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자의 아내 The Time Traveler's Wife (2003)

2010.03.21 22:10

DJUNA 조회 수:4687

Audrey Niffenegger (글) 변용란 (옮김)

1.

오드리 니페네거의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엄청나게 환상적인 병에 걸린 남자와 그의 아내의 이야기를 다룬 SF입니다. 주인공 헨리가 걸린 병이 무엇이냐. 이 사람은 유전자 이상으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답니다.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냥 갑자기 자신과 연관된 과거나 미래의 시공간으로 툭하고 떨어져 버리는 겁니다. 그것도 알몸으로요. 하긴 옷을 입은 채로 떨어지면 이상하겠죠. 그래도 꼼꼼하게 따지면 이것도 좀 괴상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마티니 한 잔을 하고 있는 동안 시간 여행을 하면 슬슬 몸에 흡수되고 있는 마티니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몸 안의 기생충들은? 배설물은? 땀은? 물론 소설은 이런 걸 꼼꼼하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 작품을 SF로 분류하길 원치 않을 겁니다. 하긴 그렇게 과학적으로 치밀한 작품은 아니죠. 소설 속의 과학 역시 판타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끌어들인 변명에 불과하고요. 이 소설의 내용은 SF보다는 마르셀 에메의 판타지 단편에 더 가깝습니다. 주어진 운명에 처음부터 끝까지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들의 행동 역시 그렇게 SF 독자들의 맘에 들지는 않을 거고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SF 장르의 기본은 한 셈입니다. 여러분이 [닥터 후] 시리즈를 SF로 분류한다면 [시간 여행자의 아내] 역시 같은 카테고리 안에 넣어야 합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만.

2.

제 생각에 니페네거가 이 아이디어로 소설을 쓴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글을 쓰기 쉬웠기 때문이겠죠. 시공간을 잘게 쪼개어 두 주인공들을 여기저기에서 끼워넣으면 하나의 챕터가 만들어지는 구조인 걸요. 솔직히 보면 아이디어를 쉽게 만든 티가 납니다. 번역서의 1권이 비교적 쉽게 넘어가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읽는 데 애를 먹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읽는 것 자체는 쉬웠지만 다음 내용이 전혀 궁금하지 않더란 말입니다. 다들 비슷비슷한 상황 속에서 비슷비슷한 고민을 되풀이 할 테니까요. 다행히도 이들 커플이 식을 올리고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애를 낳고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2권에서는 진도가 비교적 빨리 넘어갔습니다.

보다 정통적인 두 번째 이유는 이것이 굉장히 효율적인 로맨스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시간여행 로맨스는 거의 따로 장르를 하나 세울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전통을 가지고 있죠. 가장 유명한 건 로버트 네이선의 [제니의 초상]이겠지만요.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이들이 전혀 다른 시간대에 속해 있어서 그 만남이 제한된다면 그건 썩 좋은 로맨스의 배경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원래 로맨스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연인들을 갈라놓을 효율적인 장벽을 쌓는 것이니까요. 물론 장벽만 쌓으면 곤란하죠. 그 장벽을 초월할 이유 역시 제시해주어야 하는 겁니다.

니페네거의 아이디어는 이 둘을 모두 제공해줍니다. 주인공 헨리는 툭하면 이곳 저곳의 시간대에 알몸으로 떨어지니 아내 클레어는 언제 그를 잃을지 모릅니다. 아직 아내가 아닌 클레어는 그가 언제 곁에 올지 알 수 없고요.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런 시간 여행의 설정 때문에 이들이 시작부터 운명의 연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클레어가 헨리를 처음 만났을 때 헨리는 이미 클레어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헨리가 클레어를 처음 만났을 때 클레어는 이미 헨리를 알고 있지요. 그들의 삶은 다양한 시간대를 통해 아주 꼼꼼하게 엮여있기 때문에 연인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그들에게 미리 결정된 운명을 만들어주는 셈이죠. 이걸 또 논리적으로 따지면 재미있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논리보다 운명의 사랑이 만들어내는 정서적 효과가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대리 만족의 판타지도 녹아 있습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시간 역시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헨리의 시간여행을 통해 그런 판타지가 완성됩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난 뒤로 그 사람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사람과 함께 하니까요. 여기에는 또 다른 판타지가 있는데 그건 스포일러이니 말하지 않겠습니다. [에반젤린]이나 [오디세이]를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연애물 설정이라는 건 말해도 좋겠지만요. 인공적이고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결말이 독자들에게 먹히는 것도 그 전통 때문일 겁니다.

3.

전 번역서를 읽을 때 양성 평등에 신경을 쓰는 편인데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걸리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클레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헨리 아저씨'를 만나왔으니, 역자가 처음에 존대어를 택한 이유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클레어가 헨리를 처음 만난 뒤부터는 둘의 평등성을 확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들의 나이차는 그렇게까지 많은 편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하면 독자들이 시간대를 파악하는 것이 쉬워지고요. 그런데 이 번역본은 계속 그 기준을 고수합니다. 그렇다고 고수만 하는 것인 것도 아닌 게, 2권부터는 역자도 잠시 헛갈리기 시작하거든요. 보다 꼼꼼한 편집 작업이 필요했던 책입니다.

4.

번역서는 지금 절판되었습니다. 하지만 핸디북으로 재출판되었으니 이마트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영화가 나오면 또 책이 풀리겠죠? (09/06/30)

기타등등

영화로 만들어집니다. 레이첼 맥아담스와 에릭 바나 주연이지요. 막 예고편을 봤는데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라고 생각합니다.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