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2007)

2010.03.20 23:44

DJUNA 조회 수:3174

각본: 김지우 출연: 박찬홍 주연: 주지훈, 엄태웅, 신민아, 정동환, 최덕문, 윤혜경, 김영재, 한정수, 오용, 조재완, 주진모, 박그리나, 김영준, 이보희, 이은, 김규철, 임승대, 유연수, 고주연

1.

[마왕]의 설정은 거의 보르헤스 소설에 써먹어도 될 만큼 추상적입니다. 몇 년 전 굉장히 나쁜 일을 저지른 적 있는 소년은 지금 형사가 되어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그 나쁜 일에 희생된 또 다른 소년은 자기 형과 엄마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그 사람들을 멋대로 처벌하는 악마가 된다는 거죠.

단순한 몇 마디로 요약 정리된 설명들이 대부분 그렇듯, 위의 설정은 그리 정확하지 않습니다. 형사 강오수는 보기만큼 결백한 인물도 아니고 복수자 오승하도 악마는 아니죠. 운명에 의해 반대편에 선 대립항과 같은 두 인물을 그리려는 게 작가의 의도였다면 그렇게까지 성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스토리와 캐릭터의 구도가 꼭 작가의 원래 의도에 충실해야 할 이유도 없긴 한데...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2.

이 시리즈에서 저에게 가장 재미있었던 건 오승하의 복수가 엄청나게 교묘했다는 겁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어요. 그의 방식은 교활하게 살인과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서 목표물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이었습니다. 법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는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철저하게 안전했습니다. 그건 그의 공범자들도 마찬가지였죠. 심지어 그는 사이코메트리가 가능한 초능력자인 서해인의 능력도 이용했습니다. 그 능력에 맞추어 거짓 단서를 심거나 정보를 경찰에 전달하기도 했지요.

문제가 있다면, 이 엄청나게 지능적인 범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승하의 몇몇 계획들은 너무나도 정교해서 종종 단순히 운에 기댄 결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차라리 오승하에게 어느 정도 초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지요. 저 역시 조금 더 설명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어차피 범인이 누군지 처음부터 드러나 있는 이야기이니, 오승하의 행동을 직접 보여주는 방법도 있었겠지요.

3.

오승하의 음모가 저에게 만족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그의 범죄가 그 복잡한 정교함에 비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비능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주 공을 들여 사건 현장에 있었던 강오수의 친구들을 살해했는데, 사실 그들은 살인같은 대단한 벌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그들이 죽어가면서 단 한 번도 죄를 뉘우치거나 후회하지도 않았다는 거죠. 심지어 몇 명은 죽음이 다가오는지도 몰랐고 그에 추가되는 공포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복수란 자기가 당한 고통을 상대방에게 돌려주는 것이죠. 오승하는 이들을 죽이면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들 중 한 명인 석진은 죽지도 않았지요. 이들이 당한 죽음과 고통이 강오수를 처벌하려는 의도라고 해도 역시 비능률적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건에 진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충분히 벌 주지도 못했습니다. 강오수는 이 사건 때문에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오승하와 주변 사람들이 겪었던 것만큼의 고통은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징징거리며 불평할 기회만 얻었지요. 그보다 더 고약한 악당인 강오수의 아버지 강동현이 겪은 고통도 별게 아니었습니다. 그 나이의 노인네를 심장마비로 죽이는 건 너무 쉽죠. 그건 복수도 아닙니다. 하루 정도 마음 고생하고 참회하다 죽는 것도 맥빠지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캐릭터의 일관성도 없고요.

비능률보다 나쁜 건 오승하의 계략이 그나 강오수와 전혀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부수적인 피해를 지나치게 많이 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오승하가 변호사의 입장에서 애프터 서비스를 해주었다고 해도 소라 엄마는 살인범이 되어 평생 그 기억을 안고 살아야 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오승하도 인간이니 완벽할 수는 없죠. 하지만 계획의 정교함과 결과의 비능률성은 아무리 봐도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첨단 기술로 무장했지만 연비가 엄청 떨어지는 신차를 보는 기분이랄까요.

4.

드라마로서 [마왕]의 가장 큰 단점은 이야기의 구조가 오승하의 계획에 거의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모든 인물들이 오승하의 사전 계획에 질질 끌려다니니까요. 심지어 그건 오승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결과 대립되는 두 사람의 정면 대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마왕]의 복수담은 기대했던 것보다 생기가 없습니다. 드라마가 살아있으려면 현재진행형으로 캐릭터들의 의지가 충돌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 생생한 의지를 과시하는 유일한 사람은 복수의 계획을 짜던 과거의 오승하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20회 회상신에 단 한 번만 등장하지요.

드라마의 두 번째로 심각한 문제점은 강오수라는 캐릭터입니다. 그는 오승하의 대립항이 될만한 무게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뉘우치지도 않고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하고 자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세상 만방과 우연히 자기와 협력하게 된 예쁜 도서관 사서에게 알리고 싶어할 뿐이죠. 그런 그의 고통은 그가 맡게 된 사건의 성격과 제대로 된 조화를 이루지도 못했고 특히 가장 큰 피해자들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옛 동창 김영철 앞에서 성인군자인 척 하는 그의 태도는 그냥 가소로웠습니다. 그가 자기도취와 연민을 조금 줄이고 인간적 깊이를 조금만이라도 더 보여주었다면 마지막 결말이 남의 대사를 암송하는 것처럼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을 겁니다.

5.

이 시리즈에서 가장 낭비된 인물은 사이코메트리의 능력을 가진 서해인이었습니다.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가장 쓸모없는 인물일 수도 있겠군요.

드라마의 구조를 뜯어보면 서해인의 초능력은 없어도 됩니다. 강오수가 신세한탄을 접고 열심히 뛰기만 해도 그 정도 정보는 얻을 수가 있거든요. 만약 서해인의 초능력을 정당하게 살리고 싶었다면 지금보다 비중이 훨씬 커야 했고요.

이 시리즈에서 서해인의 역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게을러빠진 경찰들에게 단서나 인문학적 정보를 제공해주는 컴퓨터 역할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여자주인공' 역할이죠. 남자주인공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주고 투정도 들어주고 바른 길로도 이끌어주려 하는, 뭐, 그런 역 말입니다. 물론 삼각관계 연애담의 꼭지점 역할 하기도 빼놓을 수 없죠.

아쉽네요. 서해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스핀오프라도 써주고 싶어요. 분명 이 캐릭터를 더 잘 활용하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6.

아까 이 시리즈의 설정이 거의 보르헤스 소설에 써먹어도 될 만큼 추상적이라고 말했는데, 시리즈가 그 추상적인 주제와 구도를 살리기 위해 쓴 방법은 솔직히 그렇게 좋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바로 인용이었거든요. 스캇 펙에서부터 [파우스트], [신곡], [오즈의 마법사],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작품들이 끊임 없이 인용되는데, 이들은 제대로 스토리에 녹아드는 대신 그냥 배우들에게 설교하듯 낭송되기만 했습니다. 이 드라마 때문에 책을 읽는 독자들이 늘어났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드라마의 구성면으로 보았을 때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지요.

더 큰 문제는 이런 인용들이 대사 안에서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끊임없이 인용된 문구를 낭송하고 설명을 해주는 서해인 역의 신민아를 볼 때마다 배우가 불쌍해질 정도였지요.

하긴 [마왕]의 전체 대사 질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작가의 최대 장점은 아니었지요. 대사들은 대부분 부자연스러운 문어체였고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이 절대로 쓸 리가 없는 무리한 수사가 넘쳐났습니다. '당신'과 같은 어색한 2인칭 대명사가 남발되는 것도 마찬가지였고요. 특히 그건 시리즈 후반에 더 심해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건 작가만의 문제점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관념을 전달하는 한국 드라마의 언어 습관이 완전히 굳어져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이건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며 대안을 찾아야 하는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입니다.

7.

주연배우들의 연기에는 큰 불만이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문제점들을 생각해 보면 꽤 역경을 잘 극복한 편이죠. 하지만 이 시리즈로 배우들의 질을 평가하기는 조금 어려운 것 같습니다. 주지훈이 별 무리가 없었던 건 오승하가 차가운 냉소를 적절하게 유지하기만 해도 반은 먹고 가는 캐릭터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강오수 역의 엄태웅은 캐릭터가 조금만 더 좋았다면 더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자기연민과 고함의 반복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아요.

조연들의 질은 주연들보다 조금 떨어지고 편차도 심한데, 그건 그들이 철저하게 기능적인 인물들이어서 어색한 대사들을 읊는 것 이상을 보여줄 여유가 없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반팀장을 연기한 주진모의 경우 전 그 배우가 훨씬 좋은 연기를 하는 걸 다른 데에서 많이 봤습니다. 이 시리즈에서도 괜찮았지만 더 좋을 수도 있었다는 거죠. (07/05/25)

기타등등

김지우/박찬홍 콤비의 전작 [부활]은 어떤가요? [마왕]보다 낫습니까? 시간을 투자할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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