덱스터의 실험실 Dexter's Laboratory (1996- 2003)

2010.03.17 22:33

DJUNA 조회 수:9986

출연: Christine Cavanaugh, Candi Milo, Allison Moore, Kathryn Cressida, Angela Tong, Kath Soucie, Bernard Tan, Jeff Bennett, Eddie Deezen, Kimberly Brooks, Frank Welker, Rob Paulsen

1.

1991년,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Arts)의 2학년생이던 애니메이터 겐디 타르타코프스키는 덱스터라는 천재 소년과 디디라는 누나를 주인공으로 한 짧은 애니메이션 단편을 학교 과제로 완성했습니다. 4년 뒤인 1996년 4월, 타르타코프스키는 같은 설정에 기반을 둔 단편 'Changes'를 카툰 네트워크의 [What A Cartoon Show]에서 데뷔시켰지요. 이 작품에 대한 반응이 좋자 같은 주인공들이 나오는 단편 'The Big Sister'가 그 뒤를 이었고요. 당시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고려 중이던 카툰 네트워크에서는 그에게 시리즈를 제안했고, 같은 해에 [덱스터의 실험실]은 카툰 네트워크 최초의 오리지널 시리즈로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덱스터의 실험실]의 설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덱스터는 이등신에 늘 하얀 실험복을 입고 다니며 정체불명의 외국어 악센트를 쓰는 초등학생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 발명가인 덱스터는 부모 몰래 교외 주택가에 있는 자기 집 지하에 거대한 실험실을 숨겨 놓고 있지요. 문제는 가족 중에 덱스터의 실험실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누나 디디가 툭하면 덱스터의 실험실로 들어와 그의 실험을 망쳐놓는다는 것이죠. 나중에는 덱스터와 같은 비밀 실험실을 가진 또다른 천재 맨닥이 등장해 덱스터와 대결을 벌이기도 합니다.

시리즈 초반엔 다른 주인공들을 내세운 두 편의 단편들이 삽입되었습니다. 하나는 덱스터의 실험용 원숭이가 수퍼 히어로가 되어 활약한다는 'Dial M For Monkey'이고 다른 하나는 전형적인 미국 만화 수퍼 히어로들이 같은 아파트에서 룸메이트로 살면서 아옹다옹한다는 내용의 시트콤인 'The Justice Friends'입니다. 요새 이 단편들은 그렇게까지 자주 만들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2.

[덱스터의 실험실]의 드라마를 지탱하는 등뼈는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성격의 남매인 덱스터와 디디의 갈등입니다. 이들의 대결은 단순히 남매간의 성격차로 볼 수 없을만큼 거창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요.

우선 덱스터를 보죠. 그는 만화광인 남자아이가 자신의 환상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엄마아빠 몰래 거대한 비밀 실험실을 꾸며놓고 그 안에서 자기가 원하는 어떤 종류의 거대한 기계들도 만들어낼 수 있잖아요. 덱스터는 툭하면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대 로봇, 수퍼 컴퓨터, 우주선을 등장시킵니다.

재미있는 건 [덱스터의 실험실]이 가장 자주 다루는 소재가 덱스터의 좌절이라는 것입니다. 온갖 수퍼 장난감들을 동원한 덱스터의 계획은 종종 아주 하찮은 변수 때문에 허망하게 망가집니다. 특히 덱스터가 보기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여자아이'인 디디한테요.

디디는 어떻게 보면 덱스터를 능가하는 괴물입니다. 이 캐릭터는 성차별주의자인 여덟살 소년이 상상할만한 부정적인 여자아이 이미지를 극대화시킨 것입니다. 디디의 방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핑크색이며 봉제인형이나 인형의 집과 같은 '여자아이들'의 장난감들로 가득합니다. 당연히 그 안은 핑크색 벌레들로 형상화된 쿠티(cootie)들에 감염되어 있고요. 극단적인 타자화 때문에 디디는 종종 인간이 아닌 다른 종류의 동물처럼 보입니다. 디디의 파란 눈은 종종 인간적인 복잡한 감정이 결여되어 있어 섬뜩하고 긴 다리를 놀리며 콩콩 뛰어다니는 동작은 인간보다는 캥거루나 공룡을 연상시키지요.

그 결과 이들의 이야기는 이중적이 됩니다. 우선 덱스터에게 이 이야기는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한 인간과 디디로 상징되는 혼란스러운 자연의 대결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대립이 성차별주의자인 남자아이의 시선에 고정되어 있고 그 화자의 우스꽝스러움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 대결에서 비판의 화살은 오히려 덱스터에게 향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덱스터의 실험실]은 덱스터로 상징되는 현대 서구 기계 문명에 대한 비판일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비판에만 매달리다 보면 이 시리즈의 매력을 놓치게 됩니다. [덱스터의 실험실]은 오히려 타르타코프스키의 어린 시절이 반영되었음이 분명한 덱스터라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통해 어린 시절을 조용히 회상하는 느낌이 더 강한 작품이니까요. 이 시리즈의 기조를 이루는 유머는 '회고조의 자조'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3.

[덱스터의 실험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스타일입니다. 이 시리즈에는 한나-바버라의 2차원적인 무덤덤함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창한 감수성과 테크닉이 섞여 있습니다. 단지 그 결합은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시청자라도 [덱스터의 실험실]의 원작자가 몇 살인지 맞힐 수 있을 겁니다(그는 70년생입니다.) [덱스터의 실험실]에는 타르타코프스키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 영향을 받았을 법한 대중 문화의 요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 이 작품이 아이들보다 타르타코프스키 나이 또래의 어른들에게 더 잘 먹힐 거라는 생각을 해요. [미녀 삼총사]와 같은 70년대 시리즈나 [스피드 레이서] 같은 구식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억은 덱스터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겐 없을테니 말입니다.

[덱스터의 실험실]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모순되는 두 요소의 충돌입니다. 위에 예로 든 한나-바버라와 일본 애니메이션은 시리즈 전체를 지배하는 수많은 충돌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성적인 과학 숭배자인 천재 소년 덱스터와 반쯤 정신나간 발레 애호가인 디디, 그들이 살고 있는 거의 모범적인 도회지 주택가와 SF 만화에나 나올 법한 덱스터의 거대한 실험실, 차갑고 냉정한 유머를 바탕에 깔고 있는 부풀려말하기(overstatement)... [덱스터의 실험실]이 가장 [덱스터의 실험실]다울 때는 이런 긴장이 최고도에 달했을 때입니다.

그 결과 겐디 타르타코프스키 특유의 독특한 리듬감이 태어납니다. 소박하고 어린아이다운 소재를 장엄하고 거창한 긴장감으로 끌어가다가 어처구니없고 허무한 결말로 갑자기 끊어버리는 게 그의 대표적인 수법 중 하나죠. 아니면 반대로 시시한 남매간의 갈등을 별다른 속도 조절없이 전우주적인 파국으로 확장하거나요. 극단을 오가는 소재와 스타일 속에서 다양한 호흡의 영화적 리듬을 찾아내는 타르타코프스키의 재능은 이 시리즈를 통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덱스터의 실험실]은 겐디 타르타코프스키라는 '오퇴르'의 첫 발자국이었습니다. 그가 [덱스터의 실험실], [파워 퍼프 걸], [사무라이 잭]과 같은 일련의 시리즈를 통해 쌓아온 예술적인 성과는 조스 위든이나 크리스 카터와 같은 TV 스타들의 업적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타르타코프스키의 개성은 곧 개인의 스타일을 넘어서 카툰 네트워크라는 채널의 성격을 규정하기까지 했지요. 그리고 그 영향력은 채널을 넘어 점점 확장되고 있는 중입니다.

[덱스터의 실험실]은 아직도 계속 새 에피소드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크리스틴 카바나와 같은 오리지널 성우들은 이미 쇼를 떠났고 크리에이터인 타르타코프스키도 신작인 [사무라이 잭]에 더 집중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까지 [덱스터의 실험실]이 거둔 성과만으로도 이 작품의 중요성은 과소평가될 수 없습니다. (03/06/16)

기타등등

1. 디디의 모델은 겐디 타르타코프스키의 형이었던 알렉스라더군요.

2. 첫번째로 덱스터를 연기했던 크리스틴 카바나는 [베이브]에서 베이브의 목소리를 연기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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