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가면귀 (2009)

2010.03.21 23:33

DJUNA 조회 수:3384

각본: 이찬영 연출: 문영진 출연: 지주연, 심형탁, 신동훈, 이일화, 윤순홍, 이민희, 안변경, 윤용현, 김지민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면 [가면귀]는 여자귀신이 자기를 죽인 원수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귀신은 두 가지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하나는 얼굴을 긴 머리로 가린 사다코 + 가야코식이고 다른 하나는 흑백으로 갈라진 가면을 쓰고 있는 광대모습입니다.

에피소드는 군수 생일날 잔치를 준비하는 사당패들과 군수 가족들 앞에 나타나는 귀신을 보여주면서 중간중간에 섞는 회상을 통해 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줍니다. 제가 대신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섭이라는 예쁘고 실력있는 여사당이 있었는데, 군수의 첩으로 팔려갔습니다. 임신한 가섭을 질투한 군수의 아내는 사람을 시켜 가섭을 죽였습니다. 저라도 귀신이 되어 나타나겠습니다.

몇 가지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섭은 죽은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는 지박령인데, 그 자리가 집이 아닌 나무 상자입니다. 다시 말해 살아있는 사람이 그 지박령을 어디로든 옮겨 복수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죠. 사당패라는 소재 역시 새로운 종류의 귀신을 등장시키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이야기의 영역을 넓힐 수도 있습니다. 사당패와 지금의 연예인들을 비교하는 마지막 대사는 좀 황당하지만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성공적인 에피소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과거 회상의 구성은 혼란스럽고 집중력을 떨어뜨립니다. 그 과정을 통해 알게 되는 사연 역시 뻔하고요. 차라리 정공법을 취해 처음부터 이야기를 진행시켰다면 더 나았을 걸 그랬습니다. 공포효과는 그냥 나쁩니다. 긴 머리 여자 귀신 클리셰는 '농담 하냐!'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고 가면귀의 디자인은 엉성합니다. 말이 너무 많은 귀신은 무섭지 않으며 그 애절한 사연에도 불구하고 조금 짜증이 납니다. 얼렁뚱땅 용서와 화해로 끝나는 결말 역시 싱겁고 미진합니다. 주어진 기회를 놓친 또다른 [전설의 고향]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에피소드 리뷰는 여기서 끝내고 2009년 [전설의 고향]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죠.

우선 2009년 시즌이 2008년 시즌보다 심하게 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인 것 같습니다. 저도 리뷰하는 동안 그렇게 생각했고요. 하지만 하나하나 에피소드를 검토해보면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여전히 질이 낮은 에피소드들이 발견되지만 [죽도의 한]처럼 흥미로운 역사적 재해석 시도한 작품도 있었고 [씨받이]처럼 전통적인 [전설의 고향] 공식을 충실하게 따른 작품도 있었으며 [금서]처럼 새로운 스타일과 스토리에 도전한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실패작들도 그냥 게으르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현대적인 스토커 캐릭터를 도입시킨 [계집종]은 처음부터 실패가 예상되었던 이야기지만 그래도 이런 걸 한 번 시도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아주 뛰어난 시즌은 아니어도 작년 시즌보다 심하게 떨어지지는 않았단 말입니다.

이번 시즌이 악평을 받는 이유 중 일부분은 외부적 요인이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일단 이 시리즈는 [선덕여왕]과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나름 안정된 시청률을 거두었던 저번 시즌과는 달리 처참한 참패를 거둘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시리즈 최대 실패작인 [혈귀]를 맨 앞에 내놓은 건 그냥 심각한 계산 착오였습니다. 뒤에 상대적으로 나은 에피소드들이 이어졌지만 나빴던 이미지는 쉽게 좋아지지 않았죠.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2008년 [전설의 고향] 에피소드가 비교적 평범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은 성과보다는 그 성과를 통해 본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작년 시즌 새로운 [전설의 고향]이 이전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뭔가 다른 것이 될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평가는 스타일과 내용의 진보를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리 걸음만 해도 퇴보한 것처럼 보이고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도 대실패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죠. 이번 시즌에서는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타개하려는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년 시즌의 실수들은 반복되었고 특수효과나 공포효과는 더 나빠졌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방송국 내부사정이 있다는 소문도 들립니다. 하긴 지금 KBS의 상황에서 제대로 된 작품이 만들어지면 오히려 신기할 것입니다.

전 여전히 새로운 [전설의 고향] 시리즈의 지지자입니다. 예전에 비해 공포효과가 떨어졌다느니 하는 비판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이 시리즈의 목표는 전설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공포 자극은 아니니까요. 과거의 향수에 젖은 팬들의 기억에 의지하는 비판에 일대일로 대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옛날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흐릿한 이야기에 구체적인 시대와 역사를 입히고 거기에 현대적인 의미를 심으려는 시도는 여전히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시리즈는 자기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하지 못했고, 우리시대의 사극에 어울리는 스토리텔링과 대사의 기술을 익히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하려는 이야기에 자신이 없습니다. 과연 다음 시즌에 이 문제점들이 극복될 수 있는지 지켜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다 내년 시즌이 안 나오면 실망스러운 거고. (09/09/28)

기타등등

사당패들이 감자를 먹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감자는 19세기까지 조선시대에 들어오지 않았죠. 무대가 19세기일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그냥 고증무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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