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Treasure Island (1882)

2010.03.13 21:39

DJUNA 조회 수:4939

Robert Louis Stevenson (글)

1.

19세기 중엽까지 영어권의 어린이 문학은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간접적인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이상적인 어린이 문학은 그들을 '기독교적이고' '훌륭한 대영제국의 역군'인 성인으로 만드는 교육의 일부였습니다.

요새 독자들의 시점으로 보면 당시의 어린이 문학 작품은 경악스럽기까지 합니다. 어렸을 때 '경건하게' 죽은 아이들의 이야기만 모은 '기독교적인' 이야기책 같은 건 요새 보기엔 거의 병적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교훈은 편협하고 잔인하며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음탕하기까지 합니다.

1860년대 이후 어린이 문학의 체질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훈 따위는 무시하고 순수히 어린 독자들의 읽는 즐거움을 위한 걸작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일 겁니다. [앨리스]는 당시 기준으로 보면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어떤 교훈도 없었던 거예요! 요새도 '이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어쩌구로 끝나는 독후감을 써야 하는 우리 나라 초등학생들은 [앨리스]를 읽고 굉장히 난처해할 겁니다. 도대체 뭐라고 써야하는 걸까요?

2.

일단 문이 열리자 수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안나 슈얼의 [블랙 뷰티], 올콧의 [작은 아씨들],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걸작 [보물섬]을 탄생시킨 것도 바로 이런 문화적 환경이었습니다. 집필 동기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그 개인적인 성격 역시 변화한 어린이 문학의 환경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보물섬]이 쓰여진 과정은 그 독특함 때문에 유명합니다. 1881년 8월, 스티븐슨은 부모의 양자인 로이드 오즈번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오두막집에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스티븐슨은 아이를 즐겁게 해주려고 섬 지도를 그렸습니다. 지도가 그려지자 스토리는 저절로 떠올랐고요. 몇몇은 최초의 독자인 로이드 오즈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조정되었습니다. 이 소설에 호킨스 부인을 제외하면 어떤 여성 인물도 나오지 않는 것은 로이드의 요구를 따르기 위해서였답니다 (편협한 꼬마 같으니라구!)

이 철저한 자유는 [보물섬]을 지독할 정도로 무도덕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교훈따위는 없는 작품이라고 전에 말했지만, 적어도 작가인 루이스 캐롤은 경건한 종교인이었고 그의 상상은 빅토리아 식 도덕적 굴레 속에 얌전히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물섬]은 달랐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교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위태로울 정도로 선악의 경계 사이에서 흔들렸습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무엇일까요? 늙은 해적이 보물지도를 남기고 죽습니다. 주인공 소년 짐과 일행은 지도를 들고 보물을 찾아 떠나고 역시 보물을 노리는 해적들 역시 뒤를 쫓습니다. 해적들과 피터지는 싸움을 벌인 끝에 짐 일행은 보물을 차지합니다.

당시의 상식으로 보면 마땅히 짐 일행은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마땅히 더 '기독교적'이어야 했고 경건한 사람들이어야 했죠.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동기라도 좋아야 했습니다. 동기도 좋지 못하다면 그럭저럭 교훈이라도 얻어야 했고요.

하지만 이 소설에는 그런 것 따위는 없습니다. 동기만 따진다면 짐 일행은 해적들보다 특별히 나은 사람들이 아닌 겁니다. 모두 보물에 눈이 먼 사냥꾼들이죠. 해적들이 그럭저럭 나쁜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유는 순전히 그들이 자기네 도덕적 규칙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당시 해적들에게 살인은 두목 럼주 훔치는 것보다 덜한 죄였을 걸요.) 짐 일행이 얻은 교훈은? 운 좋고 쌈 잘하면 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무관심함은 요새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 합니다. 많은 [보물섬] 각색물들은 어떻게든 후반부에 '보물을 찾았다!' 이상의 감동과 교훈을 주려 기를 씁니다. 어떤 애니메이션 버전에서 보물은 멍멍이 선장의 뼈다귀들입니다. 어떤 각색에서는 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정입니다. 어떤 각색에서는... 스티븐슨이 저승에서 봤다면 통곡했을 일이죠.

[보물섬]을 근사한 책으로 만드는 것은 도덕이나 교훈 따위가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 교훈이 없었기 때문에 작품이 더 근사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소설 속의 근사한 모험과 캐릭터들은 이런 교훈 제로의 설정에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보물섬]의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인 롱 존 실버입니다. 이 교활하고 야비하지만 매력적인 악당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한 쪽 편에 섰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던 인물입니다. 후반부를 장식하는 짐 호킨스의 단독 모험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요.

그 결과 나온 책은 신나고 엄청나게 빠르면서도 기가 막히게 인상적인 캐릭터들이 부글거리는 모험담입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교훈을 보았지만 (특히 '신사의 명예'와 '충성심'에 대한 주인공들의 태도는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 독자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 역시 진짜 교훈이었다기 보다는 대영제국민의 나르시시즘을 자극하는 트릭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보물섬]의 진짜 가치는 바로 멋진 이야기였다는 것이니까요.

3.

[보물섬]의 히트는 수많은 아류작과 '속편'들, 각색물들을 낳았습니다. 앨런 캠벨 맥린 Allan Campbell McLean, 로버트 리슨 Robert Leeson, 레온 가필드 Leon Garfield와 같은 작가들은 무대가 되는 보물섬이나 해적들을 무대로 한 수많은 소설들을 썼습니다. 그 중 일부는 뻔뻔스럽게도 롱 존 실버의 캐릭터를 표절하기도 하고 실제로 속편 흉내를 내서 그 뒤의 이야기를 다루기도 합니다.

[보물섬]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개작하는 시도도 많습니다. 이미 안소니 퀸이 롱 존 실버 역을 한 SF 버전 [보물섬]이 나와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 개봉될 SF 애니메이션 [타이탄 A.E]도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보물섬] 이야기입니다. (0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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