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별을 따다줘

2011.08.05 01:19

룽게 조회 수:2748

별을 따다줘.



남자는 되묻는다.

“뭐라고요?”

“별을 따다 주세요. 그럼 승낙할게요.”

남자는 여자의 말이 혼란스럽다. 명확한 거절과 극적인 승낙, 둘 중 하나를 기대 했건만 여자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 말만 되풀이 할 뿐이다. 남자는 여자의 대답이 승낙의 말을 하기가 부끄러워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녀는 결코 그렇게 말하는 법이 없다. 결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저기…… 거절하는 거라면…….”

“거절이 아니에요. 조건이 붙은 거지요. 별을 따다줘요. 아, 저기쯤에 있는 게 좋겠네.”

여자는 손을 뻗어 창을 가리킨다. 남자가 돌아본 그곳에는 궁수자리가 빛나고 있다.

남자는 한숨을 내쉰 다음 찻잔을 만지작거린다. 거절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숨겨진 의미 같은 것은 없을 경우 여기서 더 버텨봤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남자의 머리는 혼란스럽다. 거절의 경우에 대비해서 준비해둔 예의 바르고 연민을 불러 일으킬만한 멘트들은 아무 소용없다. 여자는 남자의 머릿속을 가득채운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별빛은 무심하게 반짝이고 있다.


여자는 중얼거린다.

“어떤 사랑이 오고 갔는지 알 수 없어라. 여름은 잠시 내 안에서 노래 부르다,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구나.”

퍼즐은 거의 완성되어 있다. 남은 것은 500여 조각도 되지 않는다. 1만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에서 500조각이니 거의 다된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자는 서두를 생각이 없다. 가속 항해 중에 보호캡슐 안에서 선택하는 저속두뇌활동모드를 정상으로 바꾸지 않기로 한다. 시간은 많다. 여자는 잠시 눈을 찡그리다가 아직 맞추지 않은 퍼즐조각으로 시선을 옮겨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 린더호프 성의 뒤로 펼쳐진 산자락에 맞닿은 하늘의 일부가 제자리를 찾는다.

새로운 조각을 고르려 할 때 접촉경보가 울린다. 여자는 투덜거리며 스크린을 전환한다. 퍼즐이 놓이던 자리에는 시스템의 경보 화면이 새롭게 떠오른다. 여자는 메시지를 건성으로 읽을 뻔한다. 지난 수십 년간 비슷비슷한 메시지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부분 오인된 신호였거나 불안정한 가스층으로 인해 교란된 전자기파와 같은 것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웜홀 항해중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여자는 메시지의 첫줄을 읽자마자 자신의 신경망을 츠바키의 메인 신경망에 연결시킨다. 신경망은 츠바키를 따라오고 있는 존재를 알렸다. 그것은 츠바키와 등속으로 운동하고 있지만 신호를 울린 시점부터 가속을 시작했으며 열흘 뒤 츠바키와 조우하게 될 것임을 알렸다. 여자는 츠바키의 감속 항해를 지시하려다가 곧 명령을 거두었다. 츠바키는 조우시점과 거의 같은 시기에 웜홀을 빠져나갈 것이다. 여자는 다시 퍼즐 맞추기로 돌아간다. 츠바키의 방어망을 관장하는 신경망의 감도를 올리지도 않을 것이다. 열흘은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녀가 캡슐 안에서 보낸 지난 60여일보다 짧고 츠바키 안에서 보낸 100년보다도 짧은 시간이다.


여자는 실망감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이 여자의 실망감을 알아챌 방법은 없다. 여자를 실망 시킨 것은 그녀가 빠져나온 웜홀이 그녀의 항해가 시작된 최초의 출항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귀항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출항이었기에 그녀는 귀항이 달갑지 않다. 여자는 츠바키로부터 전송받은 항적을 되짚어 본다. 주관시간으로의 100년 동안의 항적은 개미굴처럼 복잡하고 각각의 분기점에서 뻗어나가는 항로는 패턴을 규정지을 수 없을 정도로 예측이 불가능하다. 여자가 찾아낸 유일한 패턴은 ‘패턴이 없다’정도일 뿐이다. 아니 그것 말고 한 가지 더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그는 자신을 ‘세이건’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소개할 이름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음을 양해 바란다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서로를 구분할 일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당신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군요. 그러니 저를 세이건으로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여자는 잠시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세이건에게는 표정이라 불릴 만한 것을 찾아 볼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그의 얼굴인지 조차도 확신하지 못한다.

세이건은 인류와 유사한 체형을 갖고 있지만 유기체로의 격변진화을 보낸 이후의 인공인격체들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없다. 그들의 얼굴에는 눈, 코, 입이라 불리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여자는 세이건이 자신의 표정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다시는 그 이름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당신은 ‘세이건’과 비슷한 시대에 살았겠군요. 저는 세이건이 사람의 이름일 것이라고 추정만 했을 뿐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뇨, 저는 그가 죽고 난 다음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났어요. 물론 당신들 입장에서는 그 차이가 미미하게 느껴지겠지만. 적어도 그의 ‘책’이 존재하고 그것을 읽을 수 있던 시대에 살기는 했죠.”

“책이라고요?”

세이건의 얼굴(이라 부르고 싶은 부분)에서 보라색 빛이 아른거렸다. 저건 아마도 놀라움의 반응이겠군. 여자는 생각한다.

“ 네, 그가 쓴 책이 존재하던 시절이었죠. 아름다운 책이었어요. 아실것 같지만,”

여자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고대인들은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방법으로 문자를 기록한 종이를 묶어 서로 돌려보는 방법을 택했어요. 매우 불안전하고 불편한 방법이긴 했지만요.”

여자는 방안을 둘러본다. 세이건의 방을 들어서면서 그녀는 세이건이 그들 안에서도 독특한 존재임을 알아차렸다. 서로를 구분하지 않는 그들 사이에서 세이건은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을 갖고 있고, 다른 그들과는 달리 옷을 입고 있다. 옷은 여자가 온 시대에서도 고대의 옷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고풍스럽고, 그에 못지않게 불편해 보였지만 세이건에게는 그런 불편함이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 듯하다. 그는 단지 옷을 입는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을 느끼는 듯했다. 그들에게는 개인공간이란 것이 있는 걸까? 여자가 스캔한 공간 정보에 따르면 개인공간으로 불리만한 곳은 이 도시 안에서 이 방이 유일해 보인다. 세이건은 어느정도의 권력자일까? 아니, 이들에게도 권력이라는 개념이 남아있기는 할까? 세이건의 방은 빅토리아 시대의 서재처럼 꾸며져 있다. 한쪽 면은 연대와 장르가 뒤섞인 책들이 벽을 이루고 있다. 여자는 문득 그것들을 전부다 바닥에 쏟아놓고 서지 분류법에 따라 다시 정돈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자에게는 허먼 멜빌의 책과 고대 어느 공화국의 멍청한 독재자가 쓴 자서전이 같은 위치에 꽂혀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다. 저따위 책이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하긴 시간이 선택하는 과거의 유산들은 반드시 그 가치에 따라 결정되지는 않지. 그랬다면 모조품이 분명한 호두나무 테이블 앞에 플라스틱 등받이 없는 간이의자 놓고 앉아 있을 일은 없을 거야. 여자는 생각한다. 애초에 앉거나 누울 일이 없는 그들의 생활 방식을 고려 해 본다면 세이건의 방은 불필요한 물건들로만 가득 채워진 공간이다.


세이건은 자신을 고대 인류를 연구하는 학자라고 소개한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학자라는 직업이 그들의 세계에서 어떤 위치인지는 몰라도 남들이 갖지 못하는 개인공간을 불필요한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울만한 위치는 되는 것이다.

“세이건의 책을 읽으셨다니, 그보다 그가 책이란 걸 쓴 사람이었다니 놀랍군요. 저는 당신에게 제 소개를 하기 전에 적당한 이름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제가 태어난 도시 세이건 시티의 이름을 떠올렸죠. 오래전부터 도시의 이름으로 불렸기에 저는 그것이 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사람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으로 붙인 것이지요.”

세이건 시티. 여자의 머릿속에서 작은 파장이 울렸다. 그 도시가 아직도 존재 하고 있었다니.

“물론 지금은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자는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의미인가? 지금은 사라진 도시란 말인가? 아니면 너무 멀어서 가기 힘들다는 의미일까? 세이건이 여자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만한 지식과 경험이 있었다면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해줄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못하다. 그는 계속 안에서 맴돌던 질문을 꺼낸다.

“제 소개를 했으니, 이제 저는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세이건은 여자의 이름을 묻고 있다. 여자는 태어나서 모두 다섯 개의 이름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이름들마다 각자 새겨진 나이테를 떠올리며 여자는 대답한다.

“저에게는 몇 개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을 불러줄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 같으니, 제가 태어나 최초로 받은 이름을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니 저를 윤지수라고 불러주셔야 겠군요.”

세이건은 잠시 지수의 이름을 발음해 본다. 발음은 부정확했지만 그럭저럭 알아들을 만 했기에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건은 고대인류의 언어들에 능통한 편이었지만 지수가 살다온 시대는 그가 연구한 언어 역사의 한부분에만 해당하는 지점이었기에 몇몇 단어는 알아듣기 힘들거나 의미가 다른 것들이다. 둘은 때때로 영어와 불어, 독일어, 때로는 라틴어와 희랍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나눈다. 사용하는 문법과 단어들은 수백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난삽하게 흘러갔지만 지수로써는 그것만으로도 의사소통이 충분하다. 세이건은 자신들의 의사소통 체계가 음성과 문자 언어네 기반을 두고 있지 않으며 정신감응과 내적언어가 혼재된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지수의 양자두뇌와 의체에 구성된 외부 입출력 방식이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재현하기 조차 힘든 고대의 방식이라 언어를 통해서만 소통이 가능함을 설명한다. 고대언어에 정통한 세이건이 지수의 접견을 맡은 것도 그 이유다. 지수는 테이블 앞에 놓은 찻잔을 바라보며 자신의 기억들을 떠올려 본다. 이것은 무슨 차일까? 저들은 아직도 차를 마시는 행위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지 고대인류의 모습을 하고 그 습관들을 그대로 이어받은 자신을 위해 이런 불필요한 물건을 내놓은 것일까? 지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차는 미지근하다.

“향이 좋군요. 아직도 작설차가 있다니 놀랐습니다.”

세이건의 얼굴에는 분홍색 빛이 감돈다. 기쁨을 표현할 단어를 찾고 있는 듯하다.

“다행이군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습니까? 사실 저는 불안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지수는 미소를 짓는다. 그래, 내 시대의 영문학자들이 셰익스피어를 직접 마주했다면 저런 반응을 보였겠지.

세이건은 희고 긴 손가락으로 찻잔을 어루만진다. 그 역시 지수처럼 차를 한모금 마셔보고 싶은 듯 하지만 피부를 통해 호흡과 광합성을 하며 별도의 기관을 통해 양분을 흡수하는 신체에는 발성기관뿐 아니라 차를 마실만한 입이 없다. 세이건은 용기를 낸 듯 찻잔을 들어 자신의 얼굴로 가져간다. 차를 들이 마실 입이 없기에 그저 마시는 시늉 정도만 하고 다시 찻잔을 내려놓는다.

“이렇게 하는 거였군요.”

지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동료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분분 했습니다. 저는 고대인들의 입과 소화기관에 대한 자료를 보여주며 차는 소화기관을 통해서 마시는 것이지 몸에 뿌려 체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 했지요.”

“세이건씨의 주장이 맞습니다. 하지만 찻물의 온도는 지금보다 더 높아야 할 것 같습니다. 끓지 않는 정도의 온도로요.”

지수는 벽면에 꽂힌 제인 오스틴의 책들로 시선을 잠깐 돌린다. 

얘들은 그동안 대체 뭘 읽었던 거야?

지수와 세이건은 잠시 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세이건은 다도茶道에 관한 지수의 설명에 혼란스러워 하지만 그것이 곧 고대 인류가 가졌던 유한한 생명이라는 한계 속에서 서로에게 보내는 작별인사와 같은 행위였다는 설명에 이르자 자신의 연구에 실마리를 찾았음을 기뻐한다.

차와 다도로 이어진 이야기는 곧 전쟁과 기아, 학살과 같은 사라진 고대의 악습들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세이건은 조심스레 자신의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 해석들을 내놓고 지수는 답안지를 채점하는 선생님과 같이 경험과 의견으로 답한다. 세이건은 때때로 혼란스러워 하다가도 기뻐하며 지수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그들에게 아이와 같은 모습이 있다면 아마도 지금 세이건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라고 지수는 생각한다.


지수는 자신이 통과한 웜홀 항해와 비교했을 때 시간의 상대적 차가 그리 많이 나지 않았음에 놀라워한다. 그녀는 출발시점으로부터 불과 3만년이 지나 태양계 근방으로 돌아온 것이다. 츠바키 안에서의 100년 동안 그녀가 계산한 태양계와의 시간차는 그보다 더 컸다. 세이건은 그동안 발명된 초공간 항해에 관한 기술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그녀의 계산에서 오차가 일어난 부분들을 바로잡아주겠다고 말한다. 지수의 체내 시간측정장치를 기준으로 3일에 걸친 대화 끝에 세이건은 일차 접견을 마치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방을 지수의 거처로 내어주기로 한다. 그는 얼마 후 (지수의 시간기준으로는 대략 한 달 뒤였다.) 자신의 동료들인 ‘위원회’가 지수를 방문할 것임을 알린다. 지수는 거처로 자신의 우주선인 츠바키를 택했지만 세이건은 ‘손님’을 맞이하는 고대의 행위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 도움을 달라고 부탁한다.

지수는 그 조건으로 세이건의 방에 자리 잡은 서가를 정리 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 한 일은 도서관 사서였거든요. 당신의 수집품을 버리거나 훼손하는 일은 없을테니 제발 정리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안 그러면 제가 미칠 거 같거든요.”

세이건은 도서관 사서라는 말에 이전보다 더 놀라운 반응을 보이며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츠바키에서 떼어낸 지수의 인공의체를 정비하는 장비들이 세이건의 방으로 옮겨진다. 장비를 옮기는 세이건과 그의 동료 연구원들은 지수에게 장비마다 그 쓰임을 물어보고 그것들에 호기심과 열광을 보이는 통에 작업은 열흘 넘게 진행된다. 그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들어선 유네스코 학자들과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초콜렛 공장에 들어간 찰리의 어린이들과 같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지수는 ‘위원회’가 파견한 이들에게 츠바키의 초공간 항해 드라이브에 대한 구조와 정비지침을 설명한다. 이것은 기술이전의 목적은 아니다. 차라리 20세기의 건축가들에게 피라미드의 건축 공법을 실연해 보이는 일에 더 가까운 것이다.


위원회가 파견한 이들은 세이건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지수는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그들에게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지수가 그들을 구분하기 위한 목적이다.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는 지수의 개인 물품들중에서 21세기 연예인들의 화보집에 관심을 보인다. 스타벅은 이온드라이브에 관심이 많다. 그는 지수의 지식체계 안에서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타키온 드라이브를 츠바키에 장착한다. 스타벅은 세이건의 음성언어기계의 도움을 받아 지수에게 타키온 드라이브의 구조와 작동원리에 대해서 설명하지만 그것은 지수의 양자두뇌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방대한 양의 정보이다. 지수는 결국 포기한다.

“그러니까 빨간 단추를 누르면 시동이 걸리는 거죠? 멈출 때는 초록색 단추고요. 음, 이건 좀 헷갈리니까 색깔을 바꿔주세요. 시동은 초록색, 정지는 빨간색으로요.”

히포크라테스는 끈질기게 지수의 몸을 해부 할수 있도록 세이건을 통해 조른다. 지수는 그들의 정보체계로 변환된 지수의 의체 정비 매뉴얼을 제공해주는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히포크라테스는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위원회’와의 접견을 기다리며 지수는 세이건의 방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바꾸어간다. 세이건은 지수가 판형별로 정리되어 있던 서가를 서지분류법에 따라 재배치 한 것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다만 그녀가 호두나무 테이블 앞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의자를 치워 버렸을 때는 지수가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실망감을 피력한다.

지수의 시간기준으로 하루를 남겨놓고 세이건은 처음으로 지수를 도시의 전망대로 데리고 간다. 흡사 백색왜성처럼 초라하고 창백한 빛을 내뿜는 지구를 바라보던 지수는 한숨을 쉬어보려다가 세이건이 자신의 행동마다 질문을 붙인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러지 않기로 한다. 그는 늘 질문한다. 왜 이야기를 하다가 두 손을 맞부딪혀 소리를 내는 거죠? 왜 웃으며 몸을 뒤로 젖히는 건가요?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지수는 그들이 만든 인공태양에 경탄한다. 중력장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면서 오직 그들이 사는 도시 만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는 인공태양은 지수의 양자두뇌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다. 그녀가 온 시대에서 그녀의 두뇌는 경외와 미지의 존재였지만 이제 그녀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미지와 경외의 대상이다. 세상은 그녀가 이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린다. 인공태양이 떠오르자 도시는 색색으로 물들어간다. 도시의 시민들은 건물에서 나와 태양을 바라보며 빛을 흡수 하고 있다. 폭죽처럼 그들의 몸에서는 불꽃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행복의 언어를 대신 하는 것들이리라.

“그들도 이것을 보았어야 해요.”

세이건은 지수의 말에 되묻는다.

“누구 말입니까?”

“저를 이곳으로 보낸 사람들, 우리에게 후세를 부탁하고 사라진 사람들이요. 그들은 영원히 존재하는 방법을 찾아 우주를 떠돌았지만 결국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뿐이었죠. 그들은 유한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태어나면 죽는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죠. 그렇기에 그들은 불멸을 꿈꾸었어요. 결국 자신들안에서 불멸을 뽑아내어 그것을 담을 불멸의 그릇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죠. 나는 그 첫 번째 그릇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이세상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연약하고 불균형한 존재지만 당시로서는 불멸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리고 그들은 나를 보냈어요. 자신들이 혼자가 아니었음을 확인 해 달라고. 자신들이 외로운 존재가 아님을 확인 시켜달라고.”

100년전, 아니 3만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기억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했던 질문 앞에 서있다.

‘우린 왜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건가요?’

지수는 이제 그 대답을 알 것 같다.


위원회는 접견을 자신의 방에서 하자는 세이건의 요청을 거절한다. 가급적 그녀가 익숙한 환경에서 접견을 하자는 의도로 한 요청이었지만 위원회는 그녀의 사정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위원회는 모두 세 명이다. 그들은 세이건과 달리 옷을 입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고대인들의 문화에 따라 옷을 입은 세이건을 기벽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듯하다. 세이건과 달리 그들의 얼굴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고 아주 가끔 노란색 또는 파란색 불빛이 보이는 정도였다. 지수는 그들을 마음속으로 ‘휴이, 루이, 듀이’로 부르기로 했다. 지수와 위원회가 접견하는 장소는 초록색 돔 아래에서였다. 지수는 어제 처음 도시를 구경한 터라 그 장소가 도시의 어디쯤에 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다만 자신의 몸에 내장된 적외선 센서들로 그곳이 세이건의 방이 있는 건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지수가 마음속으로 휴이라 부르는 인물이 인사말을 건넸다. 그는 여전히 얼굴에 어두운 푸른빛을 띄우고 있었다. 아마도 음성 변환기로 지수와 소통하는 방식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지수, 우리들의 선조를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쁨이다.”

지수는 세이건이 급조한 언어 변환기에 의구심을 가진다. 그것은 정신언어를 음성으로 변환하는 단계까지는 훌륭한 물건이었지만 최종 도착 언어를 선택하는 기준 자체는 어쩐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하필이면 한국어로 번역하도록 한걸 보면 단지 세이건이 일찍 사라진 고대의 소수언어에 집착하는 취향이 반영되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지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다음 대답한다.

“저 역시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의미를 알고 있는 세이건 만이 답례로 고개를 숙여보려 하지만 휴이의 얼굴에 도는 푸른빛이 커지자 세이건은 곧 동작을 멈춘다.

휴이는 간결한 말투로 그녀가 발견된 경위를 설명한다. 지수의 주관시간으로 기준하자면 그들은 10여 년 전 처음으로 지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들이 발견하여 분류 해놓은 웜홀들을 통화하며 은하계를 방황하던 존재는 처음에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츠바키를 관찰하며 츠바키가 은하계 최외각을 통과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토론했다. 그러나 토론 결과 츠바키와 같은 원시적인 우주선이 다른 은하계로 초공간 이동 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하고 그 경로를 따라 추적선을 보내는 정도로만 관찰하고 있었다. 지수는 그 말에 잠시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온 것이죠?”

휴이는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얼굴에서 초록색 불빛을 내보였다. 곧 옆에 있던 듀이가 보충설명을 한다.

“아직까지 헤일로Halo를 넘어 공간이동에 성공한 선례가 없으시기 때문이시다.”

지수는 세이건에게 당장 번역어를 다른 언어로 돌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듀이가 한 말에 더 충격을 받았다.

지수의 시간만으로도 지난 100년, 절대 시간기준으로 2만년동안 그녀와 츠바키의 항해는 단 한번도 은하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지수의 양자두뇌로도 이것은 복잡하게 얽힌 초공간 루트를 넘나들면서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라고 생각 했지만 그것이 필연으로 귀결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츠바키는 초공간 항해 이론이 처음으로 정립 되었을 때 나온 실험체나 마찬가지였다. 항해도중 틈틈이 지수가 가용한 모든 양자두뇌들을 동원하여 드라이브를 개량하였음에도 매번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지수는 그것이 갈댓잎으로 만든 조각배의 한계로 생각 했지만 핵융합 추진기가 달린 배가 바다위에 떠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태평양을 횡단 할 수 없다는 소릴 듣는 것 같다.

“그럼 당신들도 아직 외은하계外銀河系를 탐사한 적이 없단 말인가요?”

루이가 변명하듯이 덧붙인다.

“헤일로 너머로 초공간터널을 뚫는 실험이 일부 성공 하시었느니라. 우리는 약간의 성과를 기대하셨는중이십니다.”

“젠장, 그 번역기 좀 다른 언어로 돌려요!”

지수는 자신의 언어 해석영역에서 계속 울리는 불합리 언어 신호 때문에 대화에 방해되자 조급함을 나타내었다. 지수가 목소리를 높인 것에 놀랐는지 세이건은 얼굴에 모든 빛이 꺼진다. 그는 황급히 번역기의 언어를 다른 고대언어들로 맞춰놓는다. 이제 번역된 대화는 독일어와 영어, 일본어, 불어와 러시아어를 넘나든다. 한 호흡의 대화 안에 몇 종의 언어가 뒤섞이긴 했지만 그편이 지수에게는 더 편하다.

“결국 우리가 외은하계로 어떠한 신호도 그동안 못 보내었단 말입니까?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접촉도 없었고요?”

휴이와 듀이가 그렇다는 의미로 짤막하게 대답한다.

“우리 은하계 내에서 다른 지성체의 탐색은요?”

“그것은 당신이 지난 시간동안 탐사한 내역과 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당신의 탐사 내역과 우리의 결과를 계속 비교 조사해 보았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지수는 태어나면서부터 입력되었던 인간적인 반응에 따른 행동을 취하고 싶어진다. 그냥 주저앉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와 단절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우리가 존재 하는 것은 고대의 인류가 우리 를 창조하고 자신들의 지식과 유산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 잃어버린 고리들 속에서 지금의 정체를 깨뜨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지수는 그것이 신체에 휴대전화와 코스모넷이 가능한 단말기를 두뇌에 장착한 채로 태어나는 신인류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선조들이 준 도구를 빠르게 사용하고 더 나은 것으로 개량해 나갈수 있지만 그것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그들 모두가 데이터송수신을 위한 프로토콜의 원리와 전파의 작용원리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지수가 이곳에 있는 동안 보아온 바에 따르면 자신의 시대에서 첨단 학문이었던 양자두뇌학도 이제는 고대 역사가들의 호사스러운 취미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그들은 유기체로 진화된 양자두뇌를 가졌지만 그것이 최초에 어떤 과정을 거쳐 개발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수는 자신이 그들에게 연결고리로도 취급 못 받을 정도로 오래된 양자두뇌임을 알고 있다. 지수와 그들 사이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초공간 통신기 사이만큼이나 간극이 넓다.

“우리는 우리안의 열망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 발생한 생명체가 아님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지요. 우리가 당신에게 전달 할 수 있는 매체로 고대어를 선택한 이상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휴이의 말에 세이건이 곧 덧붙인다. 이것은 그들 사이에서도 무례라는 개념이 있다면 정확히 그에 해당될 만한 상황일 것이다.

“당신은 마치 조물주의 창조과정을 지켜본 천사가 바티칸에 직접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수는 세이건이 고집스럽게 번역어를 한국어로 쓰고 있음을 깨닫고 인상을 찡그린다.


위원회와의 첫 번째 접견이 지수에게 안겨준 실망은 세이건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다.

지수는 그 뒤로 일주일동안 세이건의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처음 삼일동안은 지수가 출입을 막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세이건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으려한다. 사흘째 되던날 세이건은 방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그는 고대연구가 답게 방문을 노크 하려 하지만 그러면 소리가 멈출까봐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온다. 세이건은 자신의 행위가 고대인들이 말하는 ‘무례’에 해당되는 것인가 아닌가를 놓고 갈등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곧 좋은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로 한다. 그동안 지수와 함께 있으면서 세이건은 지수의 표정을 읽는 법을 배웠다. 그는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자신들과 대조해보면서 감정표현을 분류 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 분류법대로라면 지수는 지금 미소를 짓고 있다.

지수가 책장을 덮으려 하자 세이건은 자신이 배운 것 한 가지를 더 시험 해보기로 한다. 그것은 멈추지 말고 계속 하라는 의미의 손짓이다. 의미가 확실히 통했는지 지수는 덮으려던 책장을 다시 열고 계속 그것을 읽는다. 세이건은 서가에 등을 기대어 앉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낸다. 잠시 주춤거리는 자세로 서있던 세이건은 지수의 옆에 앉는다. 무릎을 굽히고 바닥에 앉아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간혹 오래된 책속의 삽화에 나오는 것처럼 의자를 놓고 테이블 앞에 앉아 본적은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제인 오스틴의 책이었다.) 하지만 지수처럼 바닥에 앉는 것은 처음이었다. 의자에 앉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동작이었다.

지수는 세이건의 어깨로 짐작되는 부분에 머리를 기댄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책창에 고정되어 있다. 그녀는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전자기 신호로 번역된 그녀의 음성이 세이건의 머릿속에서 불꽃을 만들어낸다. 세이건은 잠시 그 불꽃들을 바라본다.

지수는 말한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들어봐요.”


What lips my lips have kissed, and where, and why,

I have forgotten, and what arms have lain

Under my head till morning; but the rain

Is full of ghosts tonight, that tap and sigh

Upon the glass and listen for reply,

And in my heart there stirs a quiet pain

For unremembered lads that not again

Will turn to me at midnight with a cry.

Thus in the winter stands the lonely tree,

Nor knows what birds have vanished one by one,

Yet knows its boughs more silent than before:

I cannot say what loves have come and gone,

I only know that summer sang in me

A little while, that in me sings no more.


읽기를 멈춘 지수는 책장을 덮고 방안의 빈 공간을 바라본다. 세이건은 말한다.

“여름이라는 것…….어떤 것이었나요?”

지수는 웃는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에 저는 자격이 안 될걸요?”

지수는 세이건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의체를 받고 세상으로 나왔을 때 지구는 가을이었어요. 여름이 막 물러가던 찰나였죠. 그곳에서 처음으로 도서관 사서 일을 했고요. 그리고 짧은 봄이 끝나기 직전에 난 달로 갔어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지구로 돌아가지 못했죠. 그래서 내가 아는 것은 겨울과 봄뿐이에요. 그 점에서는 당신과 똑같죠.”

세이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것도 지수에게서 배운 버릇이리라.

“츠바키의 개조가 끝났어요. 위원회는 당신에게 질문을 할 겁니다. 우리는 선조들이 초공간 항로에 수많은 우주선들을 보냈음을 알고 있어요. 인간은 그 항해를 견딜 수 없었기에, 당신처럼 인간의 모습과 정신을 복제한 인공인격체들이 그 항해에 나서게 되었죠. 그중에서 우리와 접촉한 것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우주선이 사라졌는지, 그들 중 얼마가 우리와 다시 만날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확실하다 여기는 것은 그들 중 누구도 외은하계로 나가본 적이 없을 거라는 점입니다. 앞으로도 그것이 언제쯤 가능할지는 아직 모르고요.”

“터널은요?”

지수가 묻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 이건 고대언어식 표현이군요. 우리의 정신감응에는 그런 표현이 없어요. 이유는 아시겠죠? 네, 솔직하게 말하자면 회의적입니다. 지금까지 터널실험은 수십만번 되풀이 되었고, 아직까지 우리에게 아무런 접촉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모두 실패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번에도 다르리라는 보장은 없어요. 위원회는 사실상 포기했죠. 그들은 우리 은하계 내에서 다른 지성체를 찾느니 선조들이 우리를 만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진화가 가능한 원시 행성을 찾는 게 더 빠르지 않나 생각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 와중에 당신이 나타난 거고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지수는 의미를 알았지만 세이건의 다음 말을 기다리느라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다. 세이건은 적당한 표현을 생각 하려 고민하는 빛을 얼굴에 내고 있다.

“그건, 마치 여름방학 내내 숙제는 안하고 놀기만 하다가 개학전날 선생님이 방으로 들이 닥친 광경을 보는 학생 같은 거라고요!”

지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트린다.

세이건은 자신이 한 이야기가 부끄러운 것인지, 지수의 웃는 모습을 보고 그런 것인지 얼굴을 분홍색으로 물들인다.

“위원회가 저를 불편하게 여기나요?”

지수의 말에 세이건은 침묵을 지킨다.

그가 힘겹게 말하고 있음을 지수도 알 수 있다.

“당신은 우리가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유산입니다. 당신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당신이 우리 곁에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은하계 내에서 지성체 탐색은 무의미 합니다. 위원회가 뚫은 터널은 어떠한 약속도 못할 겁니다. 설사 헤일로 밖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보다는 당신의 연약하고 원시적인 우주선이 버틸지도 모르고요.”

지수는 고개를 뒤로 젖혀 들고 있던 소네트 모음집을 꽂아 놓고는 무릎에 팔을 두르고 턱을 괸다.

“떠나기 전에, 그들은 저에게 말했어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을 거라고. 돌아올수 없을지 모르고, 어쩌면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이 자리에 남아있는 후손들은 저를 환영하지도 않을지 모르고,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고요. 나는 아무것도 약속 받지 못하고 떠났어요. 그건 일방적인 약속일뿐이었죠. 그들은 나에게 단 한 가지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과 약속했어요.”

지수는 말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잠시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스타벅이 타키온 드라이브의 스위치 색깔을 내 말대로 바꿔 놓았는지 확인해보러 가야겠어요.”



남자는 최대한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지수씨.”

지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한다.

“제 시간이 당신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다는 건 아시죠?”

남자는 다시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다.

“가지 마세요. 저는 견딜 수 있습니다. 함께 견딜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인공인격체든 진공청소기든 상관없어요. 

사랑합니다. 당신은 그 항해에 자원하지 않아도 되요. 가지마세요. 여기서 저랑 같이 있어주세요.”

남자의 목소리는 이제 떨림을 잊고 있다. 지수는 남자의 눈을 들여다본다.

세이건 시티의 온실에서 길을 잃고 울고 있던 소년은 이제 20년이 지나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있다. 지수는 다음 20년 뒤를 상상해 본다. 복잡한 확률계산과 지난 70년간 쌓여온 경험의 데이터들이 충돌과 모순의 곡선들을 그리지만 그녀는 그 데이터들을 무시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충동은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신만의 결함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는 과거가 될 것이다.

“에이, 안되겠다. 별은 내가 따와야겠네요.”

지수는 웃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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