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DVD, 텔레비전

2010.03.13 22:32

DJUNA 조회 수:1926

어제, 전 로베르 브레송의 [무셰트]를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서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크리스마스 스페셜에 나오는 천박한 농담들을 봤습니다. 알렉 볼드윈의 스웨티 볼 농담은 언제나 봐도 웃기더군요.

비교적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브레송의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중고생 시절 때 카톨릭 문학에 몰두한 적 있었던 터라 원작 소설에 대해서는 알만큼 압니다. 네, 전 베르나노스가 아름다운 소설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무셰트의 갑갑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영화로 또 봐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언젠가는 보겠지만 적어도 어제는 그 날이 아니었단 말이죠.

이럴 때는 비디오 녹화라는 대안이 있습니다. 놓치기는 아까운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하지만 지금 당장 보기는 싫을 땐 비디오로 녹화를 해두면 되지요. 비디오라는 기계를 이용하면 우린 방송국에서 강요하는 방영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마틴 스콜세지 같은 사람들은 영화 녹화를 위해 전문 비서까지 따로 두고 있답니다.

그렇게 녹화한 영화들 중 몇몇은 영영 못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언젠가'가 죽을 때까지 안 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 더글러스 애덤즈는 비디오를 '영화를 대신 봐주는 기계'라고 정의했답니다.

하지만 요새는 녹화도 상당한 부담이 됩니다. 비디오 테이프의 크기는 장난이 아니니까요. 자칫하면 짜증날 정도로 늘어나 관리하기도 힘들게 됩니다. 어느 정도 자제를 해야해요.

게다가 요새는 DVD라는 게 나와서 비디오로 녹화를 하기가 더 싫어졌습니다. 전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팬이라, 전에 EBS에서 했던 그의 영화들을 다 녹화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크라이테리언의 DVD들을 생각해보면 그 테이프들은 대부분 쓸모가 없어요. 그렇다고 DVD를 사자니 녹화해둔 테이프가 있는데 뭣하러 또 사야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작년 1년 동안 전 DVD를 걸신들린 듯 사 모았습니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과연 내가 이런 걸 사서 뭐하나. 수도 없이 되풀이 보는 영화들도 있지만, 한 번만 보고 그냥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는 영화도 있으니까요.

앞으로 그런 생각이 더 들 겁니다. 요새 DVD의 수명이 몇 년이나 되겠어요? 곧 HD 텔레비전이 보편화될 것이고 DVD도 또 그에 맞게 업그레이드될 겁니다. 그렇다면 요새 나오는 DVD의 수명은 기껏해야 10년이죠. 10년 뒤면 전 또 새 기기와 소스를 사들이느라 바쁠 겁니다.

하지만 VOD라는 것도 있습니다. 미래가 되면 꼭 이런 식으로 영화를 저장한 플라스틱 판을 보존하지 않아도 영화를 보다 쉽게 볼 수 있겠지요. 사람들은 방송국의 강압적인 방영시간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겁니다.

그 때가 되어도 전 계속 이런 식으로 비디오나 DVD를 사들일까요? 아무래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를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영화'를 사들이는 건 아닙니다. 전 그 영화를 어떻게든 '소유'하고 싶습니다. DVD와 비디오는 그런 환상을 저에게 안겨줍니다. 제가 DVD를 샀다고 해서 정말 제가 오슨 웰즈의 [악의 손길]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0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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