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여름의 일이다.

 

당시 나의 취미는 오래된 문방구에 들려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추억의 장난감 로보트들을 구입하는 것이었는데 이리저리 알게 된 지인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하게 제법 많은 수의 장난감을 구하게 되었으니 그 시절 괴롭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소장 중인 그 장난감 로보트를 꺼내보며 한때나마 마음의 위안을 찾곤 했었다. 

안타까울 정도로 길눈이 어두운 탓에 혼자서는 길을 자주 잃어버리곤 했었는데 길눈이 밝은 지인들과 동행하니 길 잃어버릴 염두도 없거니와 행여나 동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이렇게 저렇게 가서 이곳 저곳 문방구를 찾아가면 찾고 있는 물건이 있을 것이다라고 지인이 친절히 알려주는 통에 추억 속의 물건들을 쉬이 찾게 되기도 하였다. 부산 교대 뒤쪽 점포정리를 앞두고 반값 세일을 했던 문방구나 동래고등학교 인근의 몇군데 문방구 등등 지인들 덕분에 둘려보게 된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다.


각박해져가는 현실을 벗어나서 지인들과 어울려 이곳저곳 돌아다녀보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그 와중에 아카데미 1/130 가리안 킷 같은 추억 속의 물건이라도 찾게 되면 그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낚시꾼이 대어를 낚아올리는 손맛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때론 지인과 어울려 문방구를 돌아다녀봐도 별 소득 없이 일정이 끝나는 경우도 있다. 버스비, 택시비, 점심 식사비를 들이고도 별 볼 일 없는 경우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문방구에 있는 장난감 중에서 가격 적당한 것이라도 한 두 개 골라잡거나 행여 정 살 것이 없으면 문방구 주인 마음이라도 상하지 않게 볼펜 한 자루, 샤프심 한 통이라도 사주고 나오곤 했었다.

 

추억 속의 장난감 수집에 대한 열풍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불기 시작하여 혹자는 책을 출판하고 혹자는 기념관을 열고 어떤 이는 TV에 출연하기도 하고 몇몇이는 아예 옥션에 좌판을 열고 고가의 프리미엄을 붙여 장난감을 팔기도 하였다. 

 

예전에 500원으로 가지고 놀던 장난감 로보트가 몇 년 새 몇 만원, 심지어 몇 십만원에 거래되기도 하는 것이 당시 모습이었으니 문방구 주인들도 슬슬 눈치를 채기 시작하여 견출지 스티커를 이용하여 장난감의 가격을 훌쩍 올리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의 일이요, 지방 어디의 큰 문방구 주인이 추억의 장난감에 값비싼 프리미엄을 붙여 파는 인터넷 쇼핑몰 업자들과 결탁하여 물건을 대량으로 공급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의 일인 것이다.

 


그해 여름, 지인과 어울려 울산 어느 곳에 있는 오래된 문방구에 들렸을 때의 일이다.

 

88 문방구... 이름에서부터 오래된 느낌이 물씬 나는 문방구를 발견하고는 문방구 진열장 앞에 모여서서 쌓여있는 장난감들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이름에서부터 '포쓰'가 느껴지더니 보기 드물 정도로 오래된 장난감들이 쌓여있다.

아카데미 1/144 비기나기나 킷을 필두로 제법 그럴싸한 장난감 로보트들이 눈에 보인다.

이마에 태극 무늬가 있던 비기나기나, 머리통이 특이했던 아이쟈크, 사막에서 활동한다는 데저트쟈크, 이름만은 멋졌던 우주검객 샤이안... 어린 시절 장난감 꽤나 만들었다면 다들 기억할만한 로보트들도 눈에 보였지만 그때 이미 내 수중에 가지고 있던 킷이라서 크게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었다.

부산에서 울산까지 올라온 고속버스 값과 울산에서 지출한 버스비, 점심값을 생각하니 이대로 그냥 물러서긴 아쉽기도 한 만큼 좀 더 귀한 킷을 찾고 싶은 마음에 진열장 구석구석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의 눈은 진열장 한 곳에 쌓여진 일제(日製) 반다이(Bandai) 플라모델(Pla-model)들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초시공요새 마크로스(Macross) 15주년 기념킷이 바로 그것이다. 리미티드 에디션, 즉 한정판매품으로 나온 킷으로 그때까지 문방구 여러 곳을 다녀보았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귀한' 킷인 것이다.

 

내 발걸음은 어느덧 문방구 안으로 향하고 있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 문방구 안에 들어가서 가격을 확인해보니 견출지에 새겨진 가격이 만만치 않다. 원래 박스에 새겨진 엔화 가격은 몇 백 엔(円)하지도 않거늘 원화 가격이 새겨진 견출지의 숫자는 오랜 세월 팔리지 않아 빛마저 바랜 종이박스 속의 물건 치고는 너무 올려놓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울산까지의 차비, 점심값을 생각해보면 자칫 부산으로 내려갈 버스비마저 마련하지 못할 형편이라 애초에 엔화 금액 자체가 꽤 나가는, 은색 맥기로 번쩍번쩍 코팅이 된 마크로스(Macross) 플라모델은 지레 포기하고 그보다는 가격이 저렴한 1/144  'Nousjadeul Ger' 하나만이라도 구입해보고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환율을 너무 높게 적용한 듯하여 어떻게 에누리라도 좀 될까 싶어서 문방구 주인 아줌마를 찾아본다.

문방구에 막 들어설 때는 주인은 보이지 않고 손님의 인기척마저 없던 조용한 곳이 어느새 꼬마 손님들로 꽉 차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여기요!'를 연방 외치는, 시끌벅적한 코흘리개 꼬마 손님들 속에 있는 것은 국민학교 5, 6학년 정도나 되었을까 싶은 꼬마 숙녀이다.

책가방을 채 벗어놓지도 못한 꼬마 숙녀는 제법 의젓하게 주인 행세를 한다.

어쩜 저렇게 차분하게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참하게 주인 역할을 하는 아이 앞에 다 큰 어른 몇이 장난감 로보트를 손에 쥐고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행여 철없이 보이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어여쁜 꼬마 숙녀의 의젓한 모습 앞에 값을 깎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견출지로 붙여진 꽤 비싼 가격을 고스란히 다 지불하고 만다. 바빠서 그런지 책가방을 등에서 내려놓지도 않은채 문방구 주인 역할을 척척 해내고 있는 꼬마 숙녀의 모습을 뒤로하고 검은 비닐 봉지 하나 가득 장난감을 구입하고는 밖으로 나온다.

 

언제 울산에 또 올라오겠냐 싶어 근처에 있는 문방구에 들어가서 진열장을 또 둘러본다.

 

이런저런 '로보트'들은 앞에 들린 문방구에서 구입했었으니만큼 이번에 눈에 띄는 것은 맥아더, 롬멜, 아이젠하워 등이 들어있는 <명장군 시리즈>나 80년대 냉전의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미그 21 피시베드> 같은 저렴한 물건들이다.

 

 

 

한참 구경하고 있노라니 텁석부리 주인 아저씨가 우리 일행에게 먼저 말을 건낸다.

 

"저 옆 문방구에 주인 아줌마 있습디까?"

 

"주인 아줌마요? 꼬마 여자애가 계산해주던데요."

 

"그 여자애, 가방 메고 있지요?"

 

"네."

 

"맞네. 맞아."

 

주인 아저씨는 우리 일행에게 오래 전의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한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여."

 

그 옆 오래된 문방구의 젊은 주인 부부에게는 국민학교 다니는 딸이 한 명 있었단다.

 

부부가 둘 다 바쁘던 어느 날 그 딸아이에게 문방구를 좀 봐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 딸아이가 주인 노릇을 하러 문방구로 들어가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우리가 문방구에 들어갔던 그날이 그 죽은 딸아이의 '기일'이었다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3 [엽편] 사냥꾼 버틀러의 마지막 박제 [2] 블루재즈 2011.09.28 1542
192 [만화] 너는 슈퍼맨 -2- [1] [2] 지명 2011.09.27 2150
191 [미완성] 野望の山 慾望の江 (등장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등 ) [1] [1] 블루재즈 2011.09.26 2620
» [엽편] 그 어느 해의 문방구 기담(奇談) [1] [1] 블루재즈 2011.09.24 2424
189 [패러디] 재키와 병헌, 하늘의 용(龍)을 보며 천하의 영웅(英雄)을 논하다. [1] [24] 블루재즈 2011.09.24 3172
188 [엽편] 가장 억울한 죽음 [2] 블루재즈 2011.09.24 1709
187 [엽편] 유비는 왜 양자를 뒀고 관우는 왜 형주로 가야만 했는가 [1] 블루재즈 2011.09.24 2581
186 [엽편] 늙은 스페이스노이드의 한탄 [25] 블루재즈 2011.09.24 2381
185 [엽편] 오사카 돈부리 기담(奇談) [1] [20] 블루재즈 2011.09.24 2660
184 [엽편] 타인의 취향(臭香) [1] 블루재즈 2011.09.24 1780
183 [엽편] 상나라 진교(陳矯)의 형벌 [23] 블루재즈 2011.09.24 2641
182 [만화] 너는 슈퍼맨 -1- (파일이 하나 빠졌었네요. 수정) [3] [3] 지명 2011.09.21 1922
181 [단편]영원의 단면 [1] 샤유 2011.09.19 1479
180 [단편] 중년이여 산화가 되어라 [26] catgotmy 2011.09.18 2862
179 [시] 정전 [9] 잔인한오후 2011.09.17 1854
178 [표지] 아직도 내가 [1] [17] EEH86 2011.09.16 2414
177 [웹툰] 나는 신데렐라 [2] [16] 지명 2011.09.08 3360
176 [만들기] 백설공주 브로치 만들기 [3] [22] 퀴리부인 2011.09.05 4195
175 [웹툰] 라디오 어덜트의 생애 [1] [17] 지명 2011.09.02 2990
174 [웹툰] 아이유의 매력 [1] [24] 지명 2011.08.25 533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