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2008) [15회-16회]

2010.03.21 20:02

DJUNA 조회 수:4094

각본: 이은영 연출: 장태유, 진혁 출연: 문근영, 박신양, 문채원, 류승룡, 배수빈, 이준, 안석환, 임지은, 박진우, 이미영, 김응수, 박혁권

15회

15회는 지금까지 나온 [바람의 화원] 에피소드들 중 원작에서 가장 동떨어져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시리즈는 추가 장면을 넣는다고 해도 원작의 굵은 줄기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했죠. 하지만 이번 에피소드는 거의 원작과 따로 놀고 있습니다.

기본 동기는 원작에서 나왔습니다. 사라진 사도세자의 예진을 찾는 것이죠. 도화계 사람들을 만나 뇌물을 주면서 초상화들을 모으는 장면까지는 원작을 따라가고 있긴 합니다. 건성으로요. 여기엔 원작의 미스터리나 추리의 흥분 따위는 없습니다. 주인공들은 별 생각 없이 그냥 합니다. 당연히 맥이 풀리죠. 미스터리는 단순히 퀴즈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도 로맨스처럼 흐름을 타는 테크닉이 있습니다. 이걸 무시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미스터리를 포기했어야 하지요.

마지막 도화계 멤버가 장벽수로 밝혀지면서 에피소드는 심하게 일탈하고 그 일탈은 에피소드 끝까지 이어집니다. 홍도와 윤복이 각각 변장을 해서 장벽수의 생일 파티에 잠입하는 것이죠. 홍도는 사자 탈춤을 추는 춤꾼으로, 윤복은 기생으로. 여기서 각본이 중점을 두는 것은 윤복의 두 번째 여장입니다. 얼핏 보면 4회의 그네 장면과 비슷합니다만,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척 봐도 ‘기생 분장을 통해 윤복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는다’라는 설정이 눈에 들어오니까요. 정향에게 윤복의 여장을 돕게 하고 여장한 상태에서 홍도와 만나게 하는 설정에는 라인 정리의 음모가 보이기도 합니다.

홍보팀의 주장이 작가의 의견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윤복의 흔들리는 성정체성’ 아이디어가 영 별로입니다. 왜냐고요? 전 윤복이,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무렵부터 끝날 때까지 성 정체성 위기를 겪은 적이 없었다는 걸 거의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캐릭터와 스토리의 논리가 서기 때문입니다. 그걸 부정하면 작품 자체가 붕괴됩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죠. [바람의 화원]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이 작품이 신윤복이라는 화가와 그 화가가 그린 작품을 예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로 [단오풍정]과 [미인도]를 그린 예술가는 성장의 종점이지 다른 어디로 가기 위한 중간 과정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신윤복이라고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여자들을 사랑한 화가가 있었는데, 그가 그 여자들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그리는 방식이 다른 남자 화가들과 많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재미있지만,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신윤복이 여자라고 주장하는 가장 큰 근거는 그가 여자들을 사랑했고 그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논리를 대입해봅시다. 소설과 드라마의 윤복이 그리는 그림들은 [기다림]에서 시작되어 [단오풍정]으로 이어지고 결국 [미인도]로 끝납니다. 이 여정에는 치밀한 일관성이 있습니다. 이 그림들을 그린 화가는 발전 과정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으로건, 예술가로건, 이미 완성된 존재지요. 주제나 스타일을 봐도, 화가는 성정체성의 위기와 같은 큰 혼란을 겪는 인물이 아닙니다. 게다가 신윤복의 차별성으로 내세우는 여성성이 첫 작품인 [기다림] 때부터 끈질기게 등장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세요. 적어도 [바람의 화원] 논리를 따른다면,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자신의 여성성을 별다른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표현하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작품들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난다면 궤도 일탈이지요.

그럼 정향과의 로맨스는 어떻게 된 건가? 이건 성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성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이들이 늘 같은 방향을 가지 않는다는 건 관련 자료를 조금만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전 정향에 대한 윤복의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 점은 분명합니다. 윤복이 정향을 사랑할 때 자신을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죠. 소설 속에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이 다른 사내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했지요. 윤복에게 정향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남자들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더 우월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소설 속에서 몇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이어졌지요. 만약 이런 감정이 흔들리는 성정체성의 문제를 정리하는 순간 깨끗하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사람의 마음을 지나치게 만만하게 보는 겁니다. 당연히 멜로드라마로서의 깊이도 떨어지게 되지요.

멜로드라마의 깊이를 떠나, 이야기 대부분을 차지하는 윤복과 홍도의 스파이 소동은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집니다. 일단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들이 훈련받은 스파이가 아닌 이상, 그런 바보짓을 스스로 해야 할 이유가 없지요. 이들은 지금 왕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자기네들은 전문가 탐정으로서 역할만 수행하고 다른 일에는 왕의 도움을 청하면 되지요. 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길고 장황해서 서스펜스의 힘도 떨어집니다. 톤 조절의 실패는 치명적입니다. 신경질적인 코미디와 과장된 슬랩스틱으로 이어지는 스토리 전개는 그냥 삼류입니다. 예고편만 봐도 싱겁게 끝날 게 뻔히 보이는 클리프행어는 짜증이 날 정도고요. 윤복의 여장 아이디어를 왜 넣었는지는 알겠지만, 여기엔 첫 번째 그네 장면의 매력은 없습니다. 비슷한 걸 한 번 봤고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덜 재미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제가 이 에피소드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엉뚱한 일에 시간을 까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홍도, 신윤복, 정향, 김조년이 얽혀 있는 극적인 심리 드라마가 왜 아직 나오지 않는 걸까요? 지금쯤 매력적인 악인의 카리스마를 뽐내야 할 김조년은 아직까지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우두커니 서서 벽 역할만 하고 있지요. 아니, 제대로 된 벽 역할도 못합니다. 윤복에게 정향을 만나도 된다는 허락을 내렸으니 문 달린 벽이지요. 있으나 마나한 존재인 겁니다!

슬슬 왜 이들이 어진화사 에피소드를 장황하게 끌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재료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로 시간을 질질 끌면서 어떻게든 후반 드라마를 축소시키려 했던 거죠. 어떻게 보면 오늘의 스파이 대소동도 같은 동기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작가라면 “하느님, 이렇게 재미있는 장난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조몰락거리며 가지고 놀게요!”라고 외쳤을 법한 재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걸 보고 있어야 하다니 어이가 없군요.

16회

15회에서 이어지는 클리프행어는 예상대로 바보스럽고 어설프게 종결됩니다. 전 이 악당들이 왜 처음부터 등장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행동에 일관성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늘 어릿광대처럼 굴고 있어요. 이들은 나오지 않는 게 낫습니다. 질만 깎아먹을 뿐이죠.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기생 분장을 한 윤복과 홍도의 러브 러브 모드입니다. 윤복이 기생 분장을 한 것도 다 이 전개를 위해서죠. 여기서 윤복은 ‘제가 여자라면’ 운운의 대사를 꺼내고 홍도는 윤복의 이마에 키스를 합니다. 사제라인 지지자들은 열광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전 이 장면의 진부한 전개에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입니다만.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봤나 봅니다.

여기서 사제라인에 대한 제 불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사제라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떡밥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맘먹으면 [군선도] 장면이나 그림자 장면과 같은 ‘명장면’을 뽑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두 ‘김홍도와 신윤복이 러브 러브 모드로 발전한다!’를 선언하기 위해 끊임없이 인공적으로 풀어놓은 떡밥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올 때마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어서 강요처럼 느껴집니다. 흐름이 끊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죠. 스토리 자체가 원래부터 이들의 공공연한 러브 모드를 진행시키기 위해 디자인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 때문에 이들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한없이 장황한 회상 장면이 동원되어야 하고 조성모의 노래가 무한반복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게 정상적인 상황입니까?

결정적으로 이들의 이야기에는 극적 기능성이 굉장히 떨어집니다. [바람의 화원]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화가의 욕망입니다. 정향은 뮤즈로서, 화가 윤복의 예술적 욕망을 자극합니다. 정향과 함께 있을 때 윤복은 주체적인 예술가입니다. 하지만 홍도는 윤복에게 같은 자극을 주지 못합니다. 그나마 원작엔 있었던 동제각화 에피소드가 축소되니 더욱 그렇죠. 원작에서는 당당하게 스승과 경쟁하는 화가였지만 드라마에서는 제자 겸 잠재적 연애대상자로 남아 스승 뒷바라지나 해야 하니 캐릭터가 죽을 수밖에.

이걸 보완하려면 처음부터 새로 스토리를 짜야 하는데, 여전히 드라마는 원작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원작에는 없는 떡밥을 계속 흘리는 것입니다. 해결 방법이 없어요.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홍도의 캐릭터가 점점 비정상적인 히스테리에 빠지는 것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러닝타임을 불필요하게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위치가 불안한 것이죠. 화로에 손을 집어넣어서라도 어떻게든 연인 1번의 위치를 유지해야 하는 겁니다. 이건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의 논리입니다. “나는 너 때문에 이렇게 아파, 그러니까 날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이런 걸 [바람의 화원]에서까지 볼 필요는 없어요.

사도세자의 예진 에피소드는 일종의 안티 클라이막스입니다. 지금까지 스토리 전개를 고려해보면 마땅히 공을 들여 에피소드 후반에 배치해야 했거늘, 의미 없는 클리프행어와 사제간의 러브 러브 모드에 자리를 빼앗겼지요. 미스터리가 처음부터 약했던 것도 문제. 아무리 정조가 아버지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도 그 감정이 흘러나올 공간이 충분치 않습니다. 이건 심각한 계산 착오입니다. 드라마가 소설보다 정치를 훨씬 강조했다면 이 장면에 거기에 맞는 대우를 해주어야죠. 그렇지 않으면 균형이 깨집니다.

윤복이 김조년 집으로 돌아간 뒤,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던 [월하정인] 장면이 나옵니다. 다행히도 작가는 이를 홍도와 윤복의 이야기로 개조할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반대로 오래 전부터 이 장면을 머릿속으로 씹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아마 미리 써놨을지도 모르죠. 그 증거로 지금까지 건성으로 날아다니던 쪽대본과는 달리, [월하정인]의 대본은 안정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완성도도 높습니다. 원작의 스토리를 따르지는 않지만, 자기 방식으로 그림을 재해석하고 있고 심지어 그림에 첨가된 시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요. 많은 닷냥팬들이, 윤복이 자신의 정체를 너무 일찍 밝힌다고 공포에 떨었지만, 전 지금 밝히는 게 오히려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뒤에 [월야밀회]와 화사 장면, 그림자극이 나온다면 말이죠. 게다가 이 장면은 문채원의 연기가 좋습니다. 늘 불안한 배우이긴 하지만, 이 사람은 문근영을 앞에 놓고 정통 멜로를 할 때는 갑자기 실력이 좋아진단 말이죠. 지난주에 나왔던 생기 없는 정향/윤복 장면들을 생각하면 [월하정인]은 거의 원점 복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장면의 여파는 이후 이어지는 [상춘야흥] 장면까지 이어지지요. 두 번째 기생의 차갑고 우울한 표정이 정향의 심정과 절묘하게 연결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작품 전체를 통해 보면 힘을 잃습니다. 이 역시 아주 당연한 이유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월하정인] 장면은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야 제대로 기능합니다. 하나, 그 동안 윤복의 감정과 행동이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둘, 윤복의 죄의식이 진짜여야 합니다. 셋, 김조년이 그들 사이를 막아서는 방해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드라마의 감정과 상황이 제대로 꽃필 수 있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7회부터 15회까지 이어진 중반 에피소드들은 이 기초 설정들을 모두 파괴했습니다. 윤복은 캐릭터와 감정의 일관성을 잃었습니다. 얘는 도대체 생각이 없어요. 도화서에서 나온 지 한참 되었는데도 여전히 몽유병 환자 같습니다. 김조년은 눈먼 기둥서방입니다. 결정적으로 윤복이 정향에게 진실을 고백하겠다고 결정한 순간이 수상쩍습니다. 마치 새 애인으로 갈아타기 위해 옛 애인을 정리하려는 것 같아요. 물론 홍도에게도 고백하려다가 둘의 과거에 대해 알아차리고 겁에 질려 뒤로 빼긴 했지만, 그래도 이 타이밍은 지극히 불쾌합니다. 만약 남자가 윤복처럼 행동했다면 시청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나쁜 놈!”을 외쳤을 겁니다. 문근영이 그 역할을 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니란 말이죠.

여기서 우린 이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각색의 황금률이라고 불러도 될 법한 기초 규칙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건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절대로 설정 조작을 위해 주인공의 감정을 죽이거나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이건 거의 교과서적인 규칙이라 작가들이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검열을 하고 있거나 외부검열을 받고 있죠. 일단 검열을 인정하면 지는 겁니다.

그걸 고려하고 보면 [월하정인]에서 윤복의 행동도 조금씩 거슬립니다. 일단 얘는 여자라는 사실을 감춘 게 가장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엄청난 착각입니다. 지금까지 윤복이 정향에게 한 짓을 생각해 보라고요. 정체를 밝히지 않은 건 실수도 아닙니다. 게다가 정향을 사랑해줄 다른 사람을 만나라니요 (이 대사는 원래 대본에 없는 모양입니다) 이게 논리가 맞습니까? 정향이 김조년 집에 갇힌 죄수나 마찬가지라는 걸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에요? 게다가 정향은 심지어 여자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화공으로 돌아와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냥 물러날 상황이 아닌 것입니다. 이건 더 이상 연애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윤리의 문제입니다. 간단히 결정을 내리기엔 정향이 너무 약자입니다.

아직 4회가 남았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끌고 가게 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김조년의 캐릭터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 한 이들이 무엇을 해도 긴장감은 살아나지 않을 겁니다. 과연 4회로 할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서는 부정적입니다. 2주밖에 안 남았는데,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윤복을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질투 홍도가 자기 질투심을 조금 나누어 주어도 될 텐데 말이죠. 물론 전혀 다른 스토리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15회 에피소드의 질을 고려해보면 원래 스토리를 따라가는 방법밖에 없겠습니다. 아마 설정을 조금 바꾼 윤복과 정향의 남은 장면들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관리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이 결정되겠죠. 사제간의 경우는 그냥 원작을 충실하게 따라주기만 했으면 합니다. 그게 그나마 홍도가 낯을 살릴 수 있는 길입니다. (08/11/21)

기타등등

[무동] 에피소드는 정말 말이 안 되는군요. 할아버지와 필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라면 가족이 모두 아이의 장애를 알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설정 자체가 무의미하죠.

전 심각하게 5회에서 윤복이 입은 부상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했는데, 우물에 던져지기까지 했으니 머리가 온전할 리가 없죠. 7회 이후 얘가 기억장애에 걸리고 캐릭터가 오락가락한 것도 뇌손상의 후유증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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