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라포바, 디킨스, 대장금, 열아홉 순정

2010.03.20 21:55

DJUNA 조회 수:3130

얼마 전에 전 유튜브에 올라온 마리아 샤라포바의 1분짜리 새 나이키 광고를 보고 중독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래요. 마리아 샤라포바가 호텔에서 나와 차를 타고 경기장에 들어갈 때까지 그 주변 사람들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I Feel Pretty"를 부릅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샤라포바가 특유의 괴성과 함께 강력한 스크로크를 과시하면서 뚝 끊어져 버리죠. 결국 이 광고의 의미는 샤라포바가 얼굴만 예쁜 사람이 아니라 실력도 있는 선수라는 말이겠죠. 이 광고가 방영될 무렵 US오픈에서 이겼다고 들었습니다. 타이밍이 좋았네요.

왜 제가 이 광고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샤라포바 팬이라서? 아뇨, 전 스포츠팬이 아닙니다. 이 사람의 경기를 제대로 본 적도 없고요. 물론 광고나 사진들은 가끔 봤고 예쁘다고도 생각하며 PSP로 [버추어 테니스] 게임을 할 때 습관적으로 이 사람을 선택하긴 하지만 그게 팬이라는 뜻은 아니죠.

그렇다면 뮤지컬 요소 때문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전 번스타인과 손드하임의 이 작은 고전이 상업광고 안에서 경쾌하게 재해석되는 방식이 맘에 들었습니다. 이 1분짜리 광고는 어떻게 보면 로버트 와이즈/제롬 로빈스의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한 뮤지컬이었어요.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제가 좋았던 건 이 광고의 스케일이었어요. 후리후리한 금발 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호텔에서 경기장으로 가는 것이 전부인 이 짧은 광고가 담고 있는 영역은 은근히 크고 광대했습니다. 호텔 메이드, 거만한 호텔리어, 로비에서 죽치고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부유한 투숙객, 잘생긴 도어맨, 리무진 운전사, 오토바이를 탄 파파라치, 리포터, 팬들, 촬영기사, 심판, 상대 테니스 선수들로 구성된 거대한 세계였지요. 그들은 단순히 배경이 아닌, 거미줄처럼 짜인 섬세한 시스템을 구성하는 부품들이면서도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주체들이었습니다. 이건 1분짜리 대하드라마였어요.

그 때 전 왜 아직도 사람들이 찰스 디킨스나 오노르 드 발자크의 소설들을 읽으며 매료되는지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소설에는 거대한 세계의 느낌이 있습니다. 밑바닥의 소매치기 고아소년에서부터 부패한 경찰, 건실한 중산계급의 상인, 부유한 시골 귀족들이 다양한 드라마틱한 사건들로 얽히면서 그들이 속해 있는 거대한 19세기의 시민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여주었지요. 이런 책들을 읽는 건 굉장히 흥분되는 경험입니다. 책을 읽기 귀찮다면 앤드루 데이비스가 멋들어지게 각색한 BBC 미니시리즈를 보면 되는 거겠지만요. 그 경험도 괜찮습니다. 얼마 전에 그가 각색한 텔레비전 시리즈 [황폐한 집]을 보셨는지요?

자연스럽게 이 생각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연결됩니다. 영화와 비교해 텔레비전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러닝타임입니다. 발자크나 디킨즈의 소설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것도 영화가 아닌 텔레비전 시리즈죠. 적당히 리듬을 타고 끊는 방법만 안다면 텔레비전이야 말로 우리가 사는 세계를 삭제 없이 담을 수 있는 거대한 그릇입니다.

그 때 전 왜 사람들이 [대장금]에 그렇게 매료되었는지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 때까지 다른 방송국에서 ‘대하드라마’로 만들었던 다른 사극보다 다루고 있는 소재의 폭이 넓었습니다. 보통 위대한 사람들이 속해 있던 최상층만을 다루던 사극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천민인 백정에서부터 왕족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담고 있었지요. 그 사실성을 의심하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지만, [대장금]만큼 조선시대의 사회를 넓으면서도 조밀하게 그린 텔레비전 시리즈가 드물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건 찰스 디킨즈나 오노르 드 발자크의 책이 주는 거대한 경험과 맞먹었지요.

그러다 KBS 주말연속극 [열아홉 순정]으로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전 [논스톱 5] 때부터 구혜선을 귀여워하는 편이라 이 시리즈를 가끔 배경으로 틀어놓고 보는데, 이 작품도 따지고 보면 폭이 상당히 넓은 편이긴 합니다. 청소부 일을 하는 연변처녀에서부터 사회 상류층 가족까지 꽤 넓은 영역을 커버하고 있지요. 그런데도 이 작품이 작게 느껴지는 건 이 다양한 사람들이 극도로 공식화된 관습으로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서울역과 종로5가 사이만 죽어라 반복하는 거죠. 국화에게 돈봉투를 건내며 아들에게서 국화를 떼어놓으려는 윤후 엄마를 보면서 ‘지금 저 시리즈가 종로 3가를 지나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 건 저 뿐만이 아닐 겁니다.

모든 이야기들이 대하드라마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멀쩡하게 놓여 있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을 외면하고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는 것 역시 비정상적이죠. 세상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면서 살아갑니다. 그 다양한 연결성을 파헤치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야기꾼의 의무입니다. 아무리 시청자들이 1호선의 그 짧은 구역에 머물고 싶어 한다고 해도 말이죠. (06/09/1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