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의 여자들

2010.02.05 22:09

DJUNA 조회 수:2828

1.

브램 스토커의 흥미진진한 호러 고전인 [드라큘라]가 아직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다양한 매체(영화, 연극, [세사미 스트리트], 심지어 곧 애니메이션 영화까지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를 넘나들며 현대인의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는 이 소설이 은밀하게 풍기는 성적인 요소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에 프로이트 주의자들이 이 소설을 본격적으로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 겨우 20여년 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죠. 생각해보세요. 이 책 안에는 모든 게 있습니다. 억압된 성적 욕구, 노골적인 남근 상징, 빅토리아 시대의 그 꽉 막힌 듯한 분위기... 대충 기초적인 것만 열거해서 끼워 맞추어도 진부한 정신분석 논문 서넛은 나올 듯 싶군요.

이 너무나도 자명한 요소들 때문에 (심지어 그 은밀함까지 노골적입니다) [드라큘라]에 대한 일반적 해석은 오히려 심심하기까지 합니다. 우선 배경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도덕주의가 끼어들겠죠? 막시즘이나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면 루시 웨스텐라의 비극적인 에피소드를 언급하면서 '약혼'이라는 이 끔찍한 가부장적/부르조아적 관습에 대해 한 마디 할 거고요. 드라큘라가 루시를 공격하기 시작하면 여기서부터 루시의 숨겨진 성적 욕구가 드러납니다. 드라큘라의 등장과 함께 남근상징들이 뒤섞입니다. 드라큘라가 피를 빨아대는 송곳니도 남근상징이고, 반 헬싱 박사가 흡혈귀의 심장을 찌르는 나무 말뚝도 남근상징이죠. 흡혈귀가 된 루시의 모습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주의가 다시 심판대에 오르고, 페미니스트들은 반 헬싱이 루시의 심장을 말뚝으로 찌르는 장면에서 지독한 반여성성을 발견할 겁니다. 이것으로 모자란다면 조나단 하커의 체험에서 성적 방탕의 은유과 동성애에 대한 암시까지 뽑아낼 수 있습니다...

나열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드라큘라]에 대한 이런 분석은 누구나 한 번씩 들어봤던 것들이고 또 상당부분은 지당합니다. 여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어요.

2.

하지만 우리는 브램 스토커의 이 고전에서 지나치게 작가의 무의식에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의 의식적인 의도도 그의 무의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우리는 그의 의식적인 의도도 상당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면으로만 따진다면 [드라큘라]는 상당히 빅토리아 시대적인 건전한 작품이었습니다. 미신과 무질서에서 비롯되는 파국을, 건전한 빅토리아 시대의 주인공들이 과학과 이성을 무기삼아 파괴한다는 이야기니까요. 독자들이 매료되는 것이 그런 건전한 주인공보다 파국을 몰고오는 괴물이라는 점이 아이러니컬하기는 하지만 뭐 괜찮습니다. 스토리도 되고요.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중요한 부분을 한 번 보기로 하죠. 바로 그의 여성관입니다. 브램 스토커의 일생을 대충 검토해보면 재미있어집니다. 수많은 강간 이미지가 난무하는 소설을 써서 유명해진 이 브램 스토커라는 작가가 바로 초기 남성 페미니스트들 중 한 명이었던 거죠. 역시 사회사업가이자 여권 운동가였던 그의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한데, 그는 철학협회나 여성 단체에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강연자로 종종 초대받기도 했습니다.

사실 [드라큘라]에서도 브램 스토커의 '페미니스트'적 측면이 드러납니다. 그것도 상당히 노골적입니다. [드라큘라]라는 소설의 줄거리를 생각해보죠. 트랜실바니아에서 흡혈귀가 한 마리 날아들어서 루시라는 여자를 죽이고 미나라는 여자까지 죽이려고 하다가 결국 실패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 왜 루시는 죽었는데 미나는 살아남았을까요? 답: 미나는 신여성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미나 머레이라는 이 캐릭터를 다시 보게 됩니다. 영화만 보신 분들은 이쯤해서 소설을 다시 펼쳐보세요. 설정만 보면 착각하기 쉽지만, 이 젊은 여성은 결코 남자 주인공이 구출해주어야 하는 '위기에 빠진 여성 damsel in distress'가 아닙니다. 아직 빅토리아 시대가 여성에게 제공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직업인 '교사'일에 종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자기 앞가림을 하는 사람이며, 행동파인데다가 결코 자기 지성을 과소평가하지도 않습니다. 대부분의 [드라큘라] 영화를 보면, 미나는 남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누워서 가끔 반 헬싱 박사의 최면술 상대가 될 뿐인데, 원작의 미나가 보면 기가 막힐 일입니다. 드라큘라가 사라졌을 때 셜록 홈즈와 같은 추리력을 발휘해서 그 늙은 흡혈귀의 행동 패턴을 예언한 사람은 바로 미나였기 때문이죠(그러는 데 롬브로조의 낡은 이론을 이용했다는 건 유감이지만, 스토커나 미나나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미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녀가 피해자로 머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작고 예쁜 머리는 생각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구 따위의 시가 나온 시대에 이런 소설이 씌여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놀랍기까지 하죠.

미나는 분명 브램 스토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 소설을 통해 새로 싹을 피우는 새로운 여성들을 찬양하고 그로 인한 남녀관계의 변화에 대해 뭔가 말하려고 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스토커를 칭찬해주어도 될 듯 합니다.

3.

그런데 좀 재미가 없군요. 너무 건전해요. 여러분도 [드라큘라]를 그렇게 건전한 소설로 보면 상당히 밍밍할 겁니다.

그럼 그 중간 쯤을 한 번 파보기로 하죠. 스토커는 의식적인 페미니스트였습니다. 이 점은 분명해요. 하지만 그는 남성판 글로리아 스타이넘 같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그는 사회운동가보다는 근대 이전의 말 탄 기사같습니다. 중세였다면 적당한 귀부인을 하나 골라들고 그 귀부인의 명예를 위해 상대방 기사의 목에 열심히 칼질을 했을 사람이죠. 그의 페미니즘이 구식 여성 예찬에 새로운 옷을 입힌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예찬가들이란 꽤 이중적인 인간들입니다. 특히 여성 예찬가들이라는 친구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대부분 하늘 어딘가에 이상향을 모셔두고 거기에 피와 살로 이루어진 진짜 여자들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현실 세계에서 지독한 여성 혐오자가 되는 친구들도 바로 그런 예찬가들입니다.

스토커가 자신의 이성으로 다진 건전한 상식과 철학에도 불구하고 [드라큘라]가 그렇게 끈끈한 소설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죠. 특히 초반에 등장하는 드라큘라의 세 신부들을, 흡혈귀로 변한 루시를 보세요. 그가 여성의 육체에 느꼈던 혐오와 매혹, 죄의식이 철철 넘쳐흐릅니다. 그는 마치 꽃병을 깨뜨린 어린 소년이 깨진 조각들을 옷장 밑에 숨기듯이 그런 '지저분한' 여성 이미지의 목을 자르고 입에 마늘을 채워넣고 심장에 말뚝을 박습니다. '반여성성'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족이 그렇게 재미있는 이유도 모든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의 진짜 재미도 바로 그 중간 지점에, 자신의 욕망과 이성이 충돌하는 그 지점에 존재합니다. 그 양쪽 중 하나라도 버린다면 이 소설을 절반밖에 즐길 수 없을 거예요. (9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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