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페이지터너 - 3

2012.07.15 01:18

DaishiRomance 조회 수:3890

<<등장인물 추가>>


이미자 : 45세. 현정의 여중시절 동창. 신흥저축은행 대표의 아내. 세 친구들 사이에서 물주 역할.


김혜숙 : 45세. 여중시절 현정의 같은 동네 친구. 대기업 계열사 사장인 전 남편과 이혼하며 위자료로 받은 안국동 빌딩에서 임대료 받으며 지내고 있음.


최현우 : 29세. 청담동 J&B 마담.

 


바하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사단조의 음울하고 비극적인 멜로디가 현정의 연습실을 가득 메우고 있다. 여름방학을 맞아 청소년들을 위한 클래식의 밤에 기획자 겸 연주자로 참여한 현정은 한달여 남은 기간 동안 거의 매일 연습실에 나와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핑계일지도 모른다. 이미 오래전부터 현정은 '불편해진' 집 대신 연습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현정에게는 업무 외적으로 만나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녀 가정의 불화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매스컴에 비춰진 모습을 생각하면 '불화'란 단어는 전혀 짐작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녀의 속사정을 모두 아는 친구들은 미자와 혜숙 둘 뿐이다. 현정과 미자, 혜숙은 30년 넘게 단짝처럼 지내고 있는 친구사이다. 좋은 순간과 좋지 않은 모습을 모두 함께 하며 보낸 친구사이로 3년전 혜숙이 이혼소송에 휘말릴때는 셋이서 함께 힘을 합친 덕에 500억대 빌딩을 위자료로 받아낼 수 있었다. 아마도 현정의 집안 사정을 아는 사람은 이들 두 명이 유일할 것이다.


그런 미자와 혜숙이 현정의 연습실로 찾아왔다. 가끔 이들은 현정의 연습실에 찾아와 아줌마 특유의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돈 많은 귀부인들이라지만 그녀들에게서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우아한 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현정아, 우리 왔어!"


"어... 왔어?"


"좀 쉬엄쉬엄해. 연주도 잘 하는 애가 뭘 그리 열심이니?"


"그렇다고 마냥 여유 부릴 수야 있니?"


"혜숙이가 커피랑 케잌 사왔어. 좀 먹으면서 쉬어"


"그럴까?"

 


현정과 미자, 혜숙은 연습실 창가에서 햇살을 받으며 커피와 사과타르트를 테이블에 펼쳐놓고 '아줌마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근데 현정아, 연습하는데 표정이 왜 그래? 요즘도 남편하고 안 좋아?"


"늘 안 좋았는데 좋을게 어딨어?"

 


여느 주부들이 모여서 한다던 흔한 '남편 뒷담화'같은 이야기였지만 현정에게는 "남편과 안 좋다"라는 이야기가 매우 진지하고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당최 좋아질 구석이 있겠니? 애시당초 안 좋았는데..."


"근데 웃긴건 말야... 대체 그이하고 왜 안 좋아졌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거야..."

 


현정은 그날 처음 의외의 대답을 했다. 사실 오래된 부부관계에서는 어디서건 불화가 쌓여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불화가 정확히 언제 어느 지점에서 시작됐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래서 부부들의 불화는 해결이 쉽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현정에게도 그런 불화가 깊게 박혀있는 것이다. 문제는 현정이나 영훈, 심지어 딸 예슬까지 모두 해결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들 가족의 감정골은 깊게 패여있었다.


현정과 친구들은 한동안 남편 뒷담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의외로 살벌한 내용들이 오고 갔지만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이들 사이에서는 여느 아줌마 셋 이상이 모여서 벌이는 수다와 같은 어떠한 견제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허물없이 수다가 이어졌다. 아마도 이들의 남편들은 어디선가 오금이 저려왔을 것이다.

 


"얘 현정아, 그럴게 아니라 오늘 한 잔 할까?"


"한 잔? 어디서?"

 


이혼 후 혼자 지내던 혜숙은 전부터 즐기던 유흥문화에 더 몰입해 아는 호스트빠 마담만 여러명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혼 후 이들의 모임은 주로 혜숙이 주도해왔다. 현정도 생전 가본 적 없던 호스트빠를 혜숙의 권유로 가본 뒤부터 어느 정도 편하게 즐기기 시작했다.

 


"청담동에 최실장이 아까 전화왔는데, 이번에 이쁜 애들 많이 왔다고 좀 놀러 오래"


"최실장이?"


"그래! 최실장이 현정이 너도 한 번 놀러오라더라"


"어머! 한 번 밖에 안 갔는데 현정이를 기억한대니?"


"그래~"


"얘, 어쨌든... 최실장네 한 번 갈래?"


"음... 그래, 그럼. 나 연습 좀 마무리하고 전화할게"

 


밤이 되자 셋은 청담동의 호스트빠에서 만났다.

 


"아이고, 누님들!! 오셨어요?"

 


유흥업에서 6년째 종사한 최실장은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로 현정의 일행들을 반겼다.

 


"최실자앙, 오늘 실한 애기들 많이 왔다며?"


"누님 두말하면 잔소리지! 오늘 애들 아주 기깔나?"


"그래도 최실장만하겠어?"


"에에이! 말도 마. 오늘 애들에 비하면 나는 원빈 옆에 이스터석상이야"


"정말? 호호호"


"어쨌든, 오늘 S급으로 잘 준비해놨으니 재밌게 놀다가고... 일단 방에 가 있어. 애들 데리고 금방 갈게"


"그래"

 


이미 VVIP 대우를 받고 있는 혜숙의 일행은 사전에 준비가 다 된 방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후 최실장이 7명의 남자들을 데리고 들어와 차례차례 소개를 했다.

 


"...이 친구는! 으아! 원빈이야, 원빈!! 생긴 것도 뭐! 아주! 어! 근데 심지어 이름도 원빈이야! 김원빈!"


"꺄하하하 본명이야?"


"어! 레알! 민증 깔까?"


"호호호호! 됐어. 빨리 소개나 마저 해봐"


"오오케이이! 다음은 우리 바의 진정한 에이쓰! 한화이글스로 치면 류현진! 기아타이거즈의 윤석민! 어벤져스의 헐크! ...그렇다고 변신은 안 해요! 자, 생긴 거 좀 봐! 강동원 닮았잖아! 길거리 나가면 강동원인줄 알고 사인 해달라고 한 애들이 백마흔서른마흔다섯명!"

 


현정은 최실장이 강동원 닮았다며 소개한 남자를 계속 쳐다봤다. 그 남자는 비교적 가식적인 미소로 현정의 일행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 유흥업소고 마찬가지지만 도우미들이 들어오면 손님들의 초이스를 받기 위해 좋은 인상을 보여야 한다. 이들의 미소는 분명 그것을 의도한 것이다. 하지만 현정의 눈에는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특히 현정이 쳐다 본 그 남자의 미소는 살아남기 위해 웃음이라는 가면을 쓴 가녀린 소년의 미소와 같았다.


현정은 그 사내의 미소에 마음이 움직인 것처럼 소개가 끝나자마자 곧장 그 남자를 지명했다. 호스트빠에 같이 놀러 오면서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는 현정의 적극적인 모습에 혜숙과 미자는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재밌어했다.


재밌기는 최실장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최실장은 호스트빠에 찾아오는 현정이 신기해보였다. 꽤 교양있고 점잖아 보이는 현정은 절대 이런 유흥업소에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유흥업소에서 오래 종사한 최실장은 그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오오! 현정누님 왠일이시래? 선지명을 다 하시고!"


"알 거 없잖아..."

 


쑥스러운듯 현정은 곧장 손가락을 내리며 잔을 들이켰다. 역시 친구들과 최실장에게는 그저 신기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지명시간이 지나고 미모의 꽃청년들과 사모님들의 대화는 이어져갔다. 혜숙은 옆에 앉은 남자의 다리 사이를 어루만지며 그의 성기를 가지고 음란한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이 남자는 이미 손님들의 이런 장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일이었다. 미자 역시 뜬금없이 앞섶을 풀어헤치고는 "누나 마사지 좀 해봐라"라는 야한 농담을 했다. 미자의 파트너도 능숙하게 미자의 가슴을 가지고 농담을 하며 야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현정의 파트너는 계속 현정의 잔에 술만 채울 뿐이었다. 남자는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다. 가끔 손님들 중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술만 마시다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자는 현정에게 깊은 외로움이 있을 것임을 단번에 눈치챘다. 그리고 이 경우에 대처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누나는 계속 술만 마시네?"


"왜, 안 돼?"


"안 될 건 없지만...나 심심하잖아. 불렀으면 같이 재밌게 놀아야지. 뭐 우울한 일 있어? 그럼 나랑 놀자. 찐하게 놀고 잊어버려"


"후... 20년 가까이 우울하던 걸 어떻게 잊어..."


"남편때문이야? 침대에서 잘 안 해줘?"


"너 임마..."


"하하하... 농담이야. 근데 누나 이렇게 마시다 진짜 취하겠다"


"이런데 다 취하러 오는거 아냐?"


"아니야..."


"그럼 뭐하러 오는데?"


"놀러, 즐기러, 스트레스 풀러!"


"풉"

 


현정은 이 남자때문에 우울한 기분이 한결 풀어졌다. 기분이 점점 풀어지기 시작하니 왠지 일탈하고 싶어졌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현정은 근래 보인 적 없는 어떤 용감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야, 너 이름 뭐냐?"


"나? 앤드류야"


"가명말고..."


"음...정승현"


"한 잔 받어, 임마"

 


기분이 나아진 현정은 이 남자, 아니 승현과 계속 잔을 주고 받았다. 미자와 혜숙이 어느 시점에서 말리려는 눈치였지만 현정에게는 둘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가득히 부풀어오른 취기와 승현의 소년같은 자상함때문에 현정의 시간은 점점 거꾸로 가는 듯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 앞에는 승현밖에 보이지 않았고 20살 시절의 풋풋한 마음과 쾌감이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햇살 따사로운 5월의 어느 일요일 오전 10시, 남자친구의 보송보송한 흰 셔츠를 입고 잠든 어느 젊은 여성처럼 따스했고 포근한 온기와 기분좋은 어떤 것이 깨끗한 셔츠의 감촉처럼 온 몸을휘감았다.

 


'드르륵'

 


마치 최면술사가 손가락을 튕겨 최면에서 깨우듯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에 현정은 잠에서 깼다. 현정은 무언가에 놀라서 주변을 살폈다. 사방이 뿌연 듯 해서 살펴보니 침대 주변을 케노피가 감싸고 있었다. 케노피를 걷어내자 밝은 톤의 앤틱풍 가구들이 벽지와 조화를 이루며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현정은 그곳이 고급호텔 스위트룸이라는 것을 알아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사각 트렁크팬티만 입은 승현이 쟁반에 무언가를 들고 침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승현의 몸은 다부진 근육질은 아니었지만 마르고 긴, 뽀얀 몸을 가지고 있었다. 흡사 여느 패션쇼에서 봤던 백인모델처럼 가늘고 여린 몸을 가지고 있었다.

 


"어? 누나 깼네"

 


승현이 가져온 것은 사기그릇에 담긴 꿀물이었다. 그제서야 현정은 자신이 숙취로 심각한 두통과 갈증을 느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현정은 급한대로 승현이 건넨 꿀물을 마시고 최소한의 갈증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때서야 또 한 번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됐다. 현정은 지금 침대에 알몸으로 이불을 덮고 잠들어있었다.

 


"내...내가 왜 이러고 있는거야?"


"어? 기억 안 나요?"

 


그리고 승현은 어제밤 현정과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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