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 (2003-2004)

2010.03.20 20:28

DJUNA 조회 수:7901

출연: 이영애, 양미경, 견미리, 홍리나, 여운계, 박은혜, 이잎새, 김소이, 최자혜, 지진희, 임현식, 금보라, 박정수, 신국, 조경환, 이희도, 김여진, 한지민, 이세은, 김민희, 이승아, 맹상훈, 박은수, 전인택, 지상렬, 김혜선, 박찬환, 임호, 박정숙, 조정은, 이세영

파프리카 [대장금]은 중종 시절 궁중 의녀였고 실록에서도 몇 차례 언급이 되어 있는 장금이라는 인물로부터 출발합니다. [중종실록]의 언급이 워낙 적고 모호하기 때문에 이 인물에 대한 의견은 상당히 엇갈리는 편입니다. 제작진은 임금의 주치의였고 '대장금'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가정하에 이야기를 풀고 있지만, 장금이라는 의녀가 그렇게 큰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대장금'이라는 명칭도 단순히 동명이인을 구별하기 위함이라는 반론도 있습니다. 저한테는 반론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만.

듀나 흔해빠진 이름과 의녀라는 직위만 빼면 전적으로 허구적 인물이니 이야기의 씨앗만 되어줄 수 있다면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시청자들도 그 모든 이야기들이 과장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를 과장하는 것과 시작부터 사료를 과장해 해석하는 것은 같지 않지요. 만약 '대장금'이 단순히 '다른 장금이보다 몸집이 조금 더 큰 장금'이었다면 괜히 제목이 이상해지지 않겠어요? 개별 사건이 아니라 일반적인 언어습관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이건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시도이긴 했습니다. 우선 이 시도를 통해 지금까지 높은 양반들의 거창한 이야기 속에 묻혀져 있던 궁중 생활사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 수많은 허구들이 동원되었고 종종 분명한 사실들이 왜곡되기도 했지만, 새로운 소재를 찾는 시도 자체는 언제나 칭찬받을만한 것이죠. 그 결과, 진부한 궁중사극의 무대를 그대로 쓰면서도 지금까지 시청자들이 접하지 못했던 아주 신선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되고요. 수라간이나 내의원 같은 무대야 당연한 것이니까 넘어간다고 해도, [대장금] 이전에 무시무시한 감찰 내시들의 활약을 이처럼 확실하게 보여준 사극이 있었던가요?

실록에 이름 두 자만 달랑 적혀있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상당히 생산적이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갇힐 수밖에 없는 다른 궁중사극들과는 달리 작가의 상상력이 뻗을 수 있는 범위가 훨씬 넓었으니까요. 건조한 사실만 다루었다면 인기있었던 1부의 수라간 이야기는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어느 정도 통쾌하기도 했어요. 음식을 만들고 사람을 고치는 것 같은 진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치가들이나 왕족 따위들을 밀어내고 전면에 등장했으니까요. 특히 초반부 에피소드들의 형식은 재미있었죠. 폐비윤씨의 죽음, 갑자사화, 중종반정과 같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순전히 수라간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위한 보조 도구 역할을 하고 있었잖아요.

파프리카 이병훈 PD의 전작인 [허준]도 그런 면에서는 다를 게 없었지요. 그 드라마가 다룬 허준의 이야기는 대부분 허구였으니까요. 정도의 차이일 뿐, 허준도 전기자료가 부족한 건 마찬가지거든요.

듀나 음... 전 거기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시리즈는 거의 못 봤으니까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전 10여년 동안 국내 텔레비전 연속극들을 제대로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제 성격 알잖아요. 중간에 에피소드 하나라도 빼먹으면 정신이 나가는 거. [대장금]도 인터넷 VOD가 없었다면 시작도 안했을 걸요.

파프리카 그래도 [허준]보다 [대장금]의 스토리 자유도가 더 컸던 건 사실이에요. 허준도 이야기는 굉장히 멜로드라마틱했지만 [대장금]만큼 허구의 재미를 과시하지는 않았거든요. 위대한 '실존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예의를 차리려 했던 [허준]과는 달리 [대장금]은 정말 막나갑니다.

듀나 저에게 가장 재미있는 건 이 시리즈가 굉장히 장르적이라는 거예요. [대장금]에는 수많은 장르 관습과 공식들이 조각조각 담겨있습니다. 호레이쇼 앨저식 성공담이고 [몬테 크리스토 백작]식 복수담이고 기숙사 학교물이고 추리물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협물에 스포츠물에 메디컬 드라마에 요리쇼이기까지 하지요.

이 중 형식적으로 가장 비중이 큰 건 추리물의 성격입니다. 보양닭죽 사건, 장맛 사건, 유황오리 사건, 돌림병 사건과 같은 이야기들은 모두 아주 전형적인 추리물의 구성을 따르고 있습니다. 특히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인 유황오리 사건의 결말은 거의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따온 것처럼 형식적이지요. 모든 용의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뒤 증거들을 하나씩 검토하고 끝에 가서 결정적인 증인이 등장하고...

파프리카 그런데 전 최씨 일가와 오겸호가 궁지에 빠지는 그 부분을 보면서 크리스티보다는 다른 작가가 떠올랐거든요?

듀나 혹시 더실 해미트 아닌가요?

파프리카 네, 내의정의 유언장이라는 힌트를 던져놓고 적수들이 서로를 물어뜯게 내버려두는 방식은 [피의 수확]과 다를 게 없잖아요. 작가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지만... 또 모르지요.

듀나 영향을 준 게 해미트건, 크리스티건, [대장금]의 재미 중 상당부분은 이런 장르적인 익숙함에서 나옵니다. 명탐정이 마지막 강의를 끝내고 "당신이 범인이야!"를 외칠 때, 장르 독자들이 느끼는 흥분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이 시리즈가 덜 뻔해보였던 건, 따로 떼어놓고 관찰하면 거의 인위적으로 보일 정도로 순수한 장르적 요소들이 다른 것들과 함께 잡다하게 섞여있고 그 이야기들이 궁중 수라간과 내의원이라는 낯선 배경에서 전개되기 때문이죠. 교묘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효과적인 상호보완이에요.

인물 묘사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해요.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비교적 효과적이었다는 거죠.

일단 주인공인 장금이를 봐요. 아무리 봐도 개성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장금이는 실력있고 착하고 똑똑하고 똘똘합니다. 그게 전부예요. 물론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추가한 다른 자잘한 면들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장금이의 성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실력있고 착하고 똑똑하고 똘똘하다는 것입니다. 완전 바비 인형이에요. 바비에게 의사 가운을 입히면 일류 의사가 되는 것처럼 장금이에게 궁녀 옷을 벗기고 의녀 옷을 입히면 일급 요리사에서 천재 의사로 변신합니다. 물론 '노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한 목표에 전념하는 성격 역시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장금이의 성장기 역시 아주 단순하고 모범적입니다. 장금이는 한상궁, 정상궁, 장덕, 신익필과 같은, 다양한 능력의 모범적인 스승을 만나 그들에게서 좋은 것들을 배우고 유능한 전문가로 성장합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종종 그러는 것처럼 가끔 자기 잘난 맛에 빠지지만 한상궁이나 신익필같은 사람들이 그 성품을 교정해주고요. [대장금]의 목표는 한 재능있는 어린 소녀가 훌륭한 성품의 전문가가 되는 최선의 길을 그려보이는 것입니다. 장금은 사실적인 캐릭터라기보다는 이상적인 롤 모델입니다.

장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편'의 중요한 인물들은 모두 도구적 가치에 의해 저울질됩니다. 한상궁, 정상궁, 장덕, 정운백, 민정호와 같은 '우리 편'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이 선량하고 정도를 걸으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대부분 심란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싸움을 벌이지만 중간에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지도 않고 엄청난 성격 변화도 겪지 않습니다. 그들은 잠시 좌절하더라도 곧 오뚜기처럼 일어나 자기 길로 돌아갑니다. 참 단순한 사람들이에요.

이런 설정은 당혹스러워요. 시리즈의 당황스러울 정도로 실용적인 기획의도만큼이나요. 하지만 주인공들의 단순한 성격을 꼭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관객들이나 시청자들이 감정이입을 쉽게 할 수 있는 등장인물들은 어느 정도 무개성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과연 그렇게 개성적인 인물들인가요? 아니잖아요. 반대로 아주 개성적인 인물인 경우, 우린 그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는 대신 관찰자가 됩니다. 폴스타프를 보세요. 그는 너무나도 재미있는 인물이지만 관객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봤을 때처럼 그에게 철저하게 감정이입하지는 않습니다. 밖에서 보는 게 훨씬 더 재미있으니까요.

아까 장금이를 바비 인형에 비교했는데, 바비 인형이 성공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바비를 가지고 놀면서 그 무개성적인 아름다움 속에 자신을 투영합니다. 장금이의 역할도 같습니다. 장금이는 적당히 우리가 자신을 투영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이지만 우리보다 훨씬 나은 어떤 존재입니다.

파프리카 결국 장금은 '정치적으로 공정한' 백설공주나 신데렐라라는 말이네요.

듀나 네. 하지만 [대장금]은 충분한 회색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우린 당연히 장금이를 따라갑니다. 주인공이고 가치있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진짜 우리가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들은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하는 선량한 기회주의자인 민상궁이나 창이같은 작은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들은 희극적이고 단순하지만 저 높은 곳에서 독야청청하는 장금이보다는 우리와 훨씬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서 '회색빛 고뇌'가 가장 사실적일 때는 '우리 편'보다는 악당들을 묘사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파프리카 [대장금]에서 '악당들'은 둘로 나뉘지요. 최판술이나 오겸호는 그냥 타락한 악당들입니다. 철저하게 이차원적인 인물들이지요. 시청자들은 이들을 싫어할 뿐 그들에 대해 특별히 신경쓰지는 않습니다. 스토리를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잖아요. 하지만 최상궁과 금영과 같은 인물들은 달라요. 이들은 처음부터 '악한'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주변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선택한 이들이지요.

그 때문에 이들은 입체적이 됩니다. 자기 때문에 다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과 민정호에 대한 금지된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금영을 보세요. 조금 영재 교육 지침서처럼 느껴지는 장금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건 진짜 드라마입니다.

듀나 그런 사실적인 갈등 때문에 캐릭터의 명암이 강해지기도 하죠. 이를 박박갈면서 오겸호나 최판술을 증오하는 사람들은 생각 외로 많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최상궁은 그런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이해하고 심지어 어느 정도 동정까지 하기 때문이지요. 도식적으로 그려진 관념적인 악은 우리에게 대단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최상궁과 같은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는 현실적인 악은 사정이 다르지요. 우린 그 비뚤어진 힘이 무엇인지 알고있고 그 질감을 느낍니다. 당연히 훨씬 강하게 반응하게 되죠. 이건 거의 조건반사와 같답니다.

파프리카 금영의 태도는 참 재미있습니다. 금영은 최씨 가문의 음모에 대해 처음 알았을 때 심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자긴 그런 것 따위에 가담할 필요 없어요. 정당하게 원하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만큼 잘났거든요. 그런 음모에 가담하는 건 자신이 얼마나 못났는지 인정하는 게 아니겠어요?

어쩔 수 없이 음모에 가담하면서 금영은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억지로 이름을 붙이자면 '페리클레스 신드롬'이라고 할까요? "좋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옳지 못한 방법을 쓰겠어. 하지만 내가 일단 자리를 차지하면 이 모든 것들을 바로 잡을 거야." 실제로 금영은 그렇게 합니다. 최고상궁이 되면서 한상궁의 교육방식을 도입하니까요.

그러나 금영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사용했던 도구가 자신의 발목을 잡아버렸으니까요. 정치적 수단은 언제까지 단순한 도구로 남지는 않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 방법을 사용한 사람을 지배해버리게 되지요.

듀나 그렇다고 우리에게 선택의 폭이 넓은 건 아니죠. 아까도 제가 말했지만 우리에게 위협적인 건 순수한 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을 손쉽게 유혹하는 현실적인 타락입니다.

타락한 사람들을 증오하고 경멸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이런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특별히 다를 게 없습니다. 단지 유혹의 대상이 더 가까이에 있고 정말 그것을 쟁취하고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을 뿐이죠.

언젠가 장금이가 직장 동료라면 왕따 일순위일 거라는 기사가 난 적 있습니다. 세상에 그처럼 당연한 일은 없을 거예요. 세상의 공식적 규칙은 우리가 지키기 쉽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씩 타락해 있고 비슷하게 타락한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을 보호합니다. 사람들이 '둥글게 산다'라고 하는 게 바로 그런 거죠. 당연히 그런 것 따위에 의존할 필요없는 장금이와 같은 불굴의 천재는 무섭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편안한 세계를 위협하니까요.

최상궁과 금영의 이야기가 비극적 색조를 띠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거예요. 그들은 한상궁이나 정상궁보다 비극 주인공의 고전적 정의에 더 잘 들어맞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결함에 의해 멸망하는 고결한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이 몰락한 게, 그들이 완전무결한 악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재미있지 않나요? 최상궁이 한상궁이나 금영이의 애원을 뿌리치고 정말 매정하게 장금이와 민정호를 처리했다면 이렇게 망하는 일은 없었겠죠.

파프리카 로맨스의 측면을 보더라도, 진짜 주인공은 금영이지, 장금은 아니지요. 금영과 민정호의 이야기는 알짜배기 로맨스입니다. 사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굴복시키고 죽여야 할 남자를 사랑한 한 여자의 이야기말이에요. 민정호를 몰아세울 음모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금영이, 민정호를 만나 "그런 궁녀가 있었다고 여겨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술을 따라주고 그에 대한 정을 끊으려 하는 장면은 정말 찡했지요. (대사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빌려온 것 같아서 조금 덜 신선했지만요.) 금영과 민정호의 마지막 이별 장면도 맘에 참 와닿았어요. 할 말이 없어 그냥 "송구합니다"라고만 말하는 민정호를 돌아보며 금영이 차갑게 내뱉잖아요. "다음 생에 만나지면 그 말만은 빼고 해주십시오." 멋있었어요.

장금은 금영과 정반대였지요. 장금은 민정호를 얻기 위해 아무 것도 한 게 없습니다. 민정호는 언제나 장금 옆에 있었고 장금이 원하는 건 힘이 닿는 대로 모두 다 해주었거든요. 장금에게 민정호는 옆에 있어서 무지 편리한 존재 이상은 아닙니다. 고민이 없고 갈등이 없으니 로맨스가 약할 수밖에 없지요.

듀나 차라리 [코미디 하우스]의 [대장금] 패러디인 [장금아, 장금아]에 나오는 짝퉁 장금과 민정호가 훨씬 더 커플처럼 보였어요. 1대 아유미 때는 너무 어려보였고 3대 하리수 이후로는 지나치게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적응이 힘들었지만 2대인 서민정이 나올 무렵엔 상당히 그럴싸했지요. 왜냐고요? 패러디 코미디에서는 던져진 설정을 과장해서 연기하기만 하면 돼요. 하지만 드라마의 경우 그 설정을 이치에 맞게 설명해야 하거든요.

시리즈는 어떻게든 장금이와 민정호의 로맨스에 불을 당기려 했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았지요. 아무리 운명적 만남과 우연의 일치들을 채워넣고, 끝도 없이 옆에 붙여두면서 툭하면 닭살 모드로 전환해도 도대체 깊은 분위기가 안 나는 걸 어떻게 해요? 심지어 둘의 쉬퍼들은 한동안 민정호를 죽이자는 캠페인까지 벌이지 않았던가요? 그렇게라도 한다면 둘의 로맨스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어보일 거라고 믿었던 거죠.

이들의 로맨스가 극중에서 의도했던 것만큼 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민정호의 캐릭터에 있었어요. 아까 전 장금이가 바비라고 말했습니다. 그 비유를 연장한다면 민정호는 켄이에요. 바비보다 더 밋밋하죠. 이 친구는 정말 아무런 개성도 생각도 고민도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관비로 내쳐진 궁녀에게 반한 양반 남자가 이렇게 결백한 연애를 할 수는 없어요. 가문에 대한 의무도 생각해야 하고 계급차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민정호는 그냥 장금이에게 몸을 던집니다. 이 친구의 우주의 중심은 장금이입니다. 장금이가 위기에 빠지면 보디가드처럼 나타나 구출하고, 장금이가 제주로 귀양가면 관직을 버리고 따라나서고, 장금이가 역병이 도는 마을에 갇히면 왕명 따위는 까맣게 잊고 마을에 뛰어들고, 장금이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몸에 착 달라붙는 야한 옷을 입고 폼폼을 흔들면서 "서나인, 잘하세!"를 외치는 거예요.

파프리카 그런 장면이 나왔었나요?

듀나 나왔던 것 같은데...

파프리카 장금과 민정호의 로맨스가 어색했던 건 그가 장금의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어서가 아닐까요? 특히 1부에서 민정호는 잠시 자매 프로그램에 게스트 출연하는 다른 시리즈의 주연같았습니다. 장금에게 책을 빌려준 뒤엔 잽싸게 스핀 오프 시리즈 [종사관 민정호]로 돌아가 와이어 액션을 할 것 같았어요. 민정호는 도대체 거기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어요.

듀나 하긴 이 이야기에 남정네를 자연스럽게 끼워넣기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대장금]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들의 이야기였으니까요. 남자들이 그렇게 평면적으로 그려졌던 것도 그들이 여자들의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도구 이상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어요. 민정호는 남자친구용 도구, 오겸호와 최판술은 악역용 도구, 강덕구나 조치복은 긴장해소용 코미디 도구, 중종은 물론 입맛 까다로운 기계장치의 신이었고요. 정운백이나 신익필과 같은 사람들이 그나마 어느 정도 입체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것도 직업상 장금이의 세계에 깊이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일 거고요. 하긴 그 사람들도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직장에 출근하기 시작한 뒤부터는 트위들덤과 트위들디처럼 비슷해졌지만요.

나머지 진짜 이야기들은 다 여자들의 몫이었어요. 하지만 다른 궁중사극들처럼 임금 고환에 축을 박고 벌이는 난투극은 아니었지요. 우리 편이건, 나쁜 편이건,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모두 자기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전문직 직업여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사랑, 증오, 우정, 연대감은 대부분 남자들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했습니다.

파프리카 여기서 슬슬 유명한 동성애 서브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은데요. [대장금]의 스토리가 한참 무르익자 시청자들은 장금과 한상궁의 관계에 단순한 사제간의 정 이상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참 입에서 입으로 떠돌던 소문은 [일다]에서 이를 서브텍스트로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물 위로 떠올랐어요. 그 뒤에 [씨네21]에서도 광고와 텔레비전 시리즈의 동성애 서브텍스트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장금과 '잠버릇이 수상쩍기 짝이 없는' 룸메이트 연생의 이야기를 다루기도 했고요. 하긴, 틈만나면 "내 몸 더듬으면 죽어!"를 외쳐대는 영로는 거의 동무들 앞에서 연생을 아우팅한 거나 다름없었잖아요.

듀나 전 왜 한상궁과 나인 박씨의 관계에서 서브텍스트를 파는 사람들이 없는지 궁금했어요. 둘의 관계는 장금이와 연생이 사이보다 훨씬 강렬했잖아요. 둘의 첫만남부터 로맨틱했고요. 아니, 어디선가 파고 있는데 제가 아직 모르는 걸까요?

궁녀들을 다룬 드라마에서 동성애 서브텍스트에 대한 분석이 나왔다는 건 그렇게 신기한 일이 아니죠. 오히려 지금까지 텍스트가 나오지 않았다는 게 어색하죠. 마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에 대한 다큐멘터리에 이성애자 팬들만 나오는 것처럼요. 궁중에서 궁녀들의 동성애는 드문 일이 아니었잖아요. 그러니까 사귄 지 오래된 나이든 궁녀 커플이 옆으로 쓱 지나가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는 거죠.

파프리카 김혜수가 주연이었던 [장희빈]에서 슬쩍 텍스트 위로 떠오른 적 있지 않았던가요?

듀나 그랬었나요? 전 모르죠!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라는 단어가 개입되자 괜히 질겁하거나 화를 냈는데,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죠. 이건 결국 텍스트가 아니라 서브텍스트니까 말이에요. 서브텍스트는 작가가 숨겨놓은 것일 수도 있지만 시청자나 관객들이 발명하거나 찾아내는 것이기도 하죠. [대장금]은 후자였을 거예요. 당연히 의사 모녀로 시작된 것인데, 어쩌다보니 그런 식으로 감정이 흘렀고 두 배우들의 연기도 그렇게 굳어진 것이겠죠.

중요한 건 장금이와 한상궁의 관계가 굉장히 로맨틱한 기반 위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거죠. 물론 둘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약간 위태롭게 보이기도 해요. 둘은 사제간이기도 하지만 의사 모녀 관계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감정의 흐름이 늘 설정집이 정의한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에요. 장금이와 한상궁의 관계는 아무리 딸과 어머니를 외쳐대도 일상적인 모녀 관계에서 살짝 어긋난 것처럼 보였어요. 유명한 "난 네가 필요해" 고백 때도 그랬지만 장금이가 슬슬 스승에게 맞먹기 시작한 뒤부터는 거의 노골적이었지요. 특히 1부 후반에서는 아무리 '어머니와 딸'을 공식적으로 내세워도, 전형적인 커플 전용 닭살 대사들("네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너와 함께 있으니 외롭지도 춥지도 힘들지도 않구나")과 잦은 신체 접촉 때문에 둘은 거의 공공연한 전희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의도적이었는지 궁금하군요. 당시 서브텍스트의 존재는 모두에게 노출된 상태였거든요.

둘의 관계는 장금이와 민정호의 관계와는 정반대였다고 할 수 있어요. 작가와 연출자는 처음부터 민정호 쪽으로 물길을 파주었지만 물은 조금 흐르다 늘 제자리에 고이기를 반복할 뿐이었어요. 하지만 장금이와 한상궁의 경우 준비한 물길을 넘어 저절로 흘렀어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건 보는 사람 맘에 달려 있겠지만요.

여기서 서브텍스트가 중요한 이유는 그런 관계들이 진짜 성적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들이 정말로 로맨틱한 것으로 해석되어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 시리즈에서 여성 캐릭터들간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종종 이들은 '내 단짝 동무의 딸'이나 '가문의 전통을 잇는 조카'같은 형식적 핑계들을 바탕에 깔고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관계는 동지애였고 자매애였어요. 신분이나 직위가 그들을 상하로 나누어도 그 관계는 뜻밖일 정도로 평등했고요. [대장금]은 이런 관계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한상궁과 박나인, 장금이와 한상궁, 장금이와 연생이, 장금이와 장덕, 장금이와 신비, 한상궁과 정상궁, 최상궁과 금영이... 여자 캐릭터들이 툭하면 임금 고환잡고 싸우기 게임의 멤버로 그려지는 궁중사극에서 이건 굉장히 신선한 즐거움이었지요.

파프리카 다른 궁중사극에서도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요. 예를 들어 전 저번 [장희빈]에서 숙빈 최씨와 인현왕후의 관계가 참 좋아보였거든요. 물론 주인공이 장희빈이니 여전히 고환잡고 싸우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최씨와 인현왕후의 관계도 어쩔 수 없이 수직적이었지만, 숙빈 최씨의 그 조건없는 애정은 인상적이었어요. 실제로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장금]의 성과는 여성간의 유대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전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 이상이었어요. 그런 형식적 시도 때문에 드라마가 더 재미있고 입체적이 되었다는 게 중요했지요.

아까 그 쪽에서는 이 시리즈의 평면적이고 무개성적인 캐릭터들과 위인전 스타일의 스토리 전개에 대해 지적했지요. 사실 이건 [대장금]만의 특성은 아니에요. 이병훈 PD는 전작인 [허준]과 [상도]에서도 거의 같은 스타일의 이야기를 했어요. 굉장히 뛰어난 '위인'이 모든 위기를 천재적으로 극복해내고 성공하는 이야기요. 그 때문에 [대장금]의 기획이 발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여성판 [허준]이냐고 빈정댔지요.

하지만 [대장금]은 여성판 [허준]이 아니었어요. 1부가 수라간을 다루었기 때문은 아니에요. 스토리 전개 방식은 같았으니까요. 중요한 건 무대가 궁녀들의 폐쇄적인 세계로 옮겨가면서 그 이야기의 느낌이 팍 달라졌다는 거였어요. 갈등은 보다 섬세해졌고 동기는 더 인간적이 되었지요. 그런 요소들은 바람에 쓸리는 잔물결처럼 고정된 설정에 영향을 끼쳤어요.

가장 중요한 건 이런 변화가 비교적 평면적으로 디자인된 캐릭터들에게 무언가를 더했다는 거예요. 한상궁이 대표적인 예지요.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한상궁의 기본 성격은 능력있는 원칙주의자이고 자애로운 스승이라는 재미없는 말들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어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만약 한상궁이 남자였다면 특별한 매력없는 기능적 인물로 남았겠지요. 주인공을 가르치고 복수의 동기를 마련해주는 도구로요.

그러나 진짜로 보면 한상궁은 그보다 훨씬 재미있습니다. 원칙주의자이지만 차갑지 않고, 억눌러 있던 숨은 감정은 종종 예고도 없이 튀어나와요. 일단 터져나온 감정에 대해서는 아주 솔직하고요. 이 모든 건 시작부터 의도되었던 건 아닙니다. 그냥 궁녀 세계의 섬세한 인간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진화한 것이지요. 단순한 모양의 나무 토막에 문양을 새기는 것처럼요.

서브텍스트가 재미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보통 우리나라 남자들은 일단 자신의 감정을 정의부터 하고 봅니다. 나이와 계급을 따져 상하 체계를 정하고 그 과정에서 같은 그룹 안에 속하면 친구가 되는 거잖아요. 그 다음에 생기는 감정들은 자동적으로 그 시스템 속에 통합됩니다. 하지만 한상궁이나 장금은 서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그런 식으로 통제하지 않았지요. 덕택에 사제간이나 모녀간의 정으로 단순히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지대가 생겨났고 그게 자연스럽게 서브텍스트로 이어졌던 거예요.

이런 모호함 때문에 처음부터 '모성'을 테마로 삼았던 작가의 의도(김영현 작가는 인터뷰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 '어머니'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대장금]의 핵심 주제라고 말했었죠)가 더 의미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대장금]에는 우리가 '모성'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떠올리는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감정의 강요가 없습니다. 캐릭터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가부장적 시스템이 강요하는 의무감에서 해방되어 있었거든요. 덕택에 서로에 대한 감정은 형식에 의해 재단되지 않았고, 그 자유로운 변형 과정을 통해 기계적인 모성 이데올로기의 독성이 어느 정도 제거되었던 거예요. [대장금]의 가장 큰 업적은 '모성'이라는 기계적인 관념 속에 갇혀 있던 여성적 감정과 에너지를 보다 보편적이고 긍정적인 힘으로 전환시켰다는 데 있지 않을까요?

긍정적인 관계만 그랬던 건 아닙니다. 한상궁과 최상궁, 장금과 금영의 라이벌 관계에도 그런 애증으로 얽힌 복잡한 관계들이 꿈틀거리고 있었지요. 아까의 물길 비유를 빌어온다면 모두 물이 원래 수로들에서 벗어나 조금씩 넘치면서 지류를 냈다고 할까요? 결과적으로 캐릭터들은 기본 설정보다 조금씩 더 재미있어졌고, 시리즈는 전작들보다 인간적인 재미가 훨씬 풍부한 작품이 되었지요.

듀나 하긴 너무 정통으로만 흐르거나 계획을 충실하게 따르기만 하는 이야기는 재미없지요.

파프리카 그렇다고 원래의 의도에서 너무 벗어나도 문제가 되지요. 장금이 주치의관의 위치에 오르는 에피소드는 기획의도만 따진다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여야 했어요. 하지만 복수 이야기가 워낙 강하다보니 그 부분은 그냥 사족 같았어요. 그렇게까지 길게 끌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위인전과 장르 이야기의 충돌이라고 할까요. 이 경우는 장르물이 이긴 셈이겠지만요.

듀나 민정호와의 로맨스에 지나치게 의지한 것도 문제겠지요. 게다가 중종과의 삼각 관계는 너무 비현실적이라 보기가 불편할 지경이었어요.

복수극이 끝난 뒤로 [대장금]은 캐릭터들의 힘보다는 기획 의도의 당위성에 의해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어요. 장금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장금이 되어야 하는 거죠. 아, 정말 이 대장금이라는 명칭은 정말 어색하네요. 사람 이름에 이렇게 대자를 붙이고 직위를 주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제주도 김만덕 할머니가 받은 벼슬은 뭐였죠? 그 사람도 잠시 편법으로 의녀가 되었었잖아요.

파프리카 내의원 의녀 반수요. 다른 데서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위치는 아니었을 거예요. 그 사람의 경우는 궁에 불러들이려는 술수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고보니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KBS 시리즈에 이영애를 캐스팅하려는 시도도 있었잖아요. 결국 제작 자체가 보류되었지만.

듀나 중종이 둘 사이에 끼어들 때는 참... 어색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순전히 까다로운 입맛과 전권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갑자기 사랑에 빠진 애인처럼 굴었으니 말이죠.

민정호의 희생은 괜찮을 수도 있었어요. 여자친구의 커리어를 위해 자기를 버린 남자의 희생. 설정만 생각해보면 감동적이잖아요? 근데, 정작 이 시리즈에서는 감흥이 덜하더군요. 솔직히 이 친구가 시리즈에서 늘 하는 게 장금이를 위해 희생하는 거잖아요. 화끈하게 한 번 더 했다고 해서 특별히 더 감동을 받을 이유는 없거든요.

파프리카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 놀려댔지만 (놀리는 게 너무 재미있는데 어떻게 해요!) 민정호는 그렇게 나쁜 캐릭터는 아니에요. 이런 사람이 실제로 옆에 있으면 참 좋겠지요. 단지 현실적으로 보이기엔 지나치게 잘났고 음영이 부족한 인물이라는 게 문제였어요. 물론 엉뚱한 자리에 서 있기도 했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민정호는 장금보다는 금영의 이야기에서 더 잘 어울렸어요. 장금과 민정호 커플의 가장 분명한 장점은 '같이 있으면 그림이 된다' 정도인 듯 해요.

듀나 지나칠 정도로 흠이 없었어요. 장금이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민정호가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해보세요. 늘 감금되었거나 다른 섬에 가 있었지요. 이 친구는 실패를 하지 않아요. 일이 틀어질 때마다 늘 완벽한 핑계가 준비되어 있지요. 언제나 급히 가야 할 선배 상갓집 명단이 머리 속에 준비되어 있는 남편처럼요. 그 핑계가 사실이라는 걸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전 이 남자가 은근히 수상쩍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아마 김영현 작가가 조금만 더 자기 주장을 내세웠다면, 민정호는 더 재미있는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전에 이병훈 PD가 한 인터뷰를 읽은 적 있는데... 어디 보자... 여기 있군요. "종사관과 장금이 연정을 느끼는 대목에서 여섯 번을 다시 썼다. 운명적인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장금이 종사관의 목숨을 구해준다는 설정을 요구했는데 줄기차게 저항하더라. 또 종사관에게 특별히 잘난 면이 있어야 장금이가 연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세대 차이도 있고 성차도 있는 셈이다. 작가의 고집을 보며 나도 깨닫는 것이 많다."

작가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지금의 민정호는 전체적인 긴장감을 상당히 약화시키거든요. 캐릭터가 조금 덜 잘났고 분명한 인간적 개성을 갖추고 있었다면 덜 뻣뻣했겠지요.

더 큰 문제는 이 친구가 후반부에서 거의 [그대 안의 블루]식 남성 페미니스트처럼 굴었고, 그 때문에 정작 주인공인 장금은 시대를 뛰어넘은 혁명적 사고에 도달한 한 양반 남자가 역사에 자국을 남기기 위해 동원한 도구처럼 보였다는 거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주치의 장금은 얼마나 심심해보이던가요. 총기는 다 사라지고 열의도 애정도 없고... 겉모습만 멀쩡하지 꼭 좀비 같았어요. 안티 클라이맥스도 그런 안티 클라이맥스가 없었네요.

사극에서 현대성의 반영은 중요해요. 결국 아무리 과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고 해도 그 관점은 지금을 사는 우리의 것이니까요. 그러나 역사적 실체로서의 과거 역시 중요하지요. 결국 사극이란 이 두 요소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어느 한 쪽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정답으로 내놓을 수 있는 비율이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전 종종 이 시리즈에서 그 비율이 지나치게 현대에 기울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편견이 없어서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글들을 몰래 훔쳐 읽은 것처럼 행동하는 남자친구, 의녀의 승진을 위해 나라를 뒤집어엎는 임금과 같은 사람들은 현대극에서라면 괜찮은 남자들로 보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사극이라면 당연히 당위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 결과 마땅히 있어야 할 갈등이 줄어들기도 하며 과거의 삶을 돌이킨다는 역사극의 의미가 사라지기도 하죠. [대장금]에서는 모든 게 너무 완벽하게 해결되어서 종종 맥이 풀릴 정도였어요.

파프리카 이 이상의 긴장감을 바랐었나요? 끝없는 클리프행어들로 이어진 [대장금]의 구조는 정말 짜증날 정도였단 말이에요. 보면서 칠정울결이 팍팍 쌓이더라니까요.

듀나 하긴 전 잠 안 오는 밤마다 몇 편씩 우르르 몰아서 봤으니 그 피말리는 고통은 덜 겪은 편이지요.

제가 진짜로 거북했던 건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삽입된 작위적 설정들이었어요. 고양이처럼 호기심이 많은 장금이가 궁에 들어와서도 '엄마의 동무'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단 한 번도 탐문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한상궁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장금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도 어색하고요. 나인 박씨가 그렇게 친했던 동무의 이름을 책자에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민정호는 도대체 왜 장금이 아빠 노리개를 그렇게 늦게 돌려준 겁니까? 장금이가 생명의 은인일지도 모른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다 맨날 책 빌려주려고 만났었잖아요. 한 번 잊었다고 그냥 쭉 잊어버리나?

하지만 전 몇 가지 노골적인 전통은 좋았습니다. 예를 들어 장금이가 연생이와 함께 퇴선간에 숨겨진 박나인의 음식발기를 찾으러 나서다 금영이를 만나는 이야기같은 건 정말 고전적인 기숙학교물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잖아요. 만약 제작진에게 경복궁이라는 공간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여유가 있었다면 더 근사했었겠지만요.

그래도 전 모르겠군요. 이런 설정들은 과연 얼마만큼 진지한 것입니까? 일부러 고풍스럽거나 멜로드라마틱한 설정을 흉내낸 것입니까? 아니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이 정도의 작위성은 용납되기 때문에 그냥 한 것입니까?

파프리카 노골적인 역사 왜곡은 어때요? 최근 들어서는 경원대군이 너무 일찍 태어났다는 게 지적되기도 했지요. 확실히 후반부는 스토리를 위해 지나치게 시간대를 뒤튼 구석이 있었습니다. 장금의 업적은 종종 시대를 뛰어넘는 것들이라 종종 사기처럼 느껴지고요. 결정적으로 중종이 장금이를 주치의관으로 만들려는 에피소드는, 아무리 허풍으로 받아들이려 해도 어색했어요. 정말 당시 조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실록에 기록이 남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테니.

듀나 전 조선시대의 의관들이 효소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게 더 놀랍던 걸요. 그리고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한상궁은 아카시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었나요? 하여간 이건 제가 나설 부분이 아닙니다. 실수들은 열성팬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요.

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언어문제입니다. 당시의 언어를 그대로 쓸 수는 없어요. 시청자들도 알아듣지 못할 거고 배우들도 죽을 맛일테며 절대로 자막을 달아야 할테니까요. 물론 당시 궁중에서 어떤 식의 언어들이 오갔는지 전적으로 확신할 수도 없기도 하고요. 대사를 현대화시키는 건 당연해요.

그래도 사용되는 어휘들을 조금 더 정돈했어도 되지 않았나 싶어요. 아까 효소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 역시 언어 문제의 일부가 아닌가 싶어요. 최근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어의 상당수가 최근에 만들어졌거나 일본에서 수입된 것들이라 이것까지 고증문제로 다룬다면 정말 힘겹겠지만, 그렇다고 그걸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거죠. 조선 시대라면 구어의 자료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까 현대 시청자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으면서도 보다 정통적인 울림이 남아있는 대사를 찾아내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일 거예요.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사극에서 '공이 저쪽으로 넘어갔다'같은 표현이 나오는 건 조금 심했단 말이에요.

파프리카 이번엔 '해요'체 언급이 없네요. 사극에서 '해요'체만 나오면 늘 꿈틀하는 성격이잖아요.

듀나 아, 전 이번엔 별 거부감이 없었어요. 워낙 현대 일상어가 많이 쓰였던 작품이었잖아요. 그리고 그런 일상성은 여기서 꽤 중요했다고 봐요. 아까 과거의 역사와 현대적 관점의 위태로운 균형에 대해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장금]의 가장 중요한 매력은 그 현재성이었어요. 높으신 왕족들이 주인공인 다른 사극들은 시청자들에게 비교적 추상적으로 다가오지요. 하지만 궁의 하급공무원들이 주인공인 이 작품은 곧바로 시청자들에게 와닿는 구석이 있었어요. 장금이와 친구들이 겪는 수많은 시험들이나 사회적 난관들은 모양만 조금 바뀌었을 뿐, 우리 모두가 지금도 겪는 일들이지요. [대장금]은 조선 시대 하급 공무원들의 삶을 그리는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현대를 사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선 시대에 대입한 것이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종종 튀어나오는 노골적인 고증 오류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대사들이 그렇게 튀지 않은 거죠. 물론 전 역시 보다 충실한 대사들을 원했지만요.

또 하나 좋았던 건, 대사에서 남녀간의 성적 균형이 비교적 잘 지켜졌다는 거죠. 전 서천수와 나인 박씨, 장금이와 민정호의 예의바른 대사들이 좋았어요. 전 이런 사극의 남자 캐릭터들이 쓰는 '하오'체의 위선적인 느낌이 굉장히 싫거든요.

파프리카 현대성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한동안 [대장금]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최근 정치판에 일일이 대입하는 시도가 있었잖아요. 장금은 강금실 장관이고, 한상궁은 노무현 대통령이고, 다리 저는 정상궁은 김대중 전대통령이고, 최상궁은 최병렬 전한나라당 대표이고 민정호는 안대희 중수부장이고요. 재경합은 재신임과, 민정호가 탄핵되는 상황은 지금의 탄핵 정국과 비교되기도 했지요.

듀나 제작진이 처음부터 그렇게 노골적인 비유를 시도했는지는 몰라도, [대장금]에는 분명한 정치적인 메시지가 있죠.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단순해요. 시스템은 옳지 못한 옛 것을 수호하는 자들에 의해 오염되어 있어요.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이들을 몰아내고 그릇된 관행을 파기한 뒤 능력있고 올바른 사람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거죠. :-)

[대장금]은 일종의 혁명에 대한 우화예요. 물론 여기서 혁명은 나라를 뒤흔드는 거대한 것이 아니에요. 몇몇 하급 공무원들의 앞날이 달려있는 작은 것이지요. 그래도 모양은 다 갖추고 있어요. "사람 입에 들어가는 것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다"라는 기준을 세운 정상궁은 이 세계의 칼 마르크스나 모세겠지요. 한상궁이나 장금은 그 이념을 위해 투쟁하는 작은 혁명가들이고요.

역사적 무게가 없어서인지, 시리즈는 결국 그 혁명을 완벽하게 성공시켜요. 타락한 관리들은 물러나고 '경합'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스템이 자리를 잡지요. 제 생각에, [대장금]의 진짜 클라이맥스는 장금이가 '대장금'이 되는 장면이 아니라 지금까지 늘 뒤에 빠져 있던 민상궁이 정정당당한 경합을 통해 최고상궁이 되는 장면이 아닌가 싶어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갔다는 말이니까요.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장금이가 순진무구한 노력만으로 성공한 게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장금이는 비겁한 수를 쓰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복수에 성공하고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다른 무기도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2부의 장금이를 한 번 봐요. 얼마나 빽이 막강한가요. 내의원에서는 정운백과 신익필이 돌봐주고 있지요, 옆에서는 민정호랑 상선 영감이 지켜주고 있지요, 위에서는 중전이랑 왕이 보살펴주지요, 숙원마마가 된 연생이도 일만 나면 원군이 되어주기 위해 복병으로 숨어 있지요. 장금이를 도와주기 위해 정운백과 신익필이 쓴 술수들은 어떤가요? 게다가 마지막에 장금이가 내놓은 유언장 카드는 정말 완벽한 음모였어요.

정상궁과 한상궁은 그러지 않았어요. 모두가 너무나도 결백하게 굴었지요. 정상궁만해도 왕의 총애를 입고 있었으니 맘만 먹었다면 이용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페어플레이만 했지요. 한상궁도 마찬가지이고. 결국 더러운 정치판에서 살아남고 이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빽과 술수가 필수적이라는 교훈에 도달하게 되더군요.

파프리카 그래도 이 정도면 도덕성에 흠을 남기지 않은 깨끗한 승리지요. 장금만큼 깨끗하게 인맥의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거예요.

듀나 전 어느 정도 더러워도 상관 없었어요. 복수의 쾌감만 충분하면 됐죠. 하지만 장금이의 경우 복수를 성공시키려면 어느 정도 도덕적 우월성을 유지해야 했지요. 옳은 일이기도 했지만 그래야만 확실하게 상대편을 이길 수 있거든요. 자기가 지금 뭣 때문에 싸우는 건데요? 최상궁과 똑같이 군다면 그건 한상궁을 두~~~ 번 죽이는 일이죠.

파프리카 하긴... 나중에 한상궁이 임시 최고상궁이 된 장금한테 오비원 케노비처럼 짠하고 나타났을 때 기억나요? 장금이 해놓은 일이 기특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듀나 아, 전 그 장면이 정말 싫었어요. 스모크에 조명까지 깔고 등장한 한상궁은 꼭 위문공연나온 연예인 같았어요. 저승에서 박나인과 살림이라도 차렸는지 좋아 입이 찢어질 지경이더군요. 회한도, 슬픔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도 없는 유령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어요?

그 장면이 더욱 싫었던 건, 한상궁 특유의 분위기가 거의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이 사람은 그렇게 쉽게 자기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아주 엄격하게 자신을 숨기는 사람도 아니고요. 한상궁이 살아있을 때 양미경은 그 어정쩡한 경계를 아주 흥미롭게 표현했지요. 특히 이 사람의 대사 처리는 재미있었어요. 의식적으로 엄격한 톤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대사 자체는 늘 불안하게 흔들리잖아요. 어디까지가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전 그 사람이 등장할 때마다 "저기,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맘 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요.

파프리카 그건 금영을 연기한 홍리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홍리나의 경우는 속이 쉽게 보이는 커다란 눈 덕도 봤지요.

듀나 여자 주인공들 중 가장 전통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던 건 견미리였죠. 가장 사극에 가까운 연기였어요. 그 때문에 설정과 갈등이 전형화될 때는 진부한 클리셰로 흘러갈 경우가 많긴 했지만 캐릭터의 진지한 내면 갈등이 표출될 때는 고전적인 위엄을 풍겼죠.

파프리카 [대장금]에서 '사극' 연기는 종종 일상적인 연기들과 심하게 충돌했어요. 다른 데와는 달리 일상적인 대사들의 비중이 훨씬 높았으니까요. 특히 궁녀들과 의녀들은 거의 요새 사람들처럼 대사를 했잖아요.

듀나 장금이 역을 맡은 이영애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종종 이 사람의 평면적인 연기에 대한 비판을 읽을 수 있는데, 전 별 문제가 없었답니다. 원래 장금이라는 캐릭터가 단순했으니까요. 장금이는 너무 복잡하게 연기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기는 캐릭터였어요. 당장 떠오르는 감정을 적절하게 표출하면 족했죠. 나머지는 시청자들의 몫이었어요. 그리고 전 이영애의 그 조선 시대에 갇힌 현대여성같은 어색한 태도가 좋았어요. 특히 새로운 발견에 신나서 떠들어대다가 갑자기 나타난 중전이나 대비 같은 높은 양반들 앞에서 쫄아붙을 때는요. "저, 그런 것이 아니오라... 우물쭈물..." :-)

파프리카 아마 가장 연기하기가 즐거웠던 사람은 강덕구와 나주댁을 연기한 임현식과 금보라였을 거예요. 두 사람이 나올 때마다 그 흥겨운 에너지 때문에 어깨가 들썩거릴 지경이었거든요.

듀나 하긴 노골적인 캐리커처가 연기하기는 가장 재미있죠!

파프리카 이 시리즈에서 가장 '날로 먹은' 배우는 연생 역의 박은혜가 아니었을까요? 연생은 정말 특별할 게 없는 캐릭터잖아요. 연기할 거리도 별로 없었고요. 단지 안전하게 예쁘고 착한 성격이라 귀여움만 잔뜩 받았지요.

듀나 아, 전 연생이가 좋았어요. 예쁘고 착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강아지같은 외모나 성격에도 불구하고 친구에 대한 우정과 믿음을 지켰던 그 꿋꿋함이 좋았어요. 전 의지가 허약해 빠진 사람이라, 연생이같은 사람한테서 이런 강단을 발견할 때 쉽게 감동먹어요. 그것이 강아지가 주인에게 품는 것과 같은 단순한 애정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파프리카 연생의 대척점엔 장덕이 있었지요. 김여진의 연기가 거칠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연기가 나빴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 튀는 말투가 조금 당황스러울 수는 있어도, 한 번 들으면 잊기 쉽지 않고 캐릭터의 성격과도 완벽하게 맞는다면 좋은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장덕은 사극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 여성 캐릭터였잖아요. 거의 부치답기까지 한 그 사람의 당당한 태도는 근사했어요. 여담이지만, 전 김만덕 전기물에 이 사람을 캐스팅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될 리는 없겠지만. 그 시리즈가 정말 만들어진다고 해도 기생 시기에 어울리는 간드러진 외모를 찾지 않겠어요?

듀나 [대장금]은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를 과시하는 작품은 못 되었어요. 김여진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들의 전체적인 연기들이나 앙상블은 늘 조금 거친 편이었잖아요. 사극 연기와 연출의 클리셰는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고요. 죽은 줄 알았던 정윤수가 다시 등장하는 장면을 보세요. 모여있던 등장인물들이 똑같이 놀란 표정을 짓고 활인화처럼 굳어 있잖아요! 카메라는 그 얼굴들을 하나씩 친절하게 다 잡아주고요!

하긴 어쩔 수 없었겠죠. 일주일에 1시간 짜리 시리즈를 두 편이나 연재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빠른 편이에요. 여유있게 아이디어나 연기의 완성도를 다듬을 시간이 없었을 거예요. 그게 50부를 넘기는 대작이라면 더욱 그렇고요. 막판엔 다들 지친 티가 역력하더군요. 바로 몇 초 전에 했던 대사들을 끊임없이 보이스 오버로 재탕하는 작가의 습관도 시간에 쫓긴 결과가 아닌가 싶고요.

파프리카 하긴 1주일에 2시간이면 [논스톱 4] 일주일 분량과 맞먹으니... 이영애가 연장 방송을 안하려고 했던 게 이해가 돼요.

듀나 이 때문에 전작제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부상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제 생각엔 말도 안되는 소리 같아요. 미니 시리즈야 전작제를 시도해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50부작이라면 보통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 2시즌보다 길어요. 전작제는 결코 현실적인 대안은 아니지요. 1주일에 한 편으로 줄이는 게 낫죠. 그랬다면 사계절도 보다 잘 이용할 수 있었을테고요.

시청자들의 피드백도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충분히 긍정적으로 활용될 수 있지요. 문제가 있다면 인기가 조금 있어도 질질 끌어버리는 방송국의 고질병에 있지 않겠어요? 다행히도 [대장금]엔 그런 게 적었어요. 한상궁 이야기가 계획보다 조금 더 늘어나는 통에 4회가 더 많은 54회까지 끌었지만, 그 정도면 계획에서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었어요. 전 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2부가 성급하다는 생각도 안 들었답니다. 오히려 복수로 치닫는 드라마의 긴박한 속도에 더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물론 전 몇 편씩 몰아봤으니, 꾸준히 연재를 쫓아갔던 다른 시청자들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요.

제가 2부에서 불편했던 건 기획의도와 자칭 실화가 드라마와 캐릭터의 발전을 가두고 있었다는 거였어요. '장금을 대장금으로 만들기'를 선거공약처럼 내세우지 않았다면 이 작품의 의미는 더 컸겠죠. 궁을 떠나 '백성들을 살리는' 장금이의 모습도 더 의미있게 그려질 수 있었을 거고요. 어떤 때는 이야기를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둬야 하는데, 이 시리즈의 후반은 그걸 막았지요.

파프리카 많은 사람들이 2부의 성급한 속도 때문에 충분히 기를 펴지 못한 건 사실이잖아요. 은비나 신비 같은 의녀들은 끝까지 자기 캐릭터를 구축하지 못했지요. 연생이나 영로도 자기 역할만 간신히 했을 뿐이고, 금영이나 최상궁의 심적갈등도 그래야 했던 것만큼 충분히 표출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장덕 역시 비중이 조금 더 컸으면 좋았을 거예요.

듀나 그러고보니 신비는 연생이의 야무진 의녀버전처럼 보였지요. 배우들이 닮아서 그런가?

파프리카 하긴 그 쪽은 아직도 [젠느] 모델이 박은혜인줄 알고 있잖아요.

듀나 그럼 그게 한지민이란 말이에요?

파프리카 그럼요. :-P

신비에 대해서는 제가 이론을 하나 가지고 있어요. 원래 배우자와 사이가 좋았던 사람은 사별하거나 이혼한 뒤에 이전 배우자와 비슷한 사람과 재혼한다고들 하잖아요. 이 법칙이 친한 친구에도 적용되는 게 아닐까요? 장금도 괜히 없어서 서운한 연생 대용으로 신비를 선택한 게 분명해요.

듀나 [ER] 팬들의 어휘를 흉내낸다면, 은근히 'Bob'된 캐릭터들이 많아요. 수라간 나인 조방은 어떻게 된거죠? 원래 승은입은 연생이의 시비가 될 계획이었잖아요. 내의원 의녀 시연은 어떻고요? 전 의녀가 된 장금이가 그 사람과 재회하는 장면을 기다렸는데 끝까지 안 나오더라고요.

파프리카 모두 병으로 죽은 덕구 아저씨네 아들들은 어떻고요? 첫째야 어린 시절 모습이라도 나왔지만 순전히 유황오리의 효능을 입증하려고 태어났다가 등장도 못하고 죽은 둘째는 도대체 뭐예요?

듀나 장금이 아빠 서천수는요? 원래는 중종반정 때문에 살아남은 것으로 되어있지 않았나요?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예요? 제가 장금이라면 임금 빽으로 어떻게 된 건지 한 번 알아볼텐데.

파프리카 전 왜 장금이 엄마 묘를 이장하지 않는지 궁금하더라고요. 한상궁 마마 묘는 그렇게 잘 관리하면서 엄마 묘는 수십 년 동안 동굴에 박아두었잖아요.

듀나 [대장금] 팬픽션 같은 건 없나요? 그런 게 있다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플롯의 빈틈을 채워주고 이야기를 충분히 못한 다른 인물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텐데. 어떤 사람들은 한상궁이 젊었을 때 이야기를 스핀 오프로 만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실현 가능성이 없겠죠?

파프리카 전에도 몇몇 사람들이 말한 것 같은데, 전 [대장금]과 [여인천하]의 크로스오버를 한 번 보고 싶어요.

듀나 진짜 드라마는 아니더라도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섹션으로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코미디 하우스]에서 하고 있는 [장금아, 장금아]는 기존 쇼의 직설적인 패러디에 불과하잖아요. 약간 창의적으로 설정을 뒤틀어 다른 것들과 섞으면 정말 끝없이 갈 수 있을텐데. 전 민상궁과 창이의 후일담을 보고 싶어요.

여담이지만, 전 종종 [장금아, 장금아]가 진짜 텍스트이고 [대장금]이 패러디같아요. 최근까지 [장금아, 장금아]의 패러디 에피소드들을 대부분 먼저 봤으니까요. 그 때문에 열이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 사람이 환자 앞에서 맨발을 휘둘러대지 않는 게 너무 이상했답니다. 지금은 민상궁 역의 김소이가 마지막 장금이를 어떻게 연기할까 궁금해하는 중이죠.

파프리카 잊고 있었는데, [궁녀 센스]가 어느 정도 팬픽션 역할을 해주었지요. 장난기어린 패러디였지만 조방과 같은 사람들의 후일담들을 꽤 다루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설마 팬픽션이 없겠어요? 어딘가 있을 거예요.

듀나 [대장금]의 방영기간 중 나온 수많은 패러디들은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상호 작용이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보여주는 예일 거예요. 어설프게 에드워드 패커드를 흉내내는 것만 인터액티브가 아니에요. 이런 것들이야 말로 진짜 알짜배기 인터액티브 현상이라고요. (04/03/23)

기타등등

알렉산드로 사피나가 [하망연]을 부를 때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잭 블랙과 윌 패럴이 떠올라 미치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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