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바이야트 Rubaiyat of Omar Khayyam (1859)

2010.03.13 22:38

DJUNA 조회 수:2561

Omar Khayyam (글) Edward Fitzgerald (번역)

1.

어디까지가 영문학이고 어디까지가 불문학이며, 어디까지가 독문학일까요? 간단한 질문 같지만 생각해보면 꽤 까다롭습니다. 경계를 분명히 그을 수 없는 작품들이 꽤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죠.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예로 들어봅시다. 이 작품은 영문학일까요? 얼핏 생각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로메]는 불어로 쓰여졌습니다. 왜 와일드가 이 희곡만 불어로 썼는지 모르겠지만 불어로 쓰여진 작품을 영문학이라고 부르는 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불문학으로 치자니 오스카 와일드라는 작가의 연속성을 고려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하고요.

[아라비안 나이트]는 어떨까요? 우린 아주 쉽게 이 작품을 아랍 문학으로 단정짓는데... 그게 과연 그럴까요? 지금까지 전세계에 출판되며 읽히고 있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원전은 무엇인가요. 바로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의 영어 번역본입니다. 19세기 이후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이 책은 결국 한 영국인의 손에 의해 조율된 작품인 셈입니다.

이런 경계선에 선 문학 중에는 오늘 소개할 [루바이야트]가 있습니다. 이 작은 시집은 대충 두 사람의 정신이 결합한 결과입니다. 하나는 11세기에 살았던 페르시아의 학자인 오마르 카이얌이라는 남자이고, 다른 한 명은 19세기에 살았던 영국의 작가이자 번역가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입니다.

2.

에드워드 피츠제럴드는 1809년에 태어났습니다. 일 안해도 굶어죽지 않을 복받은 남자였던 모양인지, 젊은 시절을 고향 마을에 은거하며 가끔 문학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냈던 모양입니다. 가끔 그는 지금은 잊혀진 몇 편의 책들을 익명으로 발표해 작가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에드워드 보일즈 카웰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산스트리트어과 교수가 된 사람으로, 우연히 친구에게 페르시아어를 배워보지 않겠냐고 물었답니다. 그 때가 1852년. 마흔을 넘긴 나이이니, 저같이 게으른 사람은 시작도 하지 못했을텐데, 피츠제럴드는 그래도 흥미가 당겼던 모양입니다. 그는 카웰에게 문법 지도를 받아가며 페르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어쩌다가 페르시아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이며 시인이며 철학자였던 오마르 카이얌이라는 남자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순전히 우연이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를 사는 영국인이 접할 수 있었던 페르시아 문학의 양이 얼마나 될까요.

하여간 새로 배운 페르시아어 실력을 뽐낼 겸, 피츠제럴드는 1859년, 오마르 카이얌의 75편의 시를 번역해서 팜플렛으로 발간했습니다. 제목인 [루바이야트]에는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루바이야트는 루바이의 복수로, 루바이는 사행시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입니다.

그냥 바람과 함께 사라질 것 같았던 이 작은 책이 구원받은 건 순전히 라파엘 전파 시인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덕분입니다. 서점에서 헐값으로 내놓은 걸 친구가 사서 로제티에게 보여주었던 모양입니다. 로제티는 친구 스윈번에게 그 책을 알려주었고 입이 모이자 윌리엄 모리스니, 존 러스킨이니 하는 당대의 유명인사들의 귀에 이 책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잊혀질 것 같던 고전 문학 번역서가 영문학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변신했습니다. 원래 작품이 좋기도 했지만 당시 동방 유행과 우연히 잘 맞아떨어졌다는 것도 히트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기가 산 피츠제럴드는 68년에 35편이나 새 번역을 덧붙여서 개정판을 냈습니다. 이 시집은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쳐 79년에 101개의 번역시로 완성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루바이야트]는 딱 맞았습니다. 루바이야트가 다윈의 [종의 기원]과 같은 해에 나왔다는 걸 잊지 말기 바랍니다. 이 두 권의 책은 빅토리아 시대의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를 상징하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다윈이 기독교적 자연사를 공격했다면, 루바이야트는 내세와 영혼 불멸성을 거부했습니다. 아마 당시 독자들은 에드몽 뒬락의 그림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루바이야트]를 읽으며 찰나적인 삶의 쾌락과 인생 무상에 대해 생각하며 달콤쌉싸름한 시간을 보냈을 겁니다.

3.

그런데 과연 [루바이야트]는 누구의 작품일까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요새 같으면 이런 번역본은 나올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피츠제럴드의 '번역'은 그냥 '번역'으로 보기엔 번역자의 권한을 지나치게 남용하고 있습니다. 101편의 번역시 중 원작에 충실한 작품은 겨우 49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44편은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들을 멋대로 뒤섞어서 조합한 작품들입니다. 나머지 8편은 더 심각합니다. 요새 연구에 따르면 네 편 정도는 다른 시인의 작품이고 두 편은 다른 번역가의 불역에서 따왔으며 두 편은 피츠제럴드 자신이 멋대로 창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교적 충실한 번역인 49편도 원작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요.

그렇다면 오마르 카이얌은 기본 방향만 설정해주고, 나머지는 피츠제럴드가 멋대로 동방 세계의 시를 재창조한 셈입니다. 이런 피츠제럴드의 권력 남용은 오마르 카이얌의 다른 번역들이 나오면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결국 [루바이야트]는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이 낳은 영문학인 셈입니다. [루바이야트]는 영문학에서 영향을 받고 영문학에 영향을 준 영어 시입니다. A.S. 바이어트가 이 작품을 보고 '영시의 풍경을 영원히 바꾸어버린 작품'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 점을 염두에 둔 듯 합니다.

4.

[루바이야트]는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조금 오래된 책이지만 민음사에서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원어로 직접 읽고 싶은 분들에게는 Rubaiyat of Omar Khayyam를 추천합니다. 이 사이트는 피츠제럴드 시집의 5차례의 개정본 모두와 E.H. 윈필드의 보다 충실한 번역을 모두 수록하고 있습니다. (01/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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