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2008) [7회-8회]

2010.04.18 20:05

DJUNA 조회 수:3873

각본: 이은영 연출: 장태유, 진혁 출연: 문근영, 박신양, 문채원, 류승룡, 배수빈, 이준, 안석환, 임지은, 박진우, 이미영, 김응수, 박혁권, 한정수, 김유정, 임호

7회는 가장 약한 에피소드였습니다. 내용과 상관없이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티가 났죠. 문근영의 부상이 제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계획대로 진행되었다고 해도 7화에서 어느 정도 김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단 말이죠. 그 증거로 이 에피소드에서 약한 부분들은 대부분 후반부 동제각화 파트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거친 편집에도 불구하고 전반부의 닷냥 커플 파트는 여전히 꽤 힘이 셌죠.

아이러니컬합니다. [바람의 화원]의 아이디어는 김홍도/신윤복에 대한 두 가지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하나는 [미인도]가 신윤복의 자화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홍도와 신윤복이 정조의 명을 받아 동제각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논리만 따진다면 동제각화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요? 에피소드 후반에 스토리만 대충 따라가다 말았습니다.

이건 사실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작의 동제각화를 이야기를 짜임새있는 드라마로 보여주는 건 결코 쉽지 않아요. 모든 게 내면화되어 있으니까요. 표면상으로 두 화가는 그림을 그려 왕에게 바치고 왕은 품평을 합니다. 하지만 진짜 드라마는 제자의 재능에 감탄하고 질투심을 느끼고 좌절하는 김홍도의 내면에서 벌어지지요. 이걸 어떻게 텔레비전 드라마로 옮길 수 있을까요? 드라마에서는 보이스 오버를 시도해봤습니다. 하지만 이 수법은 고루하고 평면적이며 어색합니다. 이런 걸로 한 회를 다 채우느니 박신양이 초딩처럼 삐쳐서 투덜대는 것을 보여주는 게 더 낫지요.

여기서 우리는 해묵은 질문과 부딪히게 됩니다. 예술과 창작과정을 어떻게 보여주어야 합니까? 그대로 보여주는 건 어렵습니다. 대부분 창작과정이란 결코 재미있거나 드라마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게다가 미술은 기본적으로 정적인 예술입니다. 문학으로는 어떻게든 커버가 될 수 있겠지만 끊임없이 시청각적 자극을 제공해주어야 하는 텔레비전 시리즈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몇 가지 클리셰가 있습니다. 옛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창작 동기에 로맨티시즘을 부여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고전 작곡가들의 걸작들은 모두 실연당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최근 만화책이나 드라마에서는 스포츠화가 유행인 것 같습니다. 승패가 갈리는 대결을 설정해 서스펜스를 부여하는 것이죠. 움베르토 에코 이후 비정상적으로 유행한 역사추리물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작품이 우리가 몰랐던 과정을 통해 창작되었고 보기와는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는 이 모든 것들을 다 조금씩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오풍정]에 빨간 치마 아가씨가 그려지기 위해서는 닷냥 커플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 그림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아슬아슬하게 데드라인이 다가오는 동안 도화서 시험을 치러야 하고요. [기다림]의 주인공은 정순왕후이고 신윤복이 김홍도와 비슷한 소재로 그림을 그린 건 정조의 명 때문입니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신윤복에게 물어볼 수는 없지만, 그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확신해도 됩니다. 예술가들의 삶이란 그렇게 재미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꾸준히 걸작들을 남겨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거장들의 삶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나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베토벤이나 반 고흐의 창작 과정도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재미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들을 그린 영화들이 보여주는 건 대부분 실제 창작 과정이 아니라 창작 과정에 대한 환상입니다. 이해됩니다. 영화에서는 진실보다 드라마가 먼저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드라마가 어떤 형식을 통해 구현되어야 최선의 효과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기서 가장 좋은 예가 될 수 있는 건 4,5편의 [단오풍정] 소동입니다. (원래 7편의 예를 들어야 맞겠지만 전 그건 그냥 실패했다고 보기 때문에 잠시 넘기겠습니다.)

우선 소설을 보겠습니다. 이정명의 원작 소설에서 [단오풍정]이 그려지는 도화서 시험 장면은 거의 완벽합니다. 시쳇말로 '무심하게 쉬크'한 우리의 주인공 신윤복은 시험 중간에 뛰쳐나와 저잣거리에서 시각 정보를 얻고 마지막에 맘에 드는 기생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와 그 모든 것들을 종이 위에 터트리듯 옮긴 뒤 만족합니다. 그림을 보고 떠들어대는 생도들이나 화원들의 소동을 무시한 채요.

전 여전히 이걸 그대로 옮겼다면 드라마가 더 나았을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원래 있는 아름답고 간결한 구조물에 장르적 혹을 달았습니다. 계곡 소동은 코미디이고, 닷냥 라인은 로맨스이고, 우물 소동은 서스펜스물입니다. 이에 대해 제가 불만이냐고요? 아닙니다. 다들 재미있고 그 시퀀스 안에서만은 자체논리를 갖고 진행되니까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불완전하고 논리가 맞지 않으며 괴상하지만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르 도구를 엉뚱한 곳에 넣으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시험장에 도착한 신윤복이 [단오풍정]을 그리는 부분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장면은 거의 걸작이 될 수도 있었지만 치명적인 실수로 중간에 주저앉았습니다. 만든 사람들이 장르를 착각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죠. 그림 그리기 전에는 로맨티시즘이 삽입될 수도 있고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장애물을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천재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그건 더 이상 서스펜스 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증거로 신윤복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단 한 번도 향시계를 흘겨보지 않습니다. 그에겐 시간이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적용되어야 할 것은 베드신과 포르노의 논리입니다. 신윤복이 자신의 심상을 종이에 투영하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작품 완성이라는 오르가즘에 도달할 때까지 방해없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굴곡이 있을 수는 있어도 막혀서는 안 되는 것이죠.

소설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갑자기 분노한 장벽수를 등장시켜 그 맥을 끊어버립니다. 그리고 신윤복은 그를 상대로 자신의 작품을 변론해야 하지요. 스포츠물의 논리에 따르면 이는 이치에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신윤복의 그림은 스포츠물이 아니라 에로물이란 말입니다. 이는 섹스 신 중간에 갑자기 엄마 아빠가 들이닥치고 주인공이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고 그들을 쫓아낸 뒤 다시 섹스를 마무리 짓는 것과 같습니다. 장벽수 장면을 잘라내고 한 번 보세요. 느낌이 달라집니다. 도대체 왜 이랬는지 모르겠어요. 작품에 대한 공격과 방어는 나중에 해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슷한 실패가 2편에도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은 신윤복이 아니라 금기 정향입니다. 계월옥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술에 거나하게 취한 도화서 생도들이 기생들을 끼고 놀고 있고, 파티의 호스트인 생도들의 장 장효원은 가야금은 관두고 술이나 따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정향은 (이미 술주정뱅이가 던진 술잔에 맞아 가야금 줄도 하나 끊어진 뒤입니다) "곡명은... [동천련로 항장곡]입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중간에 말줄임표를 넣은 이유는 그 동안 엄청나게 요란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드럼 소리가 쿵쿵 울리고 사람들은 놀라서 정향의 얼굴을 바라보고... 마치 곧 총소리가 울리고 100미터 전력 질주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 장면의 포인트는 윤복과 정향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정향의 음악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정향의 '가치'를 표면적으로 보여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효과를 100퍼센트 내려면 도입부에서 정향을 술주정뱅이의 소음 속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이건 재편집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왜들 이러는 걸까요? 고민하다가 가설을 한 가지 만들어냈습니다. 지금까지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두 가지 이상의 감정과 생각을 동시에 품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죠. 그건 스토리 구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늘 단선적이고 직선적이며 메시지는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과연 모든 시퀀스들이 그렇게 단순하기만 해야 합니까? 이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모순되는 생각을 동시에 못하는 겁니까? 왜 이들은 그림의 메시지와 메시지를 자신의 입을 통해 직접 밝혀야 합니까? 왜 가야금 명인이 등장하면 꼭 팡파레를 울려야 합니까?

이렇게 머리를 굴리다보니, 7화와 8화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평에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기억하시겠지만, 7편 중반까지 윤복은 정향을 잃은 슬픔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술을 진탕 마시고 기절했다 깨어난 뒤, 이 아이는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정향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윤복이 아니라 작가와 연출자입니다. 중반 이후 동제각화와 어진 소동은 전혀 로맨스에 방해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즌하의 어명에 대한 압박감이나 국밥에 대한 갈망 사이에 살짝 로맨스의 기억을 끼워넣어 그 감정을 수백배 강조할 수 있지요. 이건 너무 쉽고 너무나도 재미있으며 방법도 수백만 가지가 넘어서, 전문 이야기꾼들이 한 번도 시도할 생각을 안 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마찬가지로 전 이들이 신한평의 심리묘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넘어간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6회 후반과 7회 초반에서 신한평은 아주 황당한 상황에 몰렸습니다. 자기가 남장한 여자아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 윤복이 기생과 절절한 연애 중이었던 거죠. 그럼 정상적인 각본에서는 당연히 이에 대한 이치에 맞는 반응을 끌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건 얼마 걸리지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계월옥에서 나온 신한평은 윤복을 그냥 바람둥이 남자아이처럼 취급합니다. 왜 약간의 노력만 들이면 엄청 재미있을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가볍게 놓쳐버리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은 모두 단순화의 논리에 희생된 것 같습니다. 캐릭터를 복잡하게 만들 생각이 없는 것이죠.

8회가 재미있었던 건, 이 에피소드에서 만드는 사람들이 미술이라는 소재를 드라마 안에 보다 깊숙히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장면들과는 달리, 8회의 미술은 장르화된 클리셰나 드라마를 끌어가는 도구가 아니라 드라마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어진화사는 서스펜스/스포츠 물의 배경을 제공했고 신윤복 역시 사사로운 동기를 품고 있었지만, 정작 초상화 이야기가 시작되는 동안 김홍도와 신윤복은 순수한 마음으로 초상화와 인간의 얼굴에 집중했습니다. 아무런 장식 없이 그림을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기교 없이 보여주었는데, 그게 드라마가 되었던 겁니다. 이럼 상당한 성공이지요. 그러는 동안 '신윤복, 공재와 만나다'라는 명장면이 태어났다면 더욱 좋은 거고.이제 8회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바람의 화원]은 지금까지 늘 홀수편보다 짝수편의 질이 나았는데, 이게 단순한 징크스인지, 아니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번 주에도 8화가 7회보다 나았지요. 여전히 윤복이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게 슬펐고 여기저기 덜컹거리는 부분이 보였지만 말이죠.

초상화 수업 역시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김홍도와 신윤복은 스승과 제자로 묶을 부류가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신윤복은 김홍도를 만나기도 전에 [기다림]을 그렸고 [송하취생도]를 완벽하게 모사했으며 별다른 과외수업 없이 시험장에서 [단오풍정]을 그렸습니다. 이 아이는 이미 완성된 화가입니다. 스승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초상화 수업을 넣으면 김홍도는 신윤복에게 스승이 될 수 있고, 나중에 이 에피소드를 [미인도]와 엮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전 여전히 이게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놈의 도화서에서는 정말로 학생들에게 초상화의 기초도 가르쳐주지 않았단 말인가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앞으로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가 된다고 해도, 김홍도와 신윤복의 관계는 미술과 그림으로 얽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콤비는 그림을 그리고 미술에 대해 고민하는 프로페셔널일 때 가장 죽이 잘 맞습니다. 김홍도는 짝사랑 하는 연인일 때보다 선배이고 스승일 때 윤복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더 많으며 해야 할 일도 더 많습니다.

이는 [바람의 화원]이 로맨스를 포기하고 그림 이야기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이 [대장금]을 예로 들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어요. 하지만 그건 정당한 비교가 아닙니다. [대장금]에선 종사관 나으리를 빼도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무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장금이는 요리를 하고 사람을 살릴 수 있지요. 하지만 [바람의 화원]에서 타인에 대한 욕망을 빼면 이야기가 붕괴되어 버립니다. 정향에 대한 윤복의 욕망(그것이 무엇이건)이 없다면 [월하정인]과 [월야밀회]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제자에 대한 욕망과 질시가 없다면 김홍도는 무슨 동기로 움직일까요? 여기서 중요한 건 공식화된 멜로드라마의 의무감에 걸려넘어지지 않아도 이들의 욕망을 그리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통제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도에서 방향을 바꾸기도 어렵지요. 첫 6회가 진행되는 동안 시리즈는 멜로드라마 강도에 대한 기준을 세웠습니다. 적어도 윤복과 정향의 이야기는 소설의 비중과 강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로맨스의 강도가 다른 스토리 라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전 앞에서 동제각화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약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에피소드 전반의 강한 멜로드라마가 후반 이야기의 힘을 약화시킨 것도 사실이니까요.

이런 통제는 멜로드라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의 화원]에는 코미디와 멜로드라마, 정치극이 닥치는 대로 섞여 있지요. 이들을 관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데... 유감스럽게도 전 여기에 적절한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전 아직 한국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의 스타일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전 왜 이들이 '웰메이드'에 집착하면서도 노골적인 키치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전 왜 이들이 충분한 해상도와 화면비율을 확보했으면서도 러닝타임 절반을 대갈치기와 코털 클로즈업으로 채우는지 모릅니다. 전 왜 이들이 극적인 장면에 꼭 '한국 드라마용 주제곡'을 넣지 못해 기를 쓰는지 모릅니다. 전 이 모든 것들이 고유의 스타일인지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확답을 내놓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도 음악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하고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바람의 화원]의 음악은 괜찮습니다. 사용되는 음악이 모두 다 좋다는 건 아니에요. 전 소위 [닷냥송]으로 알려진 [눈 길]의 신파 정서는 못 견디겠습니다. [생도청의 아침] 같은 건 그냥 CD로 들으면 견딜만하지만 드라마 음악으로 쓰면 최악인 곡이고요. 하지만 조성모가 부르는 [바람의 노래]는 다소 싸게 들리는 편곡에도 불구하고 나쁘지 않으며, [그리움]은 그냥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리고 영화음악으로서 [도화서]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개별 음악의 질이 아닙니다. 이들을 엮는 방식에 있지요. 한마디로 이 시리즈에는 음악이 너무 많이 나옵니다. 캐릭터들의 모든 행동과 감정을 음악으로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져 있지요. 그리고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문근영이 절절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침묵 속에서 그대로 즐기면 됩니다. 음악은 오히려 그 감정을 순수하게 즐기는 데에 방해가 될뿐이지요. 게다가 왜 이렇게 '효과음악'들이 많은 겁니까? [동천련로 항장곡] 전에 나오는 둥둥거리는 드럼 소리만큼 불필요한 잡음이 너무 많아요. 종종 이들이 시청자들을 장님으로 여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정말 극중에 '주제곡'이 필요합니까?

실제 역사와 허구를 결합하는 방법이나 고증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죠. (08/10/24)

기타등등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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