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경시청은 이 괴이한 사건에 대해 시종일관 일급 보안 등급을 유지하였다. 해당 사건에 대해, 미국의 옛 B급 영화 제목을 본 딴 ‘글렌 혹은 글렌다’라는 이름이 붙여진 사건 파일이 존재한다는 것만이 르몽드지(紙)를 통해 알려졌을 뿐이었다. 사건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알려진 글렌(가명) 씨는 엄중한 경호 속에 발드그라스 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샤르코지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프랑스 고위층을 치료했던 르 발드그라스(Le Val de Grâce) 병원응급실에 의식을 잃은 환자가 앰뷸런스에 실려 도착했다. 이송 직후 ‘글렌’이라 이름 붙여진 환자는 삼엄한 경비로 둘러싸인 병실에서 의식을 회복해갔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생트 쥬느비에브(Sainte Genevieve)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해졌다. 혁명과 전쟁의 시기를 견뎌낸 오래된 건물의 격조 깊음을 새삼 느끼며 쟈크 경감은 잠시 심문을 멈췄다. 식물인간 상태를 갓 벗어난 환자의 상태를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심문은 어려웠다. 경감은 들고 있던 에스프레소를 마저 마셨다. 병실로 들어갈 땐 뜨거웠던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으레 그렇듯 이번에도 그의 커피 주문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반 쯤 남은 커피를 두 모금으로 넘겨 삼킨 경감은, 환자의 입가로 줄줄 흐르는 침을 거즈로 닦아내었다.

 

입국 당시의 여권 사진과 달리 보기 흉할 정도로 비쩍 말라 ‘미라’처럼 변해버린 환자는 눈 깜빡거림으로 ‘Merci’라고 말했다. 환자의 머리맡에 고정된 모니터에는 환자의 동공 움직임을 캐치하여 문장으로 번역해주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천재’로 불릴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던 인물답게 눈 깜빡거림을 통해 대화하는 법을 익히는 것도 남들보다 빨랐다.

 

병원의 의료진과 경시청 간부들 사이에서 ‘글렌’으로 불리는 이 남자는, 한때 유명한 의학박사였었다. 체세포복제의 전문가로, 인간복제를 시도하여 도덕성 논란을 일으켜 세계적인 지탄을 받은 후 잠적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미소녀에 가까울 정도로 잘 생겼던 인물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아도니스’가 그의 별명이기도 하였다. 조각처럼 잘생긴 미남의사 아도니스, 어떤 각도에서는 도도한 미남배우 ‘알랑 드롱’이었고 어떤 조명에서는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의 요염함마저 연상시켰다. 그런 그에게는 국적과 성별을 불문한 열광적인 팬클럽이 생겨났다.

 

몇 해 전, 그가 인간복제를 시도하겠다고 하자 종교계의 지탄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도니스의 실험을 위해 자신의 난소를 사용하라며 자원해서 수술대 위에 눕는 여성 팬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녀들에겐 인간복제에 대한 도덕적 고민이나 의학적인 지식은 없었다. 그녀들이 내건 조건은 하나였다. 난소는 자기들 것을 사용하되 정소는 닥터 아도니스의 것을 사용하라는 것 그뿐이었다. 그녀들에겐 자신의 신체 일부에 아도니스의 메스가 닿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도니스는 그런 그녀들의 열광적인 성원을 뒤로하고 어디론가 잠적하였다. 의학계에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아도니스의 인간복제는 난소(卵巢)가 필요 없는, 정소(精巢)만으로 가능한 것이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쟈크 경감도 익히 알고 있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미남의사 ‘아도니스’가, 미라처럼 바짝 말라비틀어진,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 있는 비참한 상태로 발견되어 발드그라스 군병원으로 긴급 이송된 뒤 지금 이 집중치료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이다. 닥터 아도니스, 아니 ‘글렌’은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경감이 거즈로 입에서 턱으로, 턱에서 침대 시트로 흘러내리는 침물을 닦아내고, 그 침물을 닦아낸 거즈를 쓰레기통에 버리자 모니터 화면에 하나씩 글자가 새겨진다. “ne jetez pas. elle en a besoin. (버리지 마시오. 그녀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눈 움직임만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 그리고 프랑스어가 아닌 언어를 자동번역기로 번역하는 것은 매끄럽게 진행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사람 다루는 일에 능숙한 쟈크 경감은 글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 챌 수 있었다. 간호사를 불러 타액을 닦은 거즈를 별도 보관할 수 있는 유리병을 가져오게 했다.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쟈크에게 갖다 주었다가 사람 말을 똑바로 알아듣지 못한다고 차가운 면박을 받았던 간호사가 쟈크 경감을 흘낏 쳐다본 뒤 거즈를 정리한다. 간호사가 허리를 굽혀 거즈를 주워 유리병에 담아놓고 병실 밖으로 나간 뒤 쟈크는 번역기의 언어 설정을 ‘영어’로 바꿨다. 아무래도 영어가 이 환자에게 더 편한 언어일 것이다. ‘글렌’의 모국어도 생각해보았으나 그건 쟈크 경감이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언어였다. 타액을 모을 수 있도록 해줘서인지 언어설정을 바꿔줘서인지 모니터 화면에는 ‘Thank You’가 뜬다. 경감은 기초회화 교재에서 본 대로 ‘You're Welcome’이라고 답한 뒤 ‘Tell me about her’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녀 또는 ‘글렌다’로 부르는 그 ‘괴물’에 대해 말할 시간이 이제 된 것이다. 글렌이 눈을 깜빡이고 모니터 화면 속에 새로운 글자들이 나타났다.

 

‘글렌’이 동공을 움직여 이송 당시 자신이 입고 있었던 옷 속에 있던 사진을 보여 달라고 말한다. 발견 당시 글렌이 입고 있던 얇은 쟈켓의 안주머니에서 두 장의 사진이 발견되었었다. 한 장은 남자애, 나머지 한 장은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여자애 사진이었다.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은 남자애와 여자애 사진 둘을 나란히 꺼내들고 누구 사진이냐고 물어보니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쟈크 경감이 사진 하나씩 들고 물어보지만 글렌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글렌은 간호사를 불러 보관 중이던 앨범과 파일을 가져와달라고 하였다. 제법 두꺼운 앨범 속에서도 소년과 소녀의 사진이 나란히 이어진다. 소년이 어엿한 청년이 될 무렵부터 소녀의 사진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경감은 대수롭지 않게 다음 장을 넘겨본다. 그렇게 몇 페이지를 넘기다보니 흰머리가 시작되고 눈가에 주름이 들어가는 중년의 박사와 전 유럽의 남정네를 유혹할 수 있을만한 미모를 가진 아리따운 여인의 사진이 끼워져 있다. 앞에서 봤던 소녀가 곱게 자라난 듯 아름다운 모습, 하지만 그 눈만큼은 사진 찍는 카메라의 앵글을 또렷이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성난 듯이.

 

앨범의 중간부터는 남자의 사진이 없다. 여자의 사진만이 이어졌다. 아이 때부터 성장하는 과정이 촬영된 사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갓 성년이 되었다 싶을 정도의 단계에서 급격히 그 수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 어느 날부터 앨범에 끼워진 여인의 사진은 끝이 나있었다. 앨범의 마지막 장에 꽂혀진, 둔기로 얻어맞았는지 뒤통수에 피를 흘리면서 엎드려 있는 중년남자의 사진에 쟈크 경감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상의를 벗고 있고 바지춤이 반쯤 내려간 남자의 엉덩이 뼈 부근에는 흡혈귀에게 피라도 빨린 듯 뻐끔한 상처가 여럿 나있었다. 마지막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본 쟈크 경감이 침대 위에 글렌의 환자복을 들쳐 엉덩이 뼈 부근을 확인했다. 지난 날 무리하게 골수(骨髓)를 채취한 흔적이었다. 쟈크는, 글렌의 환자복을 정리해준 뒤 간이 의자를 들고 와서는 침대 곁에 바짝 붙어 앉아 환자가 잘 들릴 수 있게 귀에 바짝 대고 말했다.

"Tell me about You."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글렌’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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