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짓 거 우리도 [닥터 후]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제 친구 한 명이 묻습니다. 하긴 못 만들 것도 없습니다. 우리도 CG 작업은 남 도움 받지 않고 꽤 잘할 수 있죠. BBC에서 우리보다 특별히 더 잘하는 것도 아니고요. 요새 에피소드들이야 CG 시절에 만들어져서 지금처럼 날아다니는 타디스를 등장시킬 수 있는 거지, [닥터 후] 옛날 버전 보면 특수효과 참 대단합니다. [뽀뽀뽀] 수준이죠. 그런 특수 효과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컬트 시리즈를 탄생시킨 겁니다. 당연하죠. 중요한 건 효과가 아니라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세계거든요.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SF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손창민이 어렸을 때 알루미늄 호일 옷을 입은 백발 우주인과 함께 우주의 악당들을 소탕하는 수퍼 영웅으로 나왔던 어린이 물을 기억하세요? 심은하가 초록색 눈을 하고 김지수와 키스하던 [M]은 기억하시는지? [RNA]나 [거미] 같은 시리즈도 있었죠. 최근엔 KBS에서 [앨저넌을 위한 꽃다발]을 각색한 [안녕하세요, 하느님]을 미니 시리즈로 만든 적 있고, 김효진 나오는 냉동인간 시리즈 [그녀가 돌아왔다]도 있었습니다. 어린이용 SF야 몇십 년째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왔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여전히 SF 전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건 사실입니다. 특수분장 어린이 SF를 제외하면 우리에겐 전통이라는 것이 없죠. [M]이나 [안녕하세요, 하느님]은 모두 전통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거죠. MBC에서는 [M]의 성공 이후에 잠시 SF의 전통을 이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왜 우리는 SF를 만들지 못할까요? 인기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냥 쑥스러워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요새 계속 그런 이야기를 들어요. [닥터 후]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한국에 이식해서 [드라마 시티] 에피소드를 만드는 건 기술적으로 어려운 게 아니지만, 그래도 그 과정 중 뭔가가 빠진다고요. 그건 바로 영어로 능수능란하게 SF적인 설정을 설명하는 영국인 배우죠. 같은 내용을 한국인 배우가 한국어로 이야기하면 뭔가 설득력이 없습니다. 가짜 같아 보이는 겁니다. 우린 SF적인 한국인 캐릭터를 차마 쑥스러워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과학적이거나 이성적인 존재라는 걸 스스로 부인 하는 겁니다. 요새 전문가 물이 유행이 아니냐고요?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우린 여전히 그들을 전문가 딱지를 달고 연애하는 캐릭터로 인식합니다. 그들의 지성을 인정하지 않아요. 아마도 시청자들에게 쓸모없기 때문이겠죠. 이성에 바탕을 두고 지적 세계를 탐구하는 대신 그 이슈들을 고래고래 질러대며 폼을 잡는 것이 더 중요할 테니까.

그래도 전 어떻게든 전통을 세우고 싶습니다. 어린이용 SF도 괜찮고 연애질 하는 가벼운 SF 미니 시리즈도 괜찮지만 그보다 본격적인 전통을 따르는 SF를 텔레비전 세계 어느 구석에 박아놓고 싶은 겁니다. 21세기에 그 정도 희망은 품어도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떻게 하면 될까요? 역시 틈새시장을 노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하긴 [닥터 후]도 어린이 SF로 시작했지요. 우리가 그와 비슷한 틈새를 찾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전과는 달리 SF와 관련된 인력들도 꽤 늘었고요. 계속 직간접적으로 로비하면 [드라마 시티]에서 SF 에피소드를 더 자주 볼 수 있을지 모르죠. 지금까지도 아주 없지는 않았잖아요. 전 그보다 더 정통적인 작품을 원하지만.

하지만 기회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발전이 결정되지요. 이건 꼭 SF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미니 시리즈에서 연애만 하는 종자로밖에 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발전도 딱 그 수준에서 멈출 수밖에 없으니까요. 대중문화는 마술 거울입니다. 지금 얼굴만 비추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까지 비추어주죠. 그리고 그 영상을 만드는 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0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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