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 이즈 블라이스 This is Blythe (2000)

2010.03.17 00:32

DJUNA 조회 수:3487

Gina Garan (글/사진)

1.

1972년, 신시네티의 케너 완구회사에서는 블라이스(우리나라에서는 일본식 발음 브라이스로 알려져 있지만 보다 가까운 표기를 따르기로 하죠)라는 패션 인형을 선보였습니다. 몸에 비해 굉장히 큰 머리와 뒤통수에 달린 줄을 잡아당겨 색깔을 바꿀 수 있는 눈이 특징이었던 이 인형은 결코 케너 완구회사의 최대 히트작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히트가 뭐예요. 이 인형은 겨우 1년밖에 생산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었거든요. 이해가 가요. 블라이스는 꽤 무섭게 보일 수도 있는 인형이니까요. 블라이스의 산더미 같은 머리에 달린 커다란 눈은 거의 괴기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블라이스는 조금씩 인형 수집가들의 지하 세계에서 조용한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블라이스의 괴상한 외모는 성인 수집가들의 컬트 붐을 조성할만 했습니다. 1년만에 단종된 인형이어서 어느 정도 희소성이 생겼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되겠지만요.

이런 팬들 중에는 뉴욕의 사진 작가이며 비디오 프로듀서인 지나 가란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친구가 가란 자신과 닮은 인형이 하나 있다고 말한 뒤부터 블라이스에 관심을 가졌다고 해요. 블라이스에 푹 빠진 가란은 몇 년 되지도 않은 기간 동안 200개의 오리지널 블라이스 인형을 수집했습니다.

가란이 사진 모델로서 블라이스의 가치를 인식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어느 날 가란은 벽장에서 발견한 낡은 카메라를 실험하기 위해 옆에 있던 블라이스 인형을 가지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찍었는데, 생각외로 결과가 좋았던 것입니다. 가란은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수천 장의 블라이스 사진들을 찍어대기 시작했고 그 사진들의 일부는 2000년에 책으로 묶여져 나왔습니다. 그게 오늘 소개할 책인 [디스 이즈 블라이스 This is Blythe]죠.

2.

[디스 이즈 블라이스]는 한마디로 인형놀이의 기록입니다. 가란은 블라이스를 정말 온갖 방법으로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어떤 사진에서 블라이스는 수녀입니다. 하지만 바로 앞 페이지에서는 불길한 붉은 조명 속에서 악마처럼 오렌지 빛 눈을 번뜩이고 있지요. 블라이스는 모험가이고, 안경낀 새침때기 예술 애호가이고, 디스코걸이고, 히피이고, 에디트 피아프 풍의 샹송 가수이고, 산타 클로스의 무릎 위에 앉아있는 어린 소녀이기도 합니다.

블라이스의 이런 변신은 어린아이들을 질겁하게 했던 블라이스 고유의 특징에서 나옵니다. 바로 커다란 머리에 달린 큰 눈 말입니다. 블라이스의 눈은 색과 보는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 간단한 조작은 이 플라스틱 인형에 엄청나게 다양하고 풍부한 표정을 부여했습니다.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이었지만 표현폭이 굉장히 넓었던 셈이죠.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얼굴 역시 이런 오묘한 표정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블라이스는 사진작가에게 이상적인 인형이었습니다.

가란이 블라이스와 함께 만들어낸 세계는 익숙하면서도 기괴합니다. 책은 블라이스의 플라스틱 느낌과 70년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화사하고 야한 파스텔 색조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인형 사진에서 기대할만한 바로 그런 분위기죠. 하지만 블라이스는 이런 파스텔 색조의 세계에 일종의 귀기를 부여합니다. 이 인형은 반쯤 살아 있는 것 같고, 조용히 자기만의 어떤 존재감을 주장하고 있어요. 지나 가란이, 자기가 블라이스의 '내면의 미'에 매혹되었다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가요.

덕택에 가란의 인형놀이는 어느 선에서부터 초현실주의적이 됩니다. 엄청 머리가 크고 괴상하게 생긴 작은 휴머노이드가 마치 숨어사는 요정처럼 인간 세계를 돌아다니며 우리와 우리 문화를 흉내내는 거예요. 블라이스의 일관된 강한 개성 때문에 가란의 사진들은 어떨 때는 신디 셔먼의 자화상 사진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독자들은 무언가 감추고 있는 듯한 블라이스의 커다란 눈을 들여다보며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의미를 찾게 되지요. 우리가 결국 마주치는 것은 예쁘장한 패션 이미지로 장식된 섬뜩한 공허함이지만 말입니다.

3.

가란의 책은 지금까지 소수의 독점물이던 블라이스의 인기를 인간 세상으로 끌어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이 괴상한 미국 인형의 인기는 굉장했습니다. 당연한 것 같아요. 블라이스의 모습은 은근히 일본 취향에 맞았으니까요. 블라이스의 동그란 머리와 커다란 눈은 어떻게 보면 일본 만화 주인공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요? 하여간 타카라사에서 작년부터 블라이스의 복제판 인형을 내기 시작한 것도 자국내의 인기 때문이었습니다. 심하면 몇 천 달러까지 올라가는 오리지널을 구입하지 못하는 가난한 수집가들에겐 멋진 소식이었지요.

가란은 인형놀이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디지탈 카메라로 찍은 자기만의 블라이스 사진들을 인터넷에 꾸준히 올리고 있는 블라이스의 팬들은 모두 가란이 닦아놓은 길을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0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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