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TA] 정수기

2011.08.14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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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기


선애는 호종을 바라보았다. 호종은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주장하듯 아무 말 없이 집게로 고기만 뒤집고 있었다. 선애는 ‘좀 드시면서 구우세요.’라고 말하려다가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쏠릴까 봐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단지 호종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선애는 이력서에 있는 그의 주민등록번호를 보았을 때 그가 생각보다 나이를 제법 먹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서른둘이라는 나이는 그의 외모에 적당해 보였지만 그것은 나이를 알고 있을 때의 느낌이었다. 호종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외모였다.

새로 입사한 영업사원들을 처음 보았을 때 선애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호종이 아닌 영걸이었다. 훤칠한 키에 남성적인 얼굴선과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영걸을 찍어둔 여직원이 당연하게도 선애 만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에 입사한 영업사원들 중에서 영걸이 유독 인기가 좋았던 것은 그의 외모뿐 아니라 다정한 말투,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호감을 자극하는 몸에 밴 태도 때문이었다. 영업사원이 갖춰야 할 자질은 모두 갖추고 있는 덕분에 영걸은 입사한 첫 달에 지점에서 가장 높은 실적을 내었다. 처음에는 막연한 호감정도였지만 영걸이 선애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3주 전쯤부터였다. 본사의 실태관리 점검이 있어 밤늦게까지 야근하던 날, 영걸은 선애를 자신의 차로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다른 여직원들 눈치도 있어 조용히 거절했지만, 막상 전철이 끊기는 시간이 닥치자 선애는 마음이 급해졌다. 다른 여직원들은 남자친구가 바래주러 오거나 남편이 회사 앞까지 찾아왔지만 선애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별일 있겠나 하는 심정으로 영걸의 차를 타고 집까지 갔다. 내심 유혹이 들어오면 단호하게 거절할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선애는 영걸이 그녀를 집 앞에 내려놓고 쌩하니 사라져 버리는 광경을 보고 자신을 한탄했다.

- 뭘 기대한 거야?


이후 선애는 자신에게 더 친절하고 다감한 말투로 말을 건네는 영걸의 태도에 그가 혹시 숙련된 바람둥이가 아닐까 의심하며 적당히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하지만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는 법이었다. 선애는 사무실 안에서 늘 영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게 되었다. 그가 외근 나가는 코스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이동시간을 계산하며 그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여기서 그녀는 한 가지 더 신경 쓰이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직원들이 농으로 던지는 영걸에 대한 농담이나 선애가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어느 날, 선애는 사무실 안에서 영걸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그녀의 시선 안에 늘 호종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종은 특별한 일없이 영걸의 자리 뒤쪽을 어슬렁거리거나 그를 쳐다보는 일이 잦았다. 그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워 보였고 특별히 표나지 않는 행동들이었기에 어쩌면 영원히 모른 채로 지날 수도 있었지만 호종의 시선은 때때로 선애와 교차하거나 서로 맞부딪쳤다.

선애가 볼 때 호종은 특별하게 모나게 행동하거나 불쾌감을 일으키는 타입은 아니었다. 다만, 어느 조직에 속하던 존재감이 희미하고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일 뿐이었다.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지 않던 사람이 자신과 영걸을 꾸준히 관찰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선애는 당혹감을 느꼈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선애는 한 가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 나에게 마음이 있는 걸지도 몰라.


선애는 비슷한 연령대의 여직원들 사이에서 특출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호감 가는 외모였다. 그녀는 예쁘다는 소리는 자주 못 들어도 남자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큼은 된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혹시 호종이 나에게 관심이 있어서 영걸을 뒤에서 감시하는 걸까? 질투? 선애는 그런 생각을 누구에게도 입 밖으로 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쳤다는 소릴 듣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점잖지 못할 뿐 아니라 멍청한 생각이라고 여겼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어쩌면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신 호종이 자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지는 확인해 두어야 할 사항이라고 여겼다.

호종은 테이블 위의 고기를 모두 혼자 구울 생각인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선애는 호종이 가위와 집게를 양손에 잡고 그것을 놀리는 광경에 내심 감탄했다. 왼손으로 가위질을 능숙하게 하는 걸 보니 아마도 양손잡이겠지. 일정한 크기로 잘라놓은 고기들을 불판 위에 줄지어 놓고 순서를 정해 뒤집는 호종을 보며 선애는 웃음을 픽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선애씨?”

테이블 끝에 자리 잡은 지점장이 물었다.

- 신경 꺼. 새끼야.

“호종 씨요, 꼭 고깃집 주인처럼 잘 구워요.”

선애가 대답하자 일시에 테이블 주변의 시선이 호종에게 모였다. 그 순간 호종은 지점장과 영걸을 힐끗 보고는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 제법 귀엽네?

선애는 호종에게서 의외의 면을 발견한 것에 잠시 기쁨을 느꼈지만, 그것은 이내 후회로 돌변했다.

“양호종씨! 고기만 굽지 말고 이리 와서 한잔 따라봐!”

지점장의 호령에 호종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애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이미 얼굴이 불콰해진 지점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징그러운 웃음으로 옆자리의 직원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첫 회식 때 치마 속으로 들어온 지점장의 손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란 기억이 있는 선애는 늘 회식자리에서 지점장과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으려 했다. 지점장의 주사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술자리에서 몸을 더듬는다는 데 있었다. 한쪽만 더듬는 것도 문제인데 양쪽 다 그런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점장의 옆자리에 앉은 호종은 지점 내에서 가장 부실한 영업실적에 대해 잔소리를 듣다가 이내 ‘다 호종씨를 아껴서 그런 거야.’로 맺는 지점장의 설교를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니나 다를까 지점장은 호종의 볼에 입을 맞추겠다며 입술을 들이대고 있었다. 여직원들에게는 그러지 않지만, 남자직원들에게 종종 부리곤 하는 주사의 시작이었다.

- 저 개새끼가 어디다 주둥아리를 들이대?

선애는 입맛이 싹 사라진 기분이 들어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오늘 타겟은 양호종씨네. 불쌍해라.”

여직원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지영이 선애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낮에도 쥐 잡듯이 깨졌잖아요.”

선애는 최대한 동정하는 말투처럼 들리지 않게 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지영은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잡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남자는 저런 타입이 좋은 거야, 모나지 않고 동글동글한 사람.”

“그럼 언니가 해보시던가.”

선애는 소주잔을 들어 올려 탁 털어 넣었다. 그 순간 지영이 어깨를 퍽 치며 깔깔거리고 웃는 바람에 하마터면 술이 목에 걸릴 뻔했다. 선애는 잠깐 눈을 흘긴 다음 옷에 묻은 술을 닦아내기 위해 휴지를 찾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물티슈봉지였다. 선애의 오른쪽으로 두어 명 건너편에 앉아 있던 영걸이 내민 것이었다. 선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것을 받아들었다. 옆에서 지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오오, 역시 영걸 씨, 신사야 신사!”

선애는 옆에 앉은 빌어먹을 아줌마의 입에 상추 한 바구니를 통째로 쑤셔 넣고 싶었다. 테이블의 시선이 다시 자신 쪽으로 모이게 된 것이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아! 우리 영걸 씨! 멋진 영걸 씨!”

한쪽 팔을 호종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지점장이 소리를 질렀다.

-너도 제발 입 좀 닥치고 술이나 쳐드셔. 코로 마시든 똥구멍으로 마시든.

선애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물티슈 한 장을 뽑아내어 치맛자락에 묻은 소주를 닦아내었다. 다시 물티슈 봉지를 영걸에게 돌려주려 할 때 그는 이미 수저와 소주잔을 챙겨 들고 지점장 옆자리로 옮기던 참이었다.

-그래, 너라도 가서 불쌍한 호종 씨 좀 구해줘라.

그러나 선애의 바람과는 달리 지점장은 양쪽에 호종과 영걸을 앉혀 놓고는 속 좁은 여호와처럼 굴었다. 제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카인과 아벨을 양쪽에 앉혀놓고 아벨만 칭찬하는 여호와가 된 것이다. 영걸이 부장의 옆자리에 앉자 반대편에 앉은 호종은 더 처참해졌다.


선애의 회사가 취급하는 주요 품목은 정수기였다. 가정용 정수기의 임대는 별도의 회사가 담당하고 있었기에 영업사원들은 주로 법인영업과 식당 영업 쪽에 주력하고 있었다. 경쟁사도 많고, 수요도 포화상태에 이르다 보니 신규 거래처를 뚫는 일은 마음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존거래처라도 유지하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영걸과 호종이 들어오고 난 다음 신규거래처가 지점 개설 이후 최대 폭으로 올라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은 영걸이 해낸 일이었다. 호종은 기존 거래처를 말아먹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로 실적이 안 좋았다. 영업일을 처음 하는 사람들은 초기에 반짝 실적이 좋을 때가 있다. 의욕도 넘치고 주변의 지인들을 십분 활용할 만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영걸의 뛰어난 실적과 호종의 기념비적인 부진은 둘 다 신기한 점이 있었다. 2,3년 동안 스쳐 간 많은 영업사원을 보아온 선애로서는 둘 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영걸처럼 잘하기도, 호종처럼 더럽게 못 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점장은 영걸이 가진 영업적인 ‘마인드’와 그의 ‘프렌들리 파워’를 칭찬하면서 말끝마다 호종을 돌아보며 ‘그렇지 않아, 호종 씨?’, ‘어떻게 생각하나, 호종 씨?’ 라고 연방 물어대었다. 선애는 그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아 시선을 앞에 놓인 불판만 바라보고 있기로 했다. 사람 좋은 웃음만 지으며 내내 고개를 굽실거리는 호종을 보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 혹시 저 사람 강박증 같은 게 있는 걸까?

선애는 호종이 불판 위에 잘라놓은 고기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놀랍게도 고기들은 크기도 일정하게 썰려 있는데다 가만히 보면 맞춰놓은 줄이 마치 자로 그어놓은 듯 딱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꼭 아빠 같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선애는 가슴속에서 찬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맞아, 아빠랑 비슷해서 싫지 않은 건지도 몰라.


선애는 자신이 호종에게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 골치 아픈 일도 많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호종처럼 말수도 적었기에 때때로 수줍음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선애는 아버지가 수줍음이 많아서 말수가 적은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단지 할 말이 없어서 말을 안 하는 사람이었다.

선애의 아버지는 주로 해외의 공사현장에서 현장 관리와 공무를 맡아 일하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선애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그랬다. 수개월 혹은 수년 만에 집에 불쑥 나타나는 아버지는 늘 낯설었다. 선애는 간혹 아버지와 단둘이 집에 있는 날이 불편했는데 그것은 선애가 아버지를 어떻게 대할 줄 몰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늘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아버지 쪽이었다. 십 대 시절에는 그런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반항해보고 싶었지만, 그 시도는 늘 씁쓸하고 부끄러운 기억을 남기는 결과만 맺었다. 선애가 아버지와 마음을 열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어머니가 죽고 난 다음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밤 부엌에 가다가 거실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뒷모습은 그녀에게 한 가지 사실을 각인시켜주었다. 아버지는 거실에 앉아 우두커니 어머니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세상에서 가족은 나랑 아빠, 단 둘뿐이야.

그날 이후부터 선애는 일부러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면 같이 요리하거나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버지가 다시 해외 현장으로 나갈 때는 메일로 안부를 묻거나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하였다. 평범하고 사소한 일들이 모여서 추억이라는 책꽂이에 쌓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은 시간이 다하기 전에 그것을 필사적으로 채우려했다.

작년 이맘때쯤 현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더 말수가 줄어들고 우울해 보였다. 선애는 자신이 십 대였을 때는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했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걱정하며 물어본 것이다. 선애의 질문에 아버지는 오히려 놀란듯했다. 아버지는 선애에게 그 놀라움을 놀라움으로 되갚아주었다. 아버지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린 것이다.

“현장에서 사고가 있었어.”

그러고 나서 한 달 뒤 아버지는 검은 비닐봉지에든 삼겹살 두 근을 사 들고 왔다. 선애는 아버지가 고기를 썰어 불판 위에 줄 맞춰 나란히 놓는 모습에 피식거리기도 하고 그가 사온 상추가 시들었다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가장 행복했던 날이라고 기억되는 그날의 놀라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일을 그만 해야겠다고 아버지가 말한 것이다.

그 후의 반년은 꿈만 같았다. 집안에 둘뿐인 것은 여전했지만, 아버지는 전보다 더 편안하고 생기가 넘쳤다. 선애는 자신의 아버지가 유머감각이 훌륭하고 낙천적인 사람이란 것을 23년 만에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애가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부가 아니었다. 얼마 후, 그러니까 아버지가 짧은 메모 하나만 식탁 위에 놓고 사라지기 몇 달 전부터 그는 술에 찌들었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선애가 알고 있던, 아니 새롭게 발견한 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져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불 꺼진 집안, 식탁 위에 놓인 메모지에 아버지가 쓴 메모는 굳이 불을 켜고 읽지 않고 창밖의 불빛에 비춰 봐도 알아볼 만큼 짧은 문장이었다.

‘전에 공사현장이 잘못되어서 다시 가본다.’

선애는 처음으로 영걸이 꼴 보기 싫어졌다. 슬슬 길어지기 시작하는 회식자리의 1차가 정리되려 할 분위기에 영걸이 불을 붙인 것이다. 몇 마디 말로 지점장을 껄껄 웃게 한 영걸은 곧이어 폭탄주를 사람 수대로 만들었고 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선애는 잔을 받아들고 인상을 찡그렸다. 술에 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탓이었다. 그러나 흘러가는 자리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할 술이었다. 잔을 들어 올리기 전 선애는 잠시 호종과 눈이 마주쳤다. 딱히 그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시선은 아니었다. 선애는 눈을 질끈 감고 술잔을 넘겼다.

진짜 최악은 그다음부터였다.


영걸이 지점장에게 자신이 새로 뚫은 거래처가 근처에서 노래방을 하고 있으니 2차는 거기로 모시겠다는 것이었다. 회식은 늘 1차까지만 지점장과 부장이 동석해오고 있었다. 2차부터는 사원들과 대리급들만 따로 맥주를 마시러 간다던가 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짜증나는 회식자리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라고 모두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영걸의 말발이 먹혀 들은 것인지, 암묵적인 관례(지점장은 2차에 따라가지 않는다.)를 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지점장을 꼬여내는 데 성공하고 만 것이다.

선애는 들고 있던 술잔을 깨서 영걸의 목을 찌르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오늘은 여직원들과 홍대의 클럽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여직원 몇은 사전에 한 그 약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깔깔대며 영걸의 제안에 찬성했다.

-너 이 새끼, 오늘부터 나한테 찍힌 줄 알아.

핸드백을 챙기며 일어나던 선애는 술기운에 다리가 살짝 휘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호종이 어디 있나 방안을 훑어보았다. 모두 옷과 가방을 챙기느라 어수선한 자리에 호종은 어느샌가 양복 윗도리를 챙겨 입고 단추까지 다 채운 상태였다.

-동작 한번 빠르네.

선애는 술기운 때문에 영걸보다는 호종의 옆에 바싹 붙어 고깃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테이블을 거의 뛰어넘다시피 하여 미닫이문 옆에 서 있던 호종의 옆에 섰다.

“호종 씨, 내 구두.”

선애는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했다. 자칫 어리광부리는 공주같이 보일까 걱정했다. 그녀는 곧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하고 맨발로 바닥에 내려가 신발장에서 자신의 구두를 꺼내려 했다. 놀라운 일은 바로 그다음 순간에 일어났는데, 호종이 신발장에서 선애의 메리제인 구두를 정확하게 집어내어 그녀의 발밑에 놓아준 것이다. 비슷한 색깔과 디자인의 구두가 네 켤레나 더 있었는데 말이다! 선애는 순간 가슴에서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곧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일 뿐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발을 뻗었다. 잠깐이지만 신을 신느라 몸이 휘청거릴 때 그녀를 잡아주는 호종의 손이 느껴졌다.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기를.

고깃집 밖으로 나와서 선애는 입속으로 투덜거렸다. 영걸이 가깝다고 이야기한 노래방은 여기서 택시로 십분 거리였다. 열댓 명이 택시로 이동해야 한다는 소리에 직원 몇이 투덜대자 영걸은 예의 달착지근한 미소를 지으며 몇 마디 말로 그들을 달래고는 택시를 잡았다. 선애는 최대한 쭈뼛거리며 뒤차를 타기 위해 몸을 빼었다. 먼저 출발하고 남은인원이 여섯이 되자 선애는 선수를 쳐야 한다고 느꼈다.

“네 분이 다음 차타시고요, 저랑 호종 씨는 그 다음 차로 갈게요.”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비틀대던 지영을 부축하고 있는 영걸의 눈에서 잠깐 낭패의 눈빛이 스쳤다. 아니, 선애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으리라.

“위치는 아세요?”

영걸이 말했다.

“네, 알아요. 직진하다가 외환은행 사거리에서 우회전해서 맥도날드 있는 골목이잖아요. 핑클노래방 가는 거 맞죠?”

선애는 최대한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대답했다.

- 넌 그 아줌씨나 잘 챙겨.

영걸이 마지못해 대답하듯 ‘네’라고 대답했다.

선애는 웃으면서 호종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저, 저, 저 여우 같은 것! 우리 호종 씨를 어디로 꼬여내려고!”

지영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하고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제발 좀 닥쳐, 아줌마. 아, 근데 헤프게 구는 여자처럼 보이면 어쩌지?

택시가 연달아 두 대가 왔다. 선애는 얼른 호종의 팔을 끄잡아 뒤 차에 올랐다. 그녀는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한 다음, 차 문쪽에 달라붙듯이 몸을 붙여 앉았다. 그것은 호종도 마찬가지였다.

십분 거리라던 길은 30분 거리가 될 판이었다. 사거리 쪽에서 불법 유턴하던 승합차가 정면 충돌사고를 일으키면서 길이 꽉 막혀버린 것이다. 고개를 이리저리 틀어 앞을 보던 호종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많이 막히는 것 같은데 내려서 걸어갈까요?”

-이 멍청아!

선애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찍 가서 뭐 좋은 거 본다고요. 그냥 가죠? 기사님이 알아서 가시겠죠.”

호종의 시선은 계속 사고 현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택시가 사고현장 곁을 지나쳐 갈 때쯤 호종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호종은 아이폰을 꺼내 들고 문자에 답장을 쓰고 있었다. 선애가 말했다.

“어? 호종 씨. 아이폰 썼어요? 블랙베리 쓰시던 거 같더니? 근데 이 시간에 누구? 여자친구?”

호종은 질문이 많아서 어느 것에 먼저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선애를 바라보았다.

“블랙베리도 써요. 업무용으로. 밧데리가 다 떨어져서……. 그리고 여자친구 없어요.”

선애는 마지막 말에 빙긋이 웃었다.

“보여주세요.”

“네?”

“블랙베리요.”

선애가 계속 손을 내민 채로 있자 호종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몸을 틀어 양복 주머니에서 블랙베리를 꺼내어 선애에게 주었다.

“전원이 꺼져 있어요.”

호종은 중얼거렸다.

선애가 블랙베리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혼잣말을 하는 동안 (화면이 작네요, 자판은 안 불편해요? 가운데 이건 뭐에요?) 호종은 말없이 아이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가끔 불안한 눈으로 선애의 손에 들린 블랙베리를 힐끔거렸다. 호종의 대답이 없자 이내 시들해진 선애는 블랙베리를 호종의 양복 윗주머니에 꽂아주려고 몸을 그쪽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호종은 선애의 손에 들린 블랙베리를 잡아채어 윗주머니에 꽂았다. 잠시 무안해진 선애는 몸을 그대로 기울여 호종의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아, 졸려.”

-생각보다 어깨가 단단하네?

선애가 몸을 다시 바로 일으킬까 그냥 이대로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택시는 골목길을 한참 누비다가 목적지에 다다랐다.

노래방은 지옥이었다.


부장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부르는 동안 지점장은 연방 ‘도우미 안 불러? 도우미!’를 외치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하품하며 박자는 신경 안 쓰고 탬버린을 튕기고 있었다. 선애는 눈치 좋게 먼저 도망간 몇 명의 직원을 원망하며 시무룩한 얼굴로 팔짱만 끼고 있었다. 눈치 없는 지영이 옆에 낀 덕분에 구석 자리로 밀려난 호종은 노래책을 뒤적이고만 있었다.

-조용필이 이 광경을 봤어야 해.

선애는 협탁 위에 놓인 미지근한 캔맥주(인지 뭔지 알게 뭔가?)에 손을 뻗으려다가 고개를 젓고는 최대한 표시 안 나게 방을 빠져나오기 위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가기 전 잠깐 호종과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 그는 노래책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선애는 담배 한 갑을 다 피울 기세였다. 그녀는 남아 있던 세 개비의 담배를 다 피운 다음 번져버린 눈 화장을 투덜거리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선애는 하마터면 영걸과 부딪힐 뻔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잡으려고 내민 영걸의 손을 뿌리친 선애는 복도 끝 쪽에 호종이 서 있는걸 발견했다.

- 아, 싫다.

영걸이 재차 물었다.

“선애 씨, 괜찮아요?”

“괜찮아요.”

선애는 최대한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다음 걸음을 바로 하기 위해 신경 쓰며 복도를 걸어갔다. 맞은편에서는 호종이 다가오고 있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영걸의 시선이 닿아 등이 타오를 것 만 같았다. 선애는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늘 구부정하고 자신 없어 보이던 호종의 발걸음에 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감이 넘쳐흘러 보였다. 술에 취해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선애는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만 같았다.

-너도 이순간을 오래 기억해야 할 거야, 양호종.

호종이 그녀와 두 걸음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온 순간 선애는 웃으며 뭐라 하려 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제야 깨닫다니!

호종은 영걸을 보고 있었다.

마치 화난 사람처럼.

호종은 그대로 선애를 스쳐 지나 영걸에게 가고 있었다. 고개를 홱 돌린 선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이거?

“잠깐 얘기 좀 할까?”

영걸이 먼저 말했다. 호종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화장실에서 꺾어지는 복도 쪽의 빈방을 살펴보았다.

“저기, 룰라 룸”

선애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영걸이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그 달착지근한 미소였다.

호종은 노래방의 문에는 잠금장치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손끝에 힘을 주었다.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영걸이었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쇼파 등받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솔직히 놀랐어. 한 달 동안이나 얼굴을 마주하고도, 내가 낌새를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나도 오늘 오전에야 보고 받았거든? 근데 어차피 우리 둘 다 프리랜서니까 서로 긴장할 필요는 없잖아? 소문만 듣던 업계 유명인과 드디어 인사하게 되었네?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제타ζῆτα.”

호종은 영걸이 부른 이름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대신 문쪽에 기대어 설 뿐이었다. 반투명 유리창에 등이 노출되지 않도록 몸의 절반은 벽쪽으로 기대어 섰다.

“어차피 동종업계 종사자들끼리 이러지 말자고. 서로 사정도 좀 봐주고 그래야지? 엡실론ἔψιλον은 어차피 쓸모없는 노인네야. 미국? 러시아? 북조선? 바뀐 세상에 적응 못 해. 어딜 가도 그 노인네 신세는 마찬가지라고. 모두에게 버림받은 거야. 트리플 크로스 스파이는 어느 편에 붙어도 골칫덩이인 창녀 중의 창녀야. 포주 없이 멋대로 영업하는 늙은 창녀라고!”

영걸이 말을 잠시 멈추고 다음 말을 하려는 사이에 호종이 입을 열었다.

“알료샤.”

영걸은 입을 다물었다.

“엡실론은 내 아버지다.”

호종은 말을 내뱉자마자 곧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게, 내 말은…….”

영걸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럼 너랑 선애가 남매지간이라고? 와, 이거 진짜!”

“아니, 아니, 내 말은!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봐. 엡실론은 나한테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생물학적으로 진짜 아버지는 아니지만, 뭐 하여튼 그런 거 있잖아?”

“아, 그러니까 정신적인……. 뭐, 그런 거?”

“어, 뭐, 그런 거.”

그 순간 복도쪽에서 선애의 째지는 비명이 들렸다. 호종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문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문을 열자 그 소리는 비명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선애가 ‘너에게로의 초대’를 부르는 중이었다.

호종은 자신의 바보 같은 실수 때문에 머릿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문을 닫고 다시 돌아서자 영걸은 어느 샌가 그의 50cm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호종이 팔을 뻗어 영걸의 목울대를 치려는 순간 영걸이 상체를 뒤로 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잠깐! 내가 너랑 한가해서 이렇게 노닥거리는 줄 알아? 난 너한테 제안을 하고 있는 거라고. 소속된 에이전시 없으면 어느 쪽이든 대가가 괜찮은 쪽으로 움직이는 거 아냐? 얼마가 되었든 두 배 줄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내 몫의 반도 더 얹어주지. 내 짐작이 맞는다면 그것만 해도 꽤 될 텐데? 계집애 하나 잠깐 넘기는 조건으로 괜찮지 않아? 우린 신사들이잖아? 혹시 그 여자애 걱정하는 거라면 접어둬. 우린 잠깐 엡실론과 이야기만 하면 돼. 너나 나나 엡실론을 움직이게 하려면 그 애가 필요하잖아?”

호종은 팔을 거둔 다음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너한테 나쁘지 않은 조건이야. 지금 상황을 보나 앞으로의 일을 보나, 엡실론을 아무 탈 없이 회수해 올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너희 스폰서야 일단 군침 도니까 덮어놓고 데려오자고 했겠지만, 막상 도중에 문제 생기면 바로 꼬리 자르려고 할걸? 우크라이나에서 그랬잖아?”

호종은 미소를 지었다.

“상기시켜줘서 고마워.”

영걸은 호종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만 들었기에 그에 관한 소문에 어느 정도 거짓이 섞여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의 암호명은 몇 번 들은 바 있었고, 떠도는 풍문으로 들은 무용담도 제법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바로 코앞 30cm 간격의 상대를 발차기로 때려 코를 부러뜨려 놓았다는 이야기였다. 얼굴을 직접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영걸은 이제 그 소문을 믿기로 했다. 영걸은 코를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지며 생각했다.

- 발을 앞으로 뻗는 게 아니라 몸을 옆으로 기울여 회축차기 하는 거였군, 젠장.

쓰러지는 순간 영걸은 뒤이어 호종의 발이 얼굴을 향해 날아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주머니에 넣어둔 권총을 내뻗었다. 그러나 영걸의 예상은 두 가지가 틀렸는데 첫째로 발이 아니라 주먹이 날라 온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얼굴이 아니라 등쪽을 때린 것이었다. 영걸은 이전의 훈련과 작전 때의 경험에 비추어 호종이 자신의 신장쪽을 때렸음을 알 수 있었다. 체중을 실어 내려찍을 것처럼 오던 주먹이 궤도를 바꾸어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전신에 마비가 오는듯한 감각의 박탈과 엄청난 고통을 동시에 느끼는 모순된 상황 속에서 영걸은 권총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내 호종의 발길질로 권총은 소파의 밑 틈새로 굴러 들어갔다.

“상도덕이란 게 있어, 이 새끼야. 우크라이나에서처럼 진상 짓을 저지르면 안 되지. 그런 건 평생 가져가는 포트폴리오야.”

바닥에 쓰러진 영걸은 코에서 터져 나와 입으로 흘러드는 피를 뱉으며 웃었다.

“너희 애들에게도 그런 훈장질 했었나? 걔들은 그런 소리 안 하던걸? 한 년은 거의 넘어올 뻔했어. 아, 뭐였지? 람다λάμδα였나?”

호종은 빨리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양복 주머니를 다급하게 뒤졌다.

-어디였지? 아, 윗주머니!

호종은 윗주머니에서 블랙베리를 꺼내 들었다. 트랙패드를 미리 입력된 패턴대로 문지르자 위쪽 잠금버튼이 있는 면에서 두 개의 전극이 튀어 올라왔다. 꺼져 있던 액정화면에 불이 들어오고 5만 볼트까지 승압하는데 남은 시간이 10초라는 메시지가 떴다. 10초간은 이놈을 더 붙들고 있어야겠군. 호종은 영걸의 몸 위에 올라탄 다음 목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호종은 옆구리가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호종은 영걸이 숙달된 칼잡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랬다면 갈비뼈를 비켜 찔렀을 것이다. 영걸이 호종의 옆구리에 밀어 넣은 칼끝을 움직이려 하자 호종은 몸을 비틀어 영걸의 옆으로 굴렀다. 칼은 영걸의 손에서 벗어난 상태였지만 그대로 호종의 옆구리에 꽂혀 있었다. 호종은 블랙베리의 액정이 붉은색으로 깜빡이는 것을 확인하고 돌출된 전극을 영걸의 목에 찔렀다. 마른 나뭇가지가 밟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고 영걸은 잠시 몸을 바르르 떨었다.

벽을 짚고 일어난 호종은 문을 살짝 열고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선애는 지금 박정현의 ‘꿈에’를 부르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칼을 뽑아내고 잠시 숨을 몰아쉬던 호종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 이 노래방으로 오자고 한 게 누구였지?

호종은 욕설을 뱉으며 문을 밀치고 복도로 나갔다.

“백업팀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호종 앞으로 노래방 주인이 걸어왔다.

“아이고, 방 못 찾으셨어요?”

주인이 웃으며 한쪽 팔을 등 뒤로 돌리는 순간 호종은 앞으로 달려들어 손에 쥐고 있던 블랙베리로 그의 목을 찔렀다. 충전된 용량을 두 번 만에 모두 사용한 탓에 이제 호종은 아무런 무기도 없는 상태였다. 호종은 다시 영걸이 있는 방으로 돌아가 권총을 찾아올까 했지만, 곧 포기하기로 했다. 문가에서 인기척이 들렸기 때문이다. 요란한 차림의 여자 셋이 들어왔다. 아마도 노래방 도우미들일 거라 생각한 호종은 그중 한 여자가 호종을 보자마자 체중을 한쪽 발에 옮겨 싣는 자세를 보고 안도했다.

-나와 같은 엡실론의 학생이야.

요란한 화장을 하고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세 여자 중에서 가장 훈련이 잘되어 보이는 여자에게 호종이 말을 걸었다.

“동방해운?”

“네, 화물은요?”

“핑클 룸, 저쪽 중간의 제일 큰방입니다. 그리고 복도 끝, 오른쪽의 룰라 룸에도 가봐요. 알료샤가 있으니까. 복도에 떨어진 것도……. 뭐, 알아서 수거해 가시고요”

호종의 옆구리에 난 핏자국을 보고도 미동이 없던 여자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월척 하셨네요. 알파ἄλφα는 밖에 있어요. 빨리 가보세요. 여기는 이 시간까지 주차단속 하네요?”

호종은 잠시 복도를 돌아보았다. 선애는 ‘꿈에’의 후렴부분을 부르고 있었다. 제발 아무나 그 마이크를 빼앗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호종은 여자를 돌아보았다.

“뒤처리 잘 부탁드립니다.”


계단에서 호종은 넥타이를 풀어 둘둘 말은 다음 옆구리를 눌렀다. 와이셔츠를 적신 피는 바지 쪽으로 흘러내려 가고 있었다. 동방해운의 로고가 새겨진 중형 트럭은 주차단속차량의 경고방송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가에 서 있었다. 트럭의 조수석에 오르자 운전자는 가볍게 눈인사를 한 다음 중간의 시트를 뒤로 젖혔다. 주차단속원이 차 문을 두드릴 때 호종은 그사이로 몸을 굽히고 들어갔다.


컨테이너 내부는 좁았다. 움직이기만 해도 케이블이 발에 걸리고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한쪽 모니터 앞에는 잘해봐야 스무 살밖에 안되었을 고스족 차림의 여자아이가 세상만사 다 지겹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끝쪽에는 이 비좁은 난장판 속에서도 가장 여유롭게 있다고 주장하는 듯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노인이 있었다. 호종은 대충 앉을만한 물건을 찾아보다가 바닥에 바퀴가 달린 박스 하나를 선택하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게 1억 2천만 원짜리 복호화 장비라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노인은 무선헤드셋을 쓰고 통화하는 중이었다. 노인은 때때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좋아,’ ‘그래, 알았네.’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호종을 향해 눈짓으로 잠시 기다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통화가 끝난 다음, 노인은 그제야 호종의 옆구리 상처를 본 것처럼 (그의 발밑에서 불과 50cm도 안 떨어진 곳에 핏방울이 떨어져 있음에도 말이다.)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괜찮은가?”

“알료샤를 잡았고, 화물은 누님들이 인수하러 갔습니다.”

호종은 노인의 질문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고스족 소녀를 향해 외쳤다.

“프사이ψῖ! 거기 구급킷에서 지혈패드 좀 가져다주게. 그래 거기 그 상자, 아니, 그거 말고 빨간 십자가 있는, 그래 그거. 만날 이 안에 처박혀 살면서 구급상자 위치도 모르나?”

노인은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호종은 그의 말에는 신경 안 쓰겠다는 듯 중간에 말을 자르며 질문했다.

“대체 왜 한 달이나 기다리게 한 겁니까?”

고스족 소녀가 호종의 옆구리에 지혈패드를 붙이는 동안 노인은 모니터들로 시선을 옮겨가며 말했다.

“모든 게 불확실했거든. 엡실론이 정말로 고향에 발붙일 마음이 있는 건지, 알료샤가 나타난 게 단지 연막을 뿌리기 위한 일인지, 우리 쪽의 화물에 손을 대려고 하는 건지. 엡실론은 딸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모든 협상을 원점으로 되돌리겠다고 하고, 알료샤가 나타난 마당에 본사에서는 그놈의 스폰서를 찾아내라고 지랄하고. 뭐, 자네가 정수기 팔러 다니며 고생하는 동안 이쪽도 나름 바빴네. 그리고 자네 문제도 있고.”

호종은 자신의 문제라는 단어가 나오자 눈을 지켜 떴다. 만약 선애가 보았다면 낯설어할 그런 표정이었다.

“제 충성을 의심하는 겁니까?”

“자네의 충성을 의심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네. 나는 다만 우리의 조국을 의심할 뿐이지. 우리의 충성으로 먹고사는 조국. 엡실론도 똑같은 의문을 가졌던 거야. 어쨌든 엡실론이 우리와 협상하는 데는 자네 힘이 컸네. 유일한 약점인 딸을 제자인 자네가 지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에이스 석장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물론 액면에 그 석 장을 다 노출할 수는 없어서 알료샤가 어떻게 하나 지켜본 거고. 풀하우스를 짓기 전에는 원페어만 보여줘야지. 안 그렇나?”

호종은 양복 윗도리를 벗어 이리저리 둘러보며 피가 묻은 곳이 없나 살펴보았다. 다행히 출혈이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고, 칼은 셔츠 바로 위를 뚫고 들어갔기 때문에 단추만 잘 잠그면 피묻은 셔츠가 보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엡실론 선배가 돌아오면 난리 나겠네요.”

호종은 오늘 처음 진심으로 웃는 것 같았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당장은 아니야. 우리도 본사와 협상 중이야. 회장은 어차피 5년마다 한 번씩 바뀌는 거니까, 다음 회장과 협상을 해야지. 지금 엡실론을 갖다 바치면 돼지 목의 진주야. 본사 놈들이 리비아에서 진상 떠는 꼬라지 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CIA, 전직 GRU, 그리고 온갖 잡다한 프리랜서 나부랭이들, 아, 자네 얘길 한 건 아니니 기분 나빠하지 말게, 하여튼 업계 인명록으로 써도 될 명단을 머릿속에 가진 황금광산인데 그걸 헐값에 팔겠나? 우리가 그걸로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봐야지. 그리고 그 협상에서 자네도 패키지로 복귀시킬 생각이네.”

호종은 시니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사업구상 잘하시고요. 제 일은 이제 끝난 거죠?”

“아니지, 이 사람아. 납품기한 연장일세. 맡은 일은 마무리 지어줘야지.”

호종은 눈썹을 찡그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알료샤를 잡은 것만으로도 부족하단 말입니까?”

“문제는 알료샤 하나만이 아니야. 그놈 스폰서들이 가만있겠느냐는 거지. 자네도 오다가 보지 않았나? 저 앞 사거리에서 사고 낸 멍청이들. 그놈들도 알료샤의 백업 팀이야. 그 인원을 서울 한복판에서 움직일 놈들이라면 앞으로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이번에는 멍청한 놈들이라 우리가 운이 좋았지. 당장 여길 나간 다음부터 벌어질 일에 따라서 엡실론의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고. 한 달일세, 한 달. 그때까지만 화물관리 좀 해줘. 그 안에 우리가 엡실론을 데려오지. 그럼 자네와의 계약도 끝이네. 계약연장에 따른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추가 보너스가 필요하면 지금 말하게.”

노인은 자신이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이 양손을 깍지 끼고 턱을 괴었다. 호종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양복주머니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호종은 손가락을 들어 입에 갖다 댄 다음 ‘화물입니다.’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호종은 전화를 받았다.

“호종 씨? 저 선앤데요. 어디에요?”

“아, 잠깐 밖에 바람 쐬러 나와 있어요. 왜요?”

“아니, 그냥……. 영걸 씨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길게 하는 거에요? 둘이 사귀나?”

“아휴, 그냥 술이 취하신 거 같아서 영걸씨는 먼저 택시 태워서 보냈어요. 인사 못하고 먼저 가서 죄송하대요. 저도 금방 내려갈게요.”

“알았어요, 빨리 와요. 아, 근데 호종 씨가 도우미 언니들 불렀어요? 아, 아니다, 끊어요. 빨리 내려와요. 응? 어? 그거 내 노래에요!”

통화가 종료된 아이폰 액정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호종이 입을 열었다.

“저…….”

“말해보게, 10만 달러 안에서는 가능하네. 물론 10만 달러 꽉 채우면 좀 섭섭하지. 본사 지원 줄어서 우리도 요즘 빡빡해.”

호종이 말했다.

“혹시 사무실에 정수기 안 필요하십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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