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사막에 관한 일반적인 오해

2013.01.10 05:24

뉴우지 조회 수:1758

사막에 관한 일반적인 오해



그는 사막의 중심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세 오아시스를 거치고 두 번 캐러밴과 조우했다. 예상 했던 기간보다 이주일 쯤 길어졌을 때, 언제 끝날 지 알 수가 없었을 때도 청년은 걷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한낮의 폭염은 비껴갔지만 여전히 대기는 뜨겁다. 하늘은 끝이 닿을 듯 푸르고 이따금씩 검은 궤적이 지나갔다. 캐러밴을 떠난 지 한 시간 반,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였을 때 청년은 ‘표식’을 보았다.
가슴까지 오는 나무막대가 붉은 대지 위에 꼽혀 있었다. 그리고 머리뼈가 걸려 있었다. 꽤 많은 생물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청년이었지만 무슨 생물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낙타와 비슷한 뼈의 미간에는 뿔이 돋아 있었다. 하늘을 향해 굽어있는 짧은 뿔. 끝은 빛바램과는 달리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머리뼈에는 뼈에서 느낄 수 있는 이상할 정도의 생생함이 있었다.
하얀 각질 안으로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를 보며 청년은 ‘움직이는 사막’에 도착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왼손에 매인 붉은 스카프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그는 쉼 호흡을 두어번 하고 표식을 지나갔다.
십분 걷기도 전에 그는 바람이 멈췄다는 걸 알았다. 낮고 완만한 모래 언덕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다. 표식에서부터 이어진 자신의 발자국을 보며 청년은 꼭 두더지 떼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Blue Moon]을 허밍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일곱 번쯤 되풀이 되었을 때 나무가 나타났다. 청년은 간만에 나타난 높은 사구를 넘는 중이었다. 신발에 들어간 모래를 털어 버리고 청년은 아래를 보았다.
처음에는 또 다른 표식처럼 보였던 것이 다가 갈수록 커졌다. 7m 정도 되는 나무는 이파리가 하나도 없었고 가지 또한 두 개 뿐이었다. 약간 비뚤한 ‘Y'자 형태의 나무는 세손가락 나무가 분명했다.
청년은 미소 지었다. 드디어 찾았다. 하지만 나무 주변 어디에도 수취인이 살만한 집은 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가서야 청년은 나무가 바로 집이란 걸 알았다. 갈색 휘장은 얼핏 보면 껍질로 착각할 정도로 나무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휘장을 걷어 올리자 서늘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그리운 먼지 냄새가 났고 청년은 안도감을 느꼈다.
나무를 통째로 파서 만든 집 안에는 얼룩 같은 그림자가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집의 일부였던 것 같다.
청년은 창에 쳐진 커튼을 걷었다. 창은 제멋대로 일그러져 있었는데 언젠가 본 다친 나비를 떠오르게 했다. 한웅큼 파 먹힌 날개 모양을 한 창에는 그와 꼭 맞는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그게 어디서 온 것인지 청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창틀에 팔을 기대고 늘어진 태양을 바라보는데 휘장이 걷혔다. 노인은 지고 온 망태기를 그림자 속에 던져두고 기지개를 폈다. 보는 사람이 시원해질 것 같은 기지개였다. 그리고 노인은 청년을 봤다.
무언가를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틈이 있는 법이어서 노인은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희미한 미소가 주름진 입가에 잠깐 스쳐갔다.

“나는 반일세, 자네는?”

“알만입니다. 우체부죠.”

반은 희미한 옛 기억을 더듬는 눈빛이 되었다.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있었지만 검게 그을린 피부는 탄력이 있었다. 50대에서 60대, 그 어느 나이를 댄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반은 천천히 그러나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편지...라도 온 것인가?”

알만은 품에서 네모반듯한 헝겊 주머니를 꺼냈다. 손바닥보다 약간 크고 두툼했다. 반은 한참동안 주머니를 살짝 흔들어 본 뒤 품속에 넣었다.

“확인하지 않으셔도 됩니까?”

“감촉과 소리로 알 수 있지.”

“그럼 이걸 풀어주시죠.”

알만은 손목을 보여주었다. 스카프가 단단히 매듭지어져 있다. 화물을 받은 수취인이 직접 잘라주어야 한다.

“일종의 확인 절차인가?”

“일종의 확인 절차죠.”

반은 스카프를 잘라 주었다. 알만은 스카프를 반에게 준 뒤, 화물에 이상이 생기면 그 스카프를 가지고 환불 같은 요청을 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떠나겠다고 말했다.

“자고 가게.”

“이미 생각했던 시간을 한참 넘겼습니다. 움직이는 사막위의 세손가락 나무 같은 건 어떤 주소록에도 나와 있지 않다구요.”

반은 크게 웃었다. 그을린 피부 아래로 잇몸까지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런 일이 없다는 듯 어색한 미소였다.

“이 소리가 들리지 않나?”

알만은 어떤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반은 구석에 있는 악기 같은 것을 가져왔다. 끝으로 갈수록 커지는 뿔 모양의 악기였다. 코끼리의 상아를 자른 듯한 그것을 알만에게 내밀었다.
알만은 가죽이 덧대어진 부분을 귀에 맞추었다. 곧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괄태충이 기어가는 것처럼 느리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파도가 치고 난 뒤 거품이 모래 속으로 흩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신기한데요. 무슨 소리죠?”

“사막이 움직이는 소리지.”

반은 창을 가리켰다. 태양은 지평선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알만은 검은 탑이 태양을 꿰뚫고 있는 걸 보았다. 반은 탑이 아니라 모래폭풍이라고 말했다. 모래폭풍은 어느 곳으로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은 채 곧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래폭풍이 움직이는 방향은 누구도 알지 못해. 하지만 사막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지. 모래폭풍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반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폭풍을 향해 전진하는 거야.”



*



소포를 전해주는 것으로 사실상 알만의 임무는 끝이 났지만 그는 좀 더 위험한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니 결심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의 일종이었다. 어떤 단어로 구체화 할 수는 없지만 모래폭풍은 알만이 예전부터 꿈꿔오던 무언가를 닮았다.
노인은 익숙한 멜로디의 휘파람을 불며 앞서 걷고 있었다. 걸머지고 있는 낡은 망태기는 촘촘히 짜여져 속이 보이지 않았다. 망태기 밖으로 금속 봉이 툭 튀어나와 있었고 사람 머리통만한 부피로 실타래가 감겨 있었다.

“도대체 사막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결하는 거죠? 당신은 그 집에서 쭉 머무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아마 자네와 비슷하지 않을까?”

알만은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는 광경을 생각해 보았다. 사막에 캐러밴이 지나다닌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생활필수품을 팔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물건을 내줄지언정 식량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노인의 집은 교통로와는 거리가 먼 곳에 있다. 캐러밴을 만나기도 힘든 것이다.
반은 슬쩍 알만의 표정을 보더니 허허, 하고 웃었다.

“난 어부라네.”

“어부요?”

“음. 물론 평범한 건 아니지. 하지만 특별한 것도 아니야.”

사막의 어부란 특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알만은 생각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짧지 않은 침묵이 계속되고 그들은 어느 모래 언덕으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탑으로 보이던 것이 이제 확실히 형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좌우로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반은 잠시 쉬자고 말했다. 그들은 언덕 위에 걸터앉은 채 물통을 주고받았다. 지평선에는 모래폭풍이 있었고 태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폭풍 근처에 닿을 때면 밤이 찾아올 것이다.
반이 문득 나이를 물었다. 알만은 스물 셋이라고 말했다.

“적당한 나이군. 무언가에 쫓기지도 않고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하는 것도 아냐. 넓게 펼쳐진 인생이 있지만 전심전력으로 쏟아부을만한 무언가는 없지.”

“무엇을 하기에 적당한 나이라는 거죠?”

“꿈 찾기.”

꿈, 하고 알만은 반문했다. 그는 모래를 집어 다른 손으로 옮기고 다시 옮기는 걸 반복했다. 꿈이라면 이루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꿈이란 건 어쩌면 적당한 단어가 아닐지도 몰라. 무척이나 추상적이거든. 거기에는 상실의 고통이라던가, 슬픔이 없어. 오직 화려한 이상과 행복함만이 있을 뿐이지.”

반은 알만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마치 코끼리 무덤 같은 거야. 많은 사람들은 코끼리 무덤에 가길 원해. 평생을 코끼리 무덤을 찾기 위해 바치는 사람들도 있다구.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있어?”

“글쎄요. 주소가 없는 곳을 찾아간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설령 사막을 떠돌아다니더라도 확실한 주소가 있죠. 만약 코끼리 무덤에도 주소가 있다면 한 번 가볼지도 모르죠.”

“물론 주소 따위는 없어. 그리고 그래서 더 막막하고 비참해지는 거야. 어떠한 자그마한 실마리라도 있다면 희망을 가지겠지. 하지만 그런 것도 없어. 오직 거짓된 희망과 뜬 소문들 뿐야.”

“잘 아시는데요?”

“물론. 내가 그랬으니까.”

반은 목이 타는 지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어디선가 새 소리가 들렸지만 푸른 하늘 어디에서도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꿈을 찾는다는 건 그런 거야. 이제 그만 일어나지.”

반은 일어나서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알만은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문득 사막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반을 생각해 보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알만은 반이 사막에 불어 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어나기 직전 알만은 찾았냐고 물었다. 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게 무덤인지 꿈인지 알만은 알 수 없었다.



*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참이 늦어버린 뒤다.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린 알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모래폭풍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했고, 그것을 견디기에 자신은 너무 나약하다. 알만은 폭풍에 휩쓸리기 직전을 생각했다.
알만과 반은 두 시간 정도를 더 걸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샛별이 붉게 타올랐다. 그러나 모래폭풍은 건재해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세졌다. 폭풍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가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방향을 짐작할 수 없는 바람이었다. 바람은 굉음을 동반하였고 알만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폭풍을 코앞에 두고 반은 망태기를 내렸다. 그리고 실타래를 꺼냈다. 실타래의 끝을 망태 끝에 단단히 묶고 망태를 던졌다. 망태는 바람에 몇 번 나부끼더니 휙 치솟았다. 그리고 폭풍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굉음에 묻힌 지 오래였다. 다만 반이 말한 것과 그의 행동을 종합해 볼 때 낚시를 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과연 망태가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자 반은 막대를 가로로 잡고 조종하기 시작했다. 미끼라도 물라는 듯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서있던 폭풍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멍하니 반의 손놀림을 보고 있던 알만이 그걸 깨달은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폭풍은 그들을 삼킬 듯 접근해 있었고 도망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알만은 폭풍 속으로 휩쓸리기 직전까지도 반이 미소 짓고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것은 이미 수없이 폭풍을 경험한 베테랑의 여유였을까? 혹은 죽음을 예감한 마지막 미소?
결코 여유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웅크린 몸을 난자하는 모래바람은 맞을 때마다 망치의 둔중함과 채찍의 날카로움이 함께 느껴졌다. 두꺼운 옷을 입지 않았던들 지금까지 버틸 수도 없으리라. 그러나 고통보다도 참을 수 없었던 건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이었다. 모래는 미처 가리지 못한 옷의 미세한 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온몸을 잠식했다.
한 시간 아니 두 시간? 알만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가리는 팔은 고통으로 마비 된지 오래였다. 힘을 빼고 폭풍에 몸을 맡기려는 찰나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반의 집에서 들었던 소리였다. 악기를 통해 들었던 소리. 굉음 사이에서 또렷이 들리는 모래 소리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잠시 동안 소리에 넋을 빼앗기고 난 뒤 알만은 이제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모래 폭풍이 물러간 걸 깨달았다.
온 몸의 힘이 쭉 빠져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는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모래위로 쓰러졌다. 굉음은 여전했지만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문득 반의 말이 떠올랐다. 사막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다. 설사 모래폭풍을 향해 전진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도 만나는 건 마찬가지다. 어차피 만날 거면 빨리 만나는 게 좋다는 뜻이었다.
굉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바람이 멎자 알만은 자신이 사막의 밤하늘 아래 누워있다는 걸 실감했다. 떨어질 것 같은 별들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같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어떤 표식으로 보였다.

“살아 있나, 젊은 친구?”

“아마도. 얼마나 지난거죠.”

“글쎄, 칠분 정도.”

고작 칠분이라, 알만은 피식 웃었다. 반은 알만의 상체를 일으켜 주며 물통을 입가에 대주었다. 텁텁한 모래를 한차례 헹구고 그는 맛있게 물을 마셨다.

“어때 일어날 수 있겠어? 이제 거의 다 왔다구.”

알만은 반의 어깨에 의지해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사막은 언제 모래폭풍이 있었냐는 듯 조용했다. 알만은 희미한 선이 모래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건 풀린 실타래였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실을 따라갔다. 반이 감던 실타래가 원래 크기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멈춰 섰다. 알만은 꿈쩍 않고 자리에 서 있었고, 반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마침내 그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소리 질렀다.
알만은 반의 어깨 너머로 빛나고 있는 그것을 보았다. 그건 모래였다. 은빛으로 빛나는 모래.

“꿈 모래야 이건.”

두 손으로 퍼 올리자 끝이었다. 실수로 흘린 별빛 한 방울 같았다. 잃어버린 꿈을 되찾는 데 이것만큼 좋은 게 없다고 반은 말했다.

“나는 이 꿈모래를 낚는 거야.”

“폭풍 속에서요?”

“음. 폭풍은 모래에 깃든 모든 기억, 환상을 한데 모으고 뒤섞어 버리거든. 방향을 잃은 꿈들은 모래에 붙어 꿈모래가 되는 거지.”

어쩐지 동화를 듣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만은 꿈모래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알만은 자리에 누웠다. 피로가 온 몸을 엄습했다. 하늘 가득한 별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별똥별이 우주를 가로질렀다. 그는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 꾸었던 어떤 꿈. 그러나 기억해 내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희미해져 갈 뿐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이 환해졌다.

“여기에 꿈모래를 올려놓으면 잃어버린 꿈을 찾을 수 있어.”

심하게 일그러지고 웅웅거리는 음성이었다. 그리고 알만은 잠에 빠져 들었다. 반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



그는 밀림 속을 걷고 있었다. 모든 게 낯설고 이상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 조차도. 어디선가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너의 꿈이 거기에 있다.”

그는 그 자신에게 말했다. 그리고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우거진 덩굴을 헤치고, 관목을 넘었다. 울음소리는 점점 더 크게 그리고 구슬프게 들려 왔다.
마침내 그는 밀림을 가로지르는 샘가에 닿았다. 샘에는 자잘한 빛의 조각들이 떠 있고, 코끼리가 있었다. 코끼리는 울고 있었다.
그 커다랗고 순한 눈망울 속에서 그는 꿈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얀 코끼리는 죽어가고 있었다.
무릎이 꺾이고 코끼리는 주저앉았다. 하지만 거기서는 코끼리가 가지는 생명의 무게를 느낄 수가 없었다. 내부의 무언가가 다 타버려서 껍질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코끼리는 긴 코를 물속에 늘어뜨리고는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울었다. 그리고 죽었다.
시간의 흐름이 갑자기 거세어졌다. 어디선가 폭풍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 익숙함에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물가로 다가갔다. 한걸음 내밀 때마다 수 십일의 시간이 사라졌다. 물가에 닿았을 때 코끼리는 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샘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거기에는 젊은 시절의 반이 있었다.
그는 코끼리의 왼쪽 상아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얼굴을 비춰 보았다. 그는 급속도로 늙어가고 있었다. 주름이 파이고, 검버섯이 생겼다. 눈동자가 죽음의 기운으로 물들어 가자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시간의 흐름은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상아가 악기로 변해 있다는 걸 알았다. 가죽이 덧대어진 부분에 입을 대고 힘차게 불었다.
소리는 밀림을 관통하고 세계를 진동시켰다. 새들이 날아가고 어느덧 밀림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알만은 꿈에서 깨어났다.



*



“운이 좋았어, 자네.”

낯익은 음성이었다. 하늘을 향해 말려 올라간 멋들어진 콧수염은 캐러밴의 우두머리가 분명했다.
알만은 멍한 눈으로 막사의 천장을 올려보았다. 기억은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어서 어떤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럴 때에는 스스로 떠오를 때까지 가만히 놔두는 것이 가장 좋다.
콧수염은 그가 사막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걸 기적적으로 발견했다고 말해주었다.

“그 표식이 아니었으면 지나칠 뻔했어. 하지만 그런 빨간 스카프는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띈다구.”

알만은 자신의 손목에 단단히 묶여 있는 스카프를 보았다. 미간에 느껴졌던 서늘한 감촉과 모래 폭풍의 굉음, 코끼리의 울음소리 따위가 무차별적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콧수염에게 고맙다고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누워있으라는 걸 정중히 사양하고 그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캐러밴의 막사들 사이를 천천히 빠져나갔다. 이윽고 드넓은 모래만이 보였다. 저 멀리 희미한 그림자 같은 것이 있었다. 
알만은 그림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건 표식이었다.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은 막대기가 갈 곳을 잃은 듯이 꽂혀 있다. 그리고 막대기에는 머리뼈가 걸려 있다. 알만은 밋밋한 뼈의 미간을 살짝 만져보았다. 그것은 더 이상 낙타의 머리뼈에 지나지 않았다.
정오의 태양에 뒷목이 따끔거렸다. 알만은 꿈에 대해 생각했고, 미소 지었다. 그는 품속에서 의뢰받은 무언가를 꺼냈다. 네모반듯한 주머니. 그는 망설이지 않고 주머니를 열었다. 그리고 손에 쏟았다.
서늘한 감촉과 함께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꿈모래는 사각거리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동안 바라보고 있는데 바람 한줄기가 불어왔다. 긴, 상쾌한 바람이었다. 손을 떠난 꿈모래는 바람을 타고 반짝이는 궤적을 그리다가 이내 흩어졌다.
알만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빛바랜 흰색 뼈에는 붉은 스카프만이 남아 바람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언제까지고 흔들릴 것이다.



-END-



이것도 발굴... 기분좋은 날입니다.

팔년전 글... 이때의 나는 상징 속에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상징을 좀 버린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좀더 원초적인 걸로 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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