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2010.03.21 07:27

DJUNA 조회 수:2575

제가 [하우스]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의 대화 때문일 겁니다. 스토리 대부분이 ‘이성적 대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시리즈죠. 주인공들은 모두 성격은 별로 안 좋지만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가는 전문가들이고 그들의 무기는 늘 논리와 이성입니다. 요새는 이들이 다루는 환자들도 점점 더 머리가 좋아져서 결코 의사들에 눌리지 않죠.

[하우스]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이 들어있고 언어를 다루는 방법을 안 다고해서 그들이 말빨만 센 사고기계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착각은 위험해요. 이성은 감정의 반대가 아닙니다. 둘은 그냥 전혀 상관없는 요소들이죠. 감정이 터져 나오면 이성이 마비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성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거나 어긋나는 사람들도 있고 일부러 비틀어놓은 논리를 통해 자신의 감성과 이성을 몽땅 왜곡시키는 사람들도 있지요. 이들은 모두 멋진 드라마 재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온전하게 표출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은 바로 대화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좋은 대화를 듣는 건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백분토론]은 더 이상 대화의 장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높여 자기 생각만 외쳐대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곳에 불과하죠. 사회자가 아무리 능수능란해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분위기의 조절뿐입니다. 소위 본격 토크쇼라는 것이 사라지고 연예인들의 집단 신변잡기 수다 쇼로 전환된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도 대화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일대일 토크쇼라면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지면서 논리를 따라야 하지만 [야심만만]과 같은 프로그램의 경우 폭탄 하나 터트리는 것만으로도 임무는 끝나죠. 그 뒤의 상호작용은 큰 의미 없는 꼬리에 불과합니다. 코미디의 경우는 대화보다는 대화의 단절을 다룬 작품들이 더 많은데 수가 좀 지나치게 많은 것 같지 않습니까? 특히 [개그 콘서트]의 경우는 코너의 반 정도가 대화의 단절을 테마로 삼고 있습니다. [집중토론], [내 인생에 내기 걸었네], [까다로운 변선생], [대화가 필요해]... 전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우리가 전혀 대화가 안 되는 사회에 살고 있고 그런 세상에서 고함만 질러대며 성격이 나빠지고 있다는 걸 그들이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들로서는 장르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죠. 그것도 훌륭하게. 하지만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게 즐겁지는 않아요.

드라마의 경우는? 이런 것 눈치 채셨습니까? 우리나라의 드라마 팬들이 좋아하는 ‘명대사들’을 따로 모아 검토해보면 대부분 경구의 성격이 강하고 대화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대화는 기계적인 기능을 소화하는 것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감정 폭발의 장이고 그들의 갈등은 대부분 이성을 통하지 않고 해결됩니다. 오래간만에 감정폭발 없는 대화와 마주치면 그건 서로에게 입 발린 소리만 해대는 좀비들의 자화자찬일 경우가 많고요. 전 얼마 전에 방영이 끝난 모 일일연속극에서 그런 경향을 심각하게 느꼈습니다. 이건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장르 자체가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대갈치기를 통해 전개되기 때문이지요. 바로 대화가 핵심인 겁니다. 그런데도 정작 의미 있는 대화는 없고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들은 대화를 하는 대신 상대방을 윽박지릅니다.

물론 이성이 언제나 작동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이 이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해결된다고 주장한다는 그건 더 거짓말이죠. 정말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은 겁니다. 그 징후들이 이미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07/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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