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로 그린 초상 Portrait in Smoke (1950)

2010.03.21 21:46

DJUNA 조회 수:4874

Bill S. Ballinger (글) 최내현 (옮김)

[연기로 그린 초상]은 빌 S. 밸린저의 초기작으로, 그의 개성으로 알려진 교차진행의 서술을 처음으로 활용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바탕 삼아 [이와 손톱]이니, [기나긴 순간]이니 하는 그의 대표작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죠.

소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스토리 1에서는 시카고에서 수금 대행업을 하는 대니 에이프릴이라는 남자가 젊은 시절 한 눈에 반한 여자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추적합니다. 그러는 동안 그 여자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 대니의 1인칭으로 그려지지요. 스토리 2에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그 여자 크래시 알모니스키가 진짜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들려줍니다.

[연기로 그린 초상]에는 [이와 손톱]이나 [기나긴 순간]의 트릭이나 반전은 없습니다. 우선 대니와 크래시의 연관관계가 드러나 있어요. 전혀 상관 없는 두 이야기를 하나로 엮는 매력은 없죠. 게다가 첫 몇 챕터만 읽으면 이 작가가 이야기를 어떻게 맺을 것인지 대충 보입니다. 이건 거의 팜므 파탈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의 노골적인 클리셰에 가깝죠. 지금 이 이야기를 결말을 진지하게 사용한다면 하드보일드 소설의 패러디처럼 보일 겁니다.

진지하게 읽어도 이 소설은 여자들에 대한 남성판타지를 놀려대는 작품처럼 보입니다. 대니 에이프릴은 크래시 알모니스키에 대해 아주 로맨틱한 환상을 품고 있는데, 그건 순전히 이 여자가 예쁘기 때문이죠. 이 여자가 결코 소설 속에 나오는 순결한 여자주인공이 아니라는 증거가 도처에 널려있는데, 그는 그걸 몽땅 무시하고 자신의 판타지를 고집합니다. 갑갑하고 한심한 놈이에요.

이 소설의 실질적인 악역인 크래시는 대니와 비교해보면 오히려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대니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매력적인 건 아니에요. 솔직히 친구하고 싶은 사람도 아니고요. 하지만 크래시는 영리하고 현실적이며 자신의 계획과 주어진 일에 성실합니다. 크래시가 소모품처럼 버리고 가는 남자들 중 그렇게 제가 구원해주고 싶은 사람들도 별로 없고요. 크래시가 남자들을 밟아가며 조금씩 신분상승을 이루는 스토리 전개에는 은근히 통쾌한 구석이 있어요. 아니, 은근한 정도가 아닙니다. 그냥 통쾌해요. 특히 모든 것들이 완성되는 결말 부분에서는요.

빌 S. 밸린저의 대표작으로 분류될 수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그러기엔 너무 손쉽게 쓴 책이죠. 대니 에이프릴이 아무리 순진무구하다고 해도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해 도입한 심리 묘사의 상당 부분은 믿기가 힘들고요. 하지만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술술 잘 넘어가는 오락물임은 틀림 없습니다. (08/12/15)

기타등등

번역서에서는 원제를 [Portrait in The Smoke]라고 해 놓고 있는데, [Portrait in Smoke]가 맞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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