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I Am Legend (1954)

2010.03.13 21:59

DJUNA 조회 수:3837

Richard Matheson (글)

전 세계 사람들은 모두 정체불명의 질병에 감염되어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오로지 주인공 한 명뿐입니다. 지구 최후의 남자인 우리의 주인공은 이제 파멸한 문명의 잔해 속에서 엄습해오는 고독과 싸우면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칩니다....

...로, 리처드 매서슨의 고전적인 호러물인 [나는 전설이다 I Am Legend]는 시작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책은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 The Last Man]에서 시작된 인류종말물의 하나처럼 보이며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리처드 매서슨은 여기에 약간의 변화를 가합니다. 로버트 네빌이 지구 최후의 인간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혼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감염되어 죽은 이웃들이 밤마다 그의 피를 빨려고 기어나오니까요. 그 이웃들은 햇빛을 견뎌내지 못하고 거울과 십자가를 두려워하며 마늘 냄새에 질겁하고 도망칩니다. 그들 덕에 로버트 네빌의 삶은 더욱 끔찍해집니다. 낮이 되면 그는 말뚝을 들고 시체들을 학살합니다 (그들을 죽이는 유일한 방법은 심장에 나무 말뚝을 박는 것입니다.) 밤이 되면 그는 마늘과 거울로 집을 무장하고 죽은 이웃들이 그를 향해 질러대는 저주의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네, 매서슨은 지금 흡혈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전설이다]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흡혈귀 소설 중 하나입니다. 물론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능가할 수는 없죠. 하지만 셰리단 레파누의 [카밀라]나 앤 라이스의 흡혈귀 연대기의 명성과는 거의 맞먹습니다. 세월이 어떻게 흐르건, 이 작품이 가장 중요한 흡혈귀 소설 중 하나로 남을 것이라는 건 확실하죠.

하지만 [나는 전설이다]는 발표 초기에는 SF로 분류되었고 광고도 SF 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반전 도형을 보듯 약간 보는 방식을 바꾸면 이 소설은 SF에 딱 들어맞습니다. 이 소설의 시대 배경은 1976년. 소설이 쓰여진 해가 1954년이니 미래 소설인 셈입니다. 그리고 매서슨은 어떻게든 흡혈귀들의 존재에 과학적인 설명을 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네빌이 소설의 삼분의 일을 할애하며 하는 짓이 버려진 도서관에서 과학책들을 읽으면서 그들의 존재를 나름대로 설명하는 것이니까요. 이 소설의 흡혈귀들은 드라큘라처럼 초자연적인 괴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정체모를 혈액병에 감염된 사람들입니다. 네빌은 혈액병으로 마늘 혐오증과 햇빛에 대한 공포를 설명합니다. 심리학적 질환으로 거울과 십자가를 설명하고요. 심지어 그는 말뚝을 박으면 시체가 가루로 분해되는 과정까지 설명합니다. 물론 날고 기는 그라도 총맞고도 멀쩡하게 살아나는 불사신 몸과 같은 것들은 해결하지 못하지만 소설이 끝날 무렵에는 로버트 네빌은 흡혈귀 혈액병의 유일한 전문가가 되어 있습니다.

흡혈귀를 과학적인 현상으로 설명하는 리처드 매서슨의 방식은 그 후로도 다른 많은 작가들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17세기 영국을 동유럽의 흡혈귀가 정복한다는 이야기인 브라이언 스테이블포드의 [공포의 제국 The Empire of Fear]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뱀파이어 헌터 D] 시리즈도 매서슨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죠. 외계에서 온 흡혈귀 영화인 토브 후퍼의 [라이프포스 Lifeforce]도 비슷한 아이디어를 변형시킨 것입니다. 모두 [나는 전설이다]의 후손들이죠.

그러나 [나는 전설이다]는 SF라기보다는 흡혈귀 소설이며 공포 소설입니다. 과학적 설명은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소설의 핵심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설명은 공포를 극복하고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네빌의 심리 묘사에 더 유용합니다.

[나는 전설이다]는 '무섭습니다.' 그건 소설에 잔혹한 묘사가 나오기 때문도 아니고 흡혈귀들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괴물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네빌을 포위하는 공포는 그처럼 일차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흡혈귀들이 바리케이트를 뚫고 들어올 거라는 건 참을 수 있습니다. 흡혈귀들이 혈액병을 앓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그들도 드라큘라처럼 공포스러운 존재는 아닙니다. 무섭지만 미신적인 공포는 사라지죠. 문제는 네빌의 삶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삶을 끝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공포. 네빌이 아무리 잘 버틴다고 해도 구조선 같은 게 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런 끔찍한 삶을 반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흡혈귀한테 물려 그들의 일원이 되는 길을 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병원체에 면역이 되어서 그들의 일부가 되지도 못합니다. 그런 끔찍한 삶을 살면서도 그는 자살도 하지 못합니다. 로버트 네빌의 삶은 시지프스와 단테의 지옥을 결합한 것만큼이나 지독합니다.

매서슨은 기가 막힌 새디스틱한 터치로 끝도 없이 네빌을 자극합니다. 아마 가장 끔찍한 부분은 개에 대한 이야기일 겁니다. 네빌은 근처에서 흡혈귀가 되지 않고 살아남은 개를 발견합니다. 한없는 인내와 노력으로 그는 개를 집 안에 불러들이지만 그만 그 개는 병에 걸려 죽고 맙니다. 개 한 마리에 그가 퍼부은 그 엄청난 희망이 잔인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망가지는 것이죠.

소설의 말미에는 나름대로 희망이라고 할만한 것이 제시됩니다. 혹시나 원서를 읽을 분들을 위해 이 부분은 덮어두는 편이 좋겠군요. 하지만 그것이 네빌의 희망은 아니라는 점은 말해도 될 듯합니다. 매서슨이 제시한 미래의 희망에는 지금까지 그가 쏟아부은 새디즘을 능가하는 고약한 아이러니가 묻어 있습니다. 세상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지구상에 가득한 흡혈귀들을 바라보며 '나는 전설이다'라고 자조할 수밖에 없는 고약한 아이러니. (00/07/07)

기타등등

[나는 전설이다]는 두 차례 영화화되었습니다. 첫 번째 영화는 빈센트 프라이스가 주연한 등장하는 [지구 최후의 인간 The Last Man on Earth]이고 다른 하나는 찰턴 헤스턴이 주연한 [오메가 맨 The Omega Man]입니다. 영화로서는 [오메가 맨]이 조금 더 유명하지만 둘 다 원작만큼의 평가는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후에 나온 수많은 좀비 영화들에 더 큰 영향을 준 듯 해요. 좁은 집에 갇힌 사람이 사방에 손을 뻗어대는 죽은 자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이미지는 찰턴 헤스턴 주연의 SF 영화보다는 조지 로메로의 좀비 시리즈를 연상시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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