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웰트의 방식

2010.02.05 22:03

DJUNA 조회 수:2617

1.

[9마일은 너무 멀다]의 닉 웰트는 그렇게 논리적인 인물일까요? :-)

이미 해리 케멜먼에 대한 을 한 번 올린 적 있는데, 이번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기로 하지요. 물론 이번에도 [9마일은 너무 멀다]가 첫번째 예로 나올 것입니다. 닉 웰트 시리즈의 최대 걸작이며 가장 모범적인 닉 웰트 작품이니까요.

줄거리는 다들 아시죠? 닉 웰트는 나레이터인 검사가 던져올린 문장인 '9마일을 걷는 일은 쉽지 않다. 빗속이라면 더욱 힘들다'라는 문장에서 '논리적으로' 전날 밤의 살인사건을 추론해 냅니다. 웰트의 추론 과정이 흥미진진하고 단순한 문장이 살인사건의 증거로 발전하는 반전도 멋있어서 이 단편은 언제나 읽어도 박진감이 넘칩니다.

그러나 과연 웰트는 순전히 그의 연역적 추론 만으로 진상에 도달했을까요? 천만의 말씀. 그건 순전히 운입니다. 웰트는 일단 범위를 좁히기 위해 그 문장이 진지한 의도에서 말해진 것이며 그 배경은 바로 이 근처이다... 등등을 가정하고 넘어갑니다. 이렇게 가정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그런 거죠. 이 가정이 맞아 떨어진 것은 운이 좋아서랍니다.

다음에 웰트는 이 인물이 왜 그렇게 걸어야 했을까를 가정하는데, 사실 이런 추론으로 반드시 나가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9마일을 걷는 것은...'이라는 말은 위의 조건이 충족되어졌을 때도 다른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차가 있어도 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꽤 되지요. 버스에 싣기 불가능한 커다란 물건을 카트에 싣고 걸어야 하는 상황도 상상할 수 있잖아요? 비가 증거를 지워버리기 전에 범인을 추적해야 하는 경찰관도 충분히 그 정도는 걸을 수 있습니다. 경찰이 아니더라도 어딘가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물건을 찾으러 9마일을 걸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요.

웰트는 이제 그 인물이 어떤 목적을 이루러 갔기 때문이라고 추론하는데 (사실, 여기가 닉 웰트의 추론 중 가장 엉성한 부분입니다) 여기서도 다른 가능성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 싸움을 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밤길을 멋대로 걸어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4.5마일만 걸어도 왕복 9마일이 되지요. 케멜먼은 '왕복 9마일'이라는 가능성을 계속 무시하고 있는데, 이 개념만 도입되어도 훨씬 다양한 가능성이 도입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무시는 당연했다고 할 수있겠습니다.

이런 식이지요... :-) 웰트의 설명은 아주 잘 쓰여져 있어서 건성으로 읽으면 마치 구멍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멍투성이에요. 그리고 또 그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웰트는 어떻게 진상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우선 그 사건은 너무나도 우연히도 그런 식으로 진상에 도달할 수 있게 공들여 디자인된 사건이었습니다. 웰트는 엄청나게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럼 순전히 운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웰트는 논리적인 척하지만 실제로 그가 결정적으로 진상에 도달한 순간은 전적으로 그의 '숲을 보는 능력'에 의지합니다. 결국 낡은 주술과도 같은 우리들의 단어 '직관력'이 나오고 말지요.

2.

증거의 극소화를 따진다면 [말많은 주전자]도 [9마일은 너무 멀다]와 경쟁할 만합니다. 웰트는 옆 방의 주전자 소리만으로 앞으로 벌어질 도난 사건을 밝혀내지요. 웰트가 추론을 마무리 짓자 검사는 그 말에 홀랑 넘어가서 말하죠. "어떻게 하면 좋겠나? 경찰에 알리면?" 닉의 대답은 정말 사람 환장하게 합니다. "무엇 때문에? 한 청년이 퍼콜레이터를 쓰는 게 귀찮아서 물을 끓여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려고 했기 때문인가?"

하하, 검사 양반은 이 생각을 못했네요. 사실 웰트가 공들여 재구성한 범죄계획보다 이쪽이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게다가 웰트의 추론은 '수증기를 이용하려 했다'라는 상당히 무리한 추론의 도약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그렇다면 뭡니까? 웰트의 추론이 여러 다양한 추론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어째서 그게 진상인 거지요?

답 1: 작가가 봐주었기 때문입니다.

답 2: 웰트가 비밀병기처럼 몰래 감추고 있는 '숲을 보는 능력'을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3.

닉 웰트 시리즈에서 진상에 신경을 쓰다보면 이 시리즈의 진정한 매력을 놓치고 맙니다. 닉 웰트 시리즈의 걸작들에서 진상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9마일은 너무 멀다] 자체도 진상을 밝히려고 만들어진 글이 아니죠. 오히려 정반대의 목적에서 출발했어요. 케멜먼은 보이스카웃 소풍에 대한 기사에서 '9마일...'이라는 문장을 뽑아내어서 이 문장이 여러 함축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거든요. 웰트의 추론도 이 여러 다양한 가능성 중 하나를 일관성있게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웰트 자신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추론은 이치에 맞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이즈라엘 가우]에서 브라운 신부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겁니다. 물론 진상임이 밝혀졌지만 그건 소설의 극적 형태를 완성하기 위해서일뿐이었지요.

4.

케멜먼의 단편들이 소설로 훌륭한 것은 닉 웰트가 소위 '논리'로 독자들에게 사기를 치는 실력 때문이 아니라 웰트가 푸는 사건이 웰트식 추론에도 교묘하게 들어맞을 수 있도록 사건을 디자인하는 작가의 실력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케멜먼의 단편들은 수준이 높을수록 사건이 인위적입니다. [9마일은 너무 멀다]만 보더라도 이인조 살인범들의 계획이 참으로 이상야릇하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가장 어색한 작품은 전에도 언급했던 [지푸라기 남자]였겠지만요. 반대로 사건이 정상적일수록 웰트의 순수 논리는 빛을 잃습니다. 이런 경우 탐정은 논리 이상의 무언가를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되거든요.

5.

언제나 말하는 사실이지만 추리 소설은 '논리적으로 보일수록' 독자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닉 웰트처럼 똑똑한 사람이 사기를 칠 때는 특히 주의해야 하죠. 그러나 이 사기 자체도 케멜먼 단편의 매력이니 눈치채지 못하고 당하는 것보다야 알고 감상하는 편이 훨씬 재미있겠지요? (97/08/0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