 있는데..”

“?”

그거 사준다면..또 모를까.”

, 선배 영화 좋아하세요?”

.”

영화 마니아군요?”

그렇다고..해야겠지? 그래야 블루레이 사줄 것 같으니까.”

귀엽게 구시긴..”

?”

그럼.. 오늘 저녁에 저랑 같이 영화보러 가실래요? <7급 공무원2>가 나왔다고, 시사회 보러 오라더라고요.”

국정원 직원이 무슨 시사회야. 해야 할 일이 산더민데. 저녁 몇신데?”

“8시오.”

당연히 되지. 어디 극장이야?”

 

 

 

4

 

나도 한때 지금보다 더 심한 영화 마니아였다. 인터넷 커뮤니티 중에 영화 커뮤니티가 있는데 거기서 열광적으로 활동하던 영화 청년이었다고나 할까. 지금이야 뭐.. 다들 내 자식뻘인 사람들이 활동하는 곳이라 나는 눈팅만 할뿐이다. 극장 가는 차안에서 녀석에게 물으니 녀석도 영화 커뮤니티에서 활동중이라고 한다. 익스트림 무비라는 곳이라는데, 나도 한때 자주 방문해 글을 읽던 곳이었다. 그곳 사람들의 영화평은 다른 곳보다 정확했었다.

선배, 버터구이 오징어.”

녀석이 사라져서 어디 갔나 했더니 오징어가 들은 흰 봉지를 내게 안긴다. 그속엔 달달하고 꼬소한 오징어가 들어있었다. 방금 구웠는지 따끈했다. 한 조각 먹어보니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미친 듯이 흡입했다. 녀석은 표를 받아오겠다고 가더니 이내 플라스틱 안경을 쓰고 내 앞에 나타났다.

대박! 선배 오늘 시사회 3D래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3D로 본 영화는 관자놀이가 쑤셨다. 3D안경인가 뭔가가 내 몸이랑은 안 맞는가보군. 녀석은 재밌었다고 난린데, 허어 이건 뭐. 아들 대하듯이 보듬어줘야 하는 건지. 영화가 재밌으면 재밌는 것이지, 뭐 그리 난리칠 것 까지야. 녀석이 좀 이런 면이 원래 있는 모양인가 싶었다. 열정이랄까 뭐 그런.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게 그런 거잖나. 열정. 낭만. 용기. 겸손. 녀석은 이중에서 겸손은 먹고 죽을래도 없지만, 열정이나 용기는 꽤 있는 듯 보였다. 낭만은.. 글쎄, 이 녀석이 과연 낭만이 뭔지 알까?

.”

.”

너 낭만이 뭔지 아냐?”

로맨티스트?”

어디서 주워는 들었군.

왜 이러세요, 저 여자 좋아해요!”

아니... 뭐 이런게...”

녀석의 개드립에 순간 난감했지만, 곧 추스르고 이렇게 말하는 나였다.

낭만은.. 곧 여유를 뜻해. 여유는.. 내가 가져야만 가질수 있는거야.. 그리고 그건 아주 쉬운거야.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니까..”

“...”

너도 그런걸 알게되면, 사는게 훨씬 행복할거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아버지 행세는 하시네요.”

“...”

진작에 좀 그렇게 하시지.”

미안해.”

녀석의 반응이 예상못한거라 난 당혹스러웠다. 뭔가 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내가 어떻게 국정원에 들어왔는지 궁금해하셨죠? 이딴 쓰레기가 어떻게 들어온건지..”

“...”

국정원장 낙하산줄 타고 들어왔어요.”

“...”

국정원을 주제로 한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었죠. 그 글에 원장님이 감동하셨대요.”

그랬구나.”

녀석이 어릴때부터 글은 잘 썼으니까.

원장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아버지 명예를 더럽히지 마라..”

“...”

아버지는 최고의 요원이다.”

으음..”

왠지 부끄러웠다.

근데 왜 그러죠? 전 그냥..계속 아버지 명예를 더럽히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말도 막하구.. 행동두... 아버지한테 반항도 대놓구 하고요.”

철없는 것.”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까.

어머니랑 이혼하시구나서, 난 아버지가 죽도록 싫었어요. 능력이 안되면서 애는 왜 낳은거에요.”

그 애가 너야.”

그러니까요!”

“...”

난 왜 태어난것이지..”

정훈아.”

녀석의 이름은 정훈이었다. 국정원 7급 공무원 윤정훈.

그런 말은 부모님 앞에서는 하는게 아니야.”

뭐 저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 했으니까요. 난 왜 태어났을까..”

사람이 태어나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거야.”

부모님이 섹스해서?”

아니야!”

난 소릴 질러야했다. 녀석이 날 쳐다봤다.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만 잊지 마.”

제길..”

중앙선은 전철이 드럽게도 안 오는구나. , 이제야 온다.

차 들어온다. 얘긴 나중에 하자.”

아버지.”

그냥 선배라 그래. 원내에선 모르는 이들도 많은데, 버릇될라.”

“...”

난 반대편이다. 어서 타.”

전철이 플랫폼에 멈춰서더니 문을 열었다.

.”

내일 뵈어요.”

그래. 어서 가.”

녀석이 타고나서 조금 있다가 문을 닫고 가버리는 전철이었다. 그 바람 속에서 녀석의 체취가 느껴졌다면 내가 너무 민감한걸까. 난 그날.. 집에 가서 소주 한병 깔 참이었다. 금주한지 이십 구년만에 처음으로.

 

내가 녀석이 버림받은 심정이 될거란걸 알면서도 이혼해야 했던건, 두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아내에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었다. 짐도 보통 큰 짐이 아니었다. 크면서 심지어는 무겁기까지 했다. 그런 짐은 아내의 인생을 통째로 잠식하다시피 했다. 아내에게 숨을 쉬게 해주고 싶었다. 또하나는, 아내가 외도한걸 알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만 알게 되었다. 아내조차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글쎄, , 정훈이 녀석이 나중에 알게될진 모르겠지만. 여하튼 정훈이 녀석도 아직까지는 모르고 있다. 잘됐지 모. 난 그저.. 아내가 자유롭게 사랑하고 만족스럽게 사랑받으며 살게되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먼저 떠나는게 옳았다. 지금도 난 이혼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내는.. 생각보다 정훈일 맡기 싫어했다. 어쨌든 정훈일 키운건 아내다. 하지만 나를 우연히 볼때마다 아내는 말했다. 정훈인 당신이 데려갔어야 했다고.. 과연.. 그런 것이었을까. 소주맛이 쓰디쓴 보약처럼 여겨졌다.

* * *

왜 여자들은 남자랑 잘 안되면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할까. 왜 남자들은 여자랑 잘 안되면 돈 핑계를 댈까. 모두 부질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기란 쉽지 않은 세상에서 만났으면 어떻게든 잘 지내려 애써야 하나 그러지를 않는다. 그러고선 헤어지고 그러고선 남은 인생 허무하게 살다 간다. 다음날 아침, 숙취로 괴로운 속을 달래려 콩나물국을 끓이며 서서 그런 생각을 하는 나였다. 국정원 고위급이 왜 그런 남녀관계 생각을 하냐고? 이혼남이니까. 당연히 남녀관계에 관심있다. 직업 불문하고.

 

혹자는 이혼하지 않고 사는게 가장 쉬운 일이었다고 했다. 나역시 빠지지 않아도 되는 셀프 정죄의 늪에 나서서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내를 떠나보내지 않았어도 되는데 떠나보냈다고 해서 잘못한게 아닐 수 있다. 그건 내 선택이고, 내 인생일 뿐이다.

재혼하고 싶으세요?”

정훈이 녀석. 아침부터 날 갈군다. 아버지 앞에서 못하는 말 없네.

?”

영화나 여자나 그렇죠. 너무 기대하고 좋은 건, 정작 만나면 실망해요.”

“...”

별 생각없이 만나서 시간 보내다보면 좋아지는 거죠. 근데, 그게 왜 잘 안되는지 아세요?”

?”

욕심 때문이야. 너무 밝히니까. 내눈에 재밌는 영화, 내눈에 예쁜 여자!”

“...”

그렇게 너무 밝히니까 정작 모든 여잘 다 평가하게 되죠. 그런게 곧 편견인데 어느 여자가 좋다고 다가오겠어요.”

난 재혼 안해두 돼.”

그렇겠죠.”

그냥..국정원도 퇴직할까 한다.”

?”

녀석은 놀란 눈치였다.

 

 

 

 

 

5

 

왜요? 이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둬요?”

상처 받았으니까. 난 지금 제정신이 아닌거나 마찬가지야 임마! 수십년간 혼자 지내면서 뭐가 그리 행복했겠냐!”

아빠도 참!”

누가 들었을까봐 얼른 주변을 살피는 녀석이었다. 다행히 복도엔 우리 둘밖에 없었다.

상처라뇨..”

아 몰라, 나도 그동안 새로운 사랑 시작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해봤어. 근데..안돼.”

무슨 노력을 했는데요?”

인터넷에서..”

그러니까 안돼죠.”

“?”

인터넷에서 여자 만나는거, 안돼요. 이삼십대 젊은이들이나 그러는 거지..”

“...그래도.. 신세경이나 이연희 사진이 프로필에 올려져있으면 대화를 청했고, 말이 잘 통해서 괜찮을 줄 알았어. 근데..”

이런 병신!”

녀석의 발언은 역시 거침없었다.

자기가 신세경이나 이연희 닮았으면, 뭐하러 프로필 사진에 걔네들 사진을 올려놨겠어요? 자기 사진 올려놓지!”

.., 그러네.”

녀석, 역시 나닮아 천재인 모양이었다. 별걸 다 알구.

고작 여자 몇 명 만났다가 잘 안된거 때문에 상처 받아서 국정원을 그만둔다는게 말이 돼요? 그건 마치.. 대한민국 TV드라마에서 직업이 의사나 국정원 직원이나 재벌 2세나 백수나 할거없이 죄다 연애만 하는 것처럼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라구요..”

차암..우리나라 드라마들은 좀..그래? 그치?”

그게 요점이 아니라!”

난 녀석에게 혼나는 심정이 되었다. 이녀석, 오래 사귄 여친이 있는건가.. 나보다 연애 쪽은 한수위 같아. 포스가 그래.

때려치지 마시라구요.”

안 때려칠게.”

내가 히죽 웃자 녀석은 오히려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콧구멍에서 김이 나오는게 진짜로 보였다. 황소 같았다.

하기사 뭐, 선배가 때려치면 내가 승진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순 있겠군.”

그냐앙, 오래 해먹었잖아.”

내 진지한 말투에 녀석은 약간 어색해하는 얼굴이었다.

너도 들어와서 자리 잡은 것 같구.. 이제 난 물러나도 되지않나, 수십년 일만 해왔는데 이제 물러나서 그동안 못해본것도 해보고..”

못해본게 뭔데?”

잠자는거.”

겨울잠이라도 주무시려고?”

이 녀석 참..”

“...”

정말 매일 출근하면서 많이 힘들었어. 이젠 그만두고 좀 쉬고도 싶..”

아 그냥 일하시라니까요! 은퇴다 제2의 인생이다 뭐다해서 얼떨결에 하던 일 그만뒀다가 지하철 노약자석에 인상쓰고 앉아있는 우울한 백수 할아버지 되신다고요!!”

그 분들이 우울하다고 왜 단정해?”

네에?”

그분들은 평안한걸수도 있어.. 니가 괜히 오해한것일수도.”

아녜요, 지난번에 뉴스 인터뷰 하는거 보니까, 무슨 일이든 할수만 있다면 하고 싶으시다구.. 노니까 너무 힘들다구..”

그거야.. 그런 주제로 인터뷸 했으니까 그런 말을 하신거지..”

“...”

이거 참. 아직 멀었구만. 방송을 그렇게 몰라서야..”

여하튼, 난 죽을때까지 일할거에요. 은퇴따위 없어.”

그건 니 인생 철학 같은거고..”

“...”

니 인생을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라구..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거니까.”

그런가요.”

후훗.”

인정하는 모습이 귀여운 녀석이었다.

그나저나 너, 여자친구 있냐?”

있죠 당연히.”

오올~ 당연히?”

이 나이에 이 외모에, 국정원 정직원인데 여친 없으면 븅신 취급 받아요!”

언제 한번 같이 보자. 아빠가 아빠 노릇 좀 하게.”

됐어요.”

?”

아빤 못 생겨서.. 걔 보여주기 싫다고요! 쪽팔려..”

이런 개자식이..”

하하하!”

욕을 들으니 오히려 웃는 녀석이었다. 변태같은 자식.

사귄지 얼마나 됐냐?”

“1년 좀 넘었어요.”

결혼도 하겠네?”

알아서 할테니 염려마요.”

난 이대로 들어가서 사직서 쓸거야. 그리고 니 여친한테 전화해야지~”

여친한테 전활 하긴 왜 해요? ? 글구, 연락철 어떻게 알아서?”

니 휴대폰 해킹하면 돼~”

이런 니미.. 무슨 놈의 국정원 요원이 아들 휴대폰이나 해킹한다구...!”

나 이미 마음은 더 이상 국정원 요원 아니라니까?”

너무 해요!”

오그라든다, 그만하자.”

내가 진정시키자 녀석도 그렇게 느꼈는지 차분해지는 분위기가 되었다.

만약 새로운 사건이 터지면, 나도 이 조직에 더 남아있게 되겠지.”

“...”

하지만 내가 남아있자고 없어도 될 사건이 터지길 바라지는 않아. 그건 옳지 않은 거니까.”

“...”

사실 이제 좋은 세상이 되어서, 더 이상 국정원이 비밀스럽게 뭔가 해야하는 것도 별로 없어.”

정권이 바뀌고나서 그렇게 되었죠.”

“...그래서 심심한거야. 그만두려 하는것도 그때문이고.”

아버지 없이, 제가 잘 할수 있을까요.”

녀석, 답지않게 웬 약한 소리?

당연하지.. 넌 이미 잘하고 있잖아.”

내색은 안했지만.. 아버지가 있다는 생각에 그랬던 건데.. 자신있게 막말을 했던 것도.. 그렇게 막 행동 했던 것도..”

넌 나말고도 훌륭한 낙하산줄이 있잖니. 원장 라인.”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요..”

아니, 국정원 7급이 원장 총애 받으면 대단한거지, 그보다 더 큰게 있나?”

“...”

난 이만 가볼게. 아무리 국정원 일이 줄었어도 너무 놀면 안되지. 나중에..”

“...”니 여친이랑 니 엄마랑 우리 넷이 함 보자구. 맛있는 것도 먹고..”

“...아부지..”

그런게 인생이지, 뭐 별거니. 간다.”

아부지..”

"괜찮아 임마, 난 크레용팝에 대적할 신인그룹 애들이랑 쉬엄쉬엄 사업해가면 되니까." 

녀석의 목소린 작아져 갔고, 나는 녀석에게서 멀어져갔다. 복도 코너를 돌때쯤 어렴풋이 들은 것 같다. ‘아부지 사랑해요하는 녀석의 소리를. 하지만 나는 영원히 못들은체 하고 싶었다. 징그러워 다큰 아들놈한테서 사랑한단 고백 듣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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