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문 La quatrième porte (1987)

2010.03.21 23:43

DJUNA 조회 수:3043

폴 알테르 Paul Halter (글) 이상해 (옮김)

이 책을 읽고 폴 알테르라는 작가에 대한 조사를 조금 했습니다. 프랑스 작가지만 주로 영국을 무대로 영국인들이 나오는 소설을 쓰는 존 딕슨 카의 팬이라고 해요. 그의 영역은 존 딕슨 카의 전공분야, 그러니까 밀실살인과 불가능범죄라는군요. 그는 트위스트 박사라는 범죄전문가와 오웬 번즈라는 아마추어 탐정을 주인공으로 지금까지 꽤 많은 소설들을 썼다고 하는데 모두 2,30년대 황금기의 전통에 충실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작가들이 살아남아있다니 감동적이군요. 물론 세상 일이 다 그렇듯, 그의 소설은 지금까지 영미권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는데, 그럴 수도 있죠. 작정한 영국팬인 그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일이겠지만요.

[네 번째 문]은 그의 첫 장편이고 트위스트 박사가 등장하는 첫 작품입니다. 하지만 트위스트 박사는 소설 후반부에 잠시 등장할 뿐이고 소설 안에서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옥스포드 교외의 한 마을입니다. 마을 사업가의 아내가 밀실 안에서 칼에 난자된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 뒤로 그 집 다락방에서는 귀신이 나오는다는 소문이 돌고요. 온갖 불길한 일들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동안 그 집에 영매부부가 이사를 오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데, 그 절정이 같은 방에서 일어난 밀실살인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와!"하는 탄성이 나옵니다. 정말 알테르는 존 딕슨 카에 맞먹는 미스터리를 만들어냈어요. 아무리 봐도 불가능해보이지만 아주 간단한 트릭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는 마술이지요. 그와 함께 그는 그 불가능한 범죄를 뒷받침할 만한 그럴싸한 분위기도 만들어냈습니다. 귀신과 악령이 설치고 다닐 법한 동화 같은 영국 시골 마을을 상상해보세요. 이것만으로도 부족한 듯, 그는 소설 곳곳에 이를 정당화할 광기를 삽입했는데, 역시 꽤 잘 맞아떨어집니다.

능숙한 소설은 아닙니다. 야심이 앞선 처녀작의 티가 나요. 미스터리는 완벽하지만, 소설의 구성은 장황한 편이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왓슨 역의 조나단을 통해 정보는 비교적 공정하게 전달되고 있지만, 정작 탐정 역할의 캐릭터가 흐릿하기 때문에 추리의 매력은 떨어져요. 트위스트 박사가 등장하는 3부와 5부는 서술방식의 변화로 독자들을 자극하고 있지만 내용만 본다면 사실 없어도 되고, 그를 통해 추가된 미스터리는 지나칠 정도로 손쉽습니다. 물론 이것이 순전히 '광기의 삽입'이라는 추가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사정은 다르겠지만요.

[네 번째 문]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이 소설이 아무리 구식 영국 추리소설을 흉내내고 있다고 해도 외국인, 그것도 프랑스인이 쓴 작품이라는 티가 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이 소설은 흉내예요. 알테르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그 사실을 노출시키고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영국 소설을 흉내내는 프랑스인처럼 글을 쓰고 있습니다. 완벽한 영국인처럼 글을 썼던 미국인 작가 존 딕슨 카와는 다르죠.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예상외로 두터운 모양입니다. (09/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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