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페이지터너 - 2

2012.07.15 01:17

DaishiRomance 조회 수:2496

<<등장인물 추가>>


조한성 : 28세. 청담동 클럽 DJ. 대형연예기획사 헌팅 매니저.


백은정 : 20세. 예슬의 오랜 친구. 서울 삼청동 고급 한정식집 대표의 딸.



영훈과 현정이 예슬을 찾고 있는 같은 시각, 예슬은 청담동의 한 클럽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자녀의 이미지메이킹에만 관심이 있을 뿐 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던 영훈과 현정은 딸이 언제부터 클럽을 드나들었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예슬은 이미 고교시절부터 노는 오빠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면서 연예기획사로부터 많은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부모의 완강한 반대로 연예인이 될 기회는 얻지 못했다. 한번은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갔다가 현정에게 들켜 한달간 외출을 못한 적도 있었다. 가출하겠다는 각오로 참석한 오디션이었지만 이미 문화계 거물인 예슬의 부모는 방송국에 압력을 넣어 예슬의 출연분을 방송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것이다. 아마 예슬이 삐뚤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예슬의 일탈은 부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일탈이었지만 생각보다 치밀했다. 고교시절부터 학교에서는 착실한 모습을 보이며 선생님들의 눈을 피했고 학교가 마치면 비슷한 부유층의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이때 예슬은 처음 클럽문화를 접했다. 클럽 DJ이자 지금 남자친구인 한성과 길거리에서 만난 뒤 가까워지며 지금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한성은 한때 아이돌그룹 멤버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기획사 헌팅매니저와 클럽 DJ를 겸하고 있다. 예슬과는 2년전 길거리 캐스팅 중 만나게 됐다. 헌팅매니저인 한성은 친구들과 번화가를 걷던 예슬에게 명함을 건네고 "연예인으로 키워주겠다"는 흔한 제의를 건넸고 몇 차례 연락을 주고 받던 둘은 비즈니스 관계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빠지며 연인사이로 발전하게 됐다.




"예슬아. 안 들어가?"




춤을 추다 잠시 쉬며 맥주를 마시던 예슬에게 친구 은정이 말을 걸었다. 아직 클럽의 분위기는 한창이었지만 남자친구 한성을 만나기 위해 일찍부터 클럽에 도착한 예슬과 은정 일행에게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것이다. 하지만 예슬은 일찍 들어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벌써 클럽에 도착한지 4시간이 넘었다. 예슬은 무언가를 토해내듯 스테이지를 달구며 열정적으로 춤을 췄다. 실내적정온도를 유지한 클럽 내부였지만 많은 사람들의 열기로 상당히 더운 편이었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예슬의 가녀린 목덜미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왜? 힘들어?"




4시간 넘게 춤추며 즐긴 예슬은 마치 화창한 날 테니스경기를 펼친 미모의 테니스선수 같았다. 맥주병이 마치 남성기처럼 예슬의 가녀린 분홍빛 입술로 삽입됐고 그 틈을 비집고 남자의 정액처럼 맥주 한 방울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왔다. 차가운 맥주 한 방울은 땀에 젖어 매끈거리는 예슬의 목덜미를 타고 내려나와 깊게 패인 가슴골 사이로 다이빙한다. 아마 어떤 남성이라도 차라리 그 맥주 한 방울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예슬은 유독 클럽에 갈 때 검은 원피스를 즐겨입는다.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누구나 주목받기를 원하는 클럽일테지만 마치 그녀의 옷은 주목받기를 거부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런 의도와는 다르게 예슬은 지금 어느 남성이라도 한 번쯤 쳐다보고 작업을 걸만한 모습을 하고 있다. 땀에 젖은 그녀의 긴 머리칼은 샤워를 갓 마치고 타올을 두른채 나온 여자친구처럼 상상력을 자극하게 한다. 그렇게 상상력의 공간인 검은 미니원피스를 지나 나타나는 허벅지와 종아리는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선과 색채를 띄고 있다. 여기에 모든 것이 귀찮은 듯 춤추며 타락해있는 그녀의 아우라는 왕가위의 어느 영화처럼 우울하지만 매력적인 군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힘들면 가자... 나 오늘 너네 집에서 재워줘"


"집에 안 가? 나 이제 니네 엄마 눈치 보인단말야"


"눈치는 개뿔... 엄마한테 전화오면 사실대로 말해. 내가 집에 가기 싫어한다고"


"응...알았어"


"있어봐 오빠한테 간다 인사하고 올게"




예슬도 어느 정도 지친 기색이 있는지 나가기로 결정했다. 예슬의 친구 은정은 고교시절부터 예슬과 함께 다녔다. 보통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일진과 빵셔틀의 관계를 떠올리기 쉽지만 두 사람이 가진 부의 수준이나 반에서 인지도로 볼 때 그런 조합은 아니다. 은정의 집안은 정재계 인사들만 즐겨찾는다던 삼청동의 고급 한정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은정의 집안이 예슬이네보다 더 큰 부를 축적하고 있으며 반 친구들 역시 은정의 말이라면 따르는 편이었지만 은정은 오히려 예슬에게 스스로 '빵셔틀'과 같은 위치를 자처하며 친구가 되길 원했다.

예슬은 한때 은정을 상당히 괴롭혔다. 친구고 뭐고 귀찮던 시절에 친구하자며 다가오는 은정이 고맙고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그 쑥스러움을 괴롭힘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어느 정도 의지하는 친구가 됐다. 특히 같은 예고를 다닌 은정은 예슬이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 성악공부를 하길 원했지만 뚱뚱한 몸매탓에 호흡이 원활하지 않아 힘들어했다. 그런 은정이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예슬이다. 그 덕에 은정도 예슬 못지 않은 핫바디를 가지게 돼 지금은 '클럽친구'로 어울려 지내게 됐다.




"오빠, 우리 갈게"


"벌써 가게? 나 좀 있음 끝나는데..."


"됐어. 은정이 피곤하대. 나 은정이 집에서 잘거야"


"히잉~ 나 끝나고 너랑 놀려고 준비 많이 해놨는데..."


"그냥 여기 애들 하나 꼬셔서 데리고 가"


"그게 지 남자친구한테 할 소리냐?"


"누굴 바보로 알어? 하룻밤 노는 거 가지고 아무 말 안 할테니깐 적당히 데리고 노세요"




예슬은 빈정거리듯 한성에게 이야기했다.


예슬은 한성이 자신을 위해 고급호텔 디럭스룸을 예약해둔 것을 알고 있다. 또 그 호텔방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여성과 밤을 보낸 것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예슬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눈치다. 평소 예슬의 놀이문화와 태도를 본 사람은 믿기 힘든 이야기일테지만 예슬은 아직 남자와 밤을 보낸 적이 없다. 섹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단 의도한 타락을 결심한 예슬에게 순결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마지막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한성은 호시탐탐 예슬과 하룻밤 보내길 원했고 그 때문에 매번 고급 호텔을 예약하지만 항상 다른 여자와 호텔에 들어가게 된다.




클럽에서 나온 예슬과 은정은 대리운전에게 전화를 한 뒤 은정의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은정은 성악과 진학을 꿈꿨지만 실패했고 재수를 하는 대신 홍대 근처에 라이브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평소 외동딸을 끔찍하게 예뻐한 은정의 아버지가 대학에 떨어진 은정을 위한 배려로 가게를 차려줬다. 이곳에서 은정은 많은 인디뮤지션들과 친분을 맺으며 예슬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주차장으로 향하던 짧은 골목길에서 예슬은 한 남자와 마주하게 됐다. 이 남자는 술에 취한 중년여성을 부축해가며 은정의 차가 주차된 곳으로 함께 가고 있었다.




"누님, 대리 부를게요"


"부르지마아~ 오늘 우리 민이랑 같이 있고 싶은데~"


"아이, 이 누님이 왜 이러실까? 나 일해야 돼요"


"누님이라고 부르지 마. 그냥 '숙자야~'라고 부르라니깐..."


"에헤이~ 참... 들어가세요. 내일 큰 아들 면접이시라면서~"


"큰 아들 자식 얘기 꺼내지도 마... 엄마가 지를 위해 얼마나 열심인데 그걸 몰라주고!"


"그러니깐~ 어서 들어가서 궁디라도 맴매 해줘야지? 응?"


"그냥 우리 민이가 내 궁디 맴매 해주면 안돼?"


"다음에 해줄게요... 다음에"




예슬은 엄마와 막내아들뻘 되는 두 사람의 대화에 구토가 쏠릴 정도로 역겨움과 민망함을 느꼈다. 하지만 예슬은 끝까지 그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근처 호스트빠에서 일하는 남자로 보이는 저 젊은 남자를 쳐다보는 듯 했다. 가식적인 웃음과 의도적인 넉살이 풍기는 대화로 중년여성을 주도하고 있었지만 쌍꺼풀 없는 큰 눈은 공허하고 슬퍼보이기까지 했다. 훤칠한 키를 가졌지만 마치 순정만화에서 본 듯한 가녀린 몸은 뚱뚱한 중년여성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약해보였다.




"예슬아, 뭐해? 안 타?"




은정이 차에 가서 예슬을 불렀지만 아주 잠시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남자가 자신의 옆을 지날때 보여진 그 슬픈 미소는 예슬의 가슴을 깊게 후벼팠다. 특히 큰 눈 만큼이나 매력적인 오똑한 콧날은 숨이 멎을 정도로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1초 정도, 그 남자가 바로 옆을 지나던 예슬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예슬은 그 순간이 10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어느 여가수는 10분이면 이성을 꼬실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이미 이 남자는 10분 같은 1초 동안 예슬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의도적 타락을 누리며 반항과 분노를 그 안에 담았던 예슬에게 이 남자는 완벽한 타락이었다. 마치 예슬을 쾌락의 지옥으로 인도할 매력적인 사자(死者)와 같은 눈빛이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53 그녀를 꼬시기 위한 노랫말 1 [1] 라인하르트백작 2012.08.14 1402
252 [소설] 신의 대화 SCV™ 2012.08.09 1650
251 [소설, 19禁] 페이지터너 - 7 [1] DaishiRomance 2012.08.02 10422
250 [소설] 페이지터너 - 6 [17] DaishiRomance 2012.07.19 3298
249 [소설, 19禁] 페이지터너 - 5 [1] DaishiRomance 2012.07.15 45949
248 [소설, 19禁] 페이지터너 - 4 [1] DaishiRomance 2012.07.15 46331
247 [소설] 페이지터너 - 3 [1] DaishiRomance 2012.07.15 3890
» [소설] 페이지터너 - 2 DaishiRomance 2012.07.15 2496
245 [소설] 페이지터너 - 1 [10] DaishiRomance 2012.07.15 3613
244 [엽문] 닥터 글렌 혹은 글렌다 (3) [1] 블루재즈 2012.07.11 1391
243 [엽문] 닥터 글렌 혹은 글렌다 (2) [1] 블루재즈 2012.07.11 1494
242 [엽문] 닥터 글렌 혹은 글렌다 (1) [1] 블루재즈 2012.07.11 1638
241 [만화] 프로메테우스 (featuring 고양이) [2] [15] 시소타기 2012.07.09 2463
240 [엽문] 그 어느 해 여름의 88 문방구 [11] 블루재즈 2012.07.08 2359
239 [엽문] 블레이드 커터 살인사건 [1] 블루재즈 2012.07.07 1727
238 [엽문] 화가 도리스의 눈물 [25] 블루재즈 2012.07.04 2427
237 [엽문] 늙지 않는 자의 슬픔 [1] 블루재즈 2012.06.27 1780
236 [엽문] 뱀파이어 뫼르쏘와의 인터뷰 [1] 블루재즈 2012.06.16 1843
235 [소설] 하비성 삼국지 5 관우와 두씨 [1] 블루재즈 2012.06.15 1977
234 [소설] 하비성 삼국지 4 손권의 옥새 [1] 블루재즈 2012.06.15 179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