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2008) [9회-10회]

2010.03.21 19:22

DJUNA 조회 수:3205

각본: 이은영 연출: 장태유, 진혁 출연: 문근영, 박신양, 문채원, 류승룡, 배수빈, 이준, 안석환, 임지은, 박진우, 이미영, 김응수, 박혁권, 임호

9회

전에 7회가 [바람의 화원] 최악의 에피소드라고 했었는데, 그 말을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최악의 에피소드는 9회입니다. 이렇게 빨리 기록을 깨트리다니 슬프군요.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야 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기복의 문제가 아니라 시리즈의 체질과 관계가 있습니다. 신윤복이 도화서에서 나가기 전까지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문제죠.

가장 심각한 건 표면화의 문제입니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원작의 내면화된 드라마를 끊임없이 표면화하고 있다는 점은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여전히 이 자체를 거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에피소드는 너무 얄팍했습니다.

아이디어는 나빠보이지 않습니다. 정조는 어진화사를 위한 화원을 뽑습니다. 스토리 전개를 위해 한 번 해야 할 일이죠. 김홍도의 경쟁상대는 이명기입니다. 어진화사의 경쟁상대로 더할 나위 없죠. 시제로 정조가 제시한 용파는 앞으로 본격적인 테마가 될 사도세자 초상화의 미스터리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여기에 독특한 외모의 실존인물 채제공을 등장시키면 역사지식도 자랑할 수 있고 디테일의 재미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대장금]식 경합을 내세운 건 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무리 기를 써봐야 결국 선배들이 해놓은 일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자기만의 개성을 입증해야 할 이 때에 선배 흉내나 되어서 되겠습니까? 이런 식의 설정은 스포츠화를 지나치게 강조해서 애써 꺼내놓은 예술이라는 테마와 드라마의 신빙성을 심각하게 손상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건 그냥 말이 안 됩니다. 몇 십 년 동안 궁에 있었던 벼슬아치들이 채제공의 얼굴을 모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적어도 김홍도 정도라면 당연히 얼굴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럼 채제공은 이상적인 몽타주 모델이 아니죠. 바깥 사팔뜨기라는 퀴즈를 통과한다면 더 이상 용파 테스트는 의미가 없습니다. 김홍도 역시 시험이 끝난 뒤에 그렇게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을 거고요.

예술 토론을 핑계로 벌어지는 말싸움 역시 수상쩍습니다. 이명기와 김홍도를 형식주의자와 로맨티시스트의 대립으로 몰고간 건 너무 쉬웠고 그래서 거짓말입니다. 마지막에 신윤복과 김홍도가 그려놓은 초상화를 보고 내면 대신 표면에 집착한다고 비난하던 화원들도 마찬가지로 괴상합니다. 언제부터 조선시대 초상화가들이 그렇게 내숭을 떨었습니까? 그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그렸습니다.

가장 짜증나는 것은 초상화 자체입니다. 척 봐도 알겠지만 이 그림은 이명기가 1792년에 그린 채제공의 초상화를 모방한 것입니다. 실존하는 화가의 작품을 끌어다가 그 화가의 경쟁상대에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화가의 개성과 자세를 그대로 이용해 그 화가를 공격하는 무기로 쓴 것입니다. 원본에 충실하느라 채제공의 나이를 실제보다 열 몇 살이나 늙게 만드는 (고의적인?) 실수를 저지르면서요. 이게 말이 됩니까? 타이밍도 참. 가뜩이나 [바람의 화원]의 역사 왜곡 비판이 돌고 있는데 말이죠.

슬슬 이 작품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안휘준 교수의 불평에 대해서는 깊이 짚고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여자 신윤복' 아이디어에 안교수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 전체에 대해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별 의미없는 일입니다. 어차피 역사적 허구라고 자막까지 깔고 시작하는 시리즈이고 시청자들 대부분 이 가설이 허구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드라마 때문에 신윤복 여성설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요? 그건 오히려 교육의 과정으로 보면 됩니다. 그리고 원래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과격한 아이디어를 역사에 투영하는 것. 좋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필수적인 고증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과격한 아이디어가 더 설득력을 얻기 때문이지요. 물론 21세기의 드라마가 완벽하게 18세기 조선을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며 어느 정도 상상의 여유 역시 허락해야 합니다. 그래도 스토리의 개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하한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김홍도의 안경 말입니다. 그는 왜 그 안경이 필요합니까? 박신양에게 안경이 없으면 서운하기 때문에?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안경이 없으면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없다는 이번 에피소드의 설정은 괴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원시여야 하고 그의 안경은 돋보기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평상시에도 종종 그 안경을 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돋보기 안경을 걸어다닐 때도 쓰고 다닙니까? 당시 조선시대 애체는 대부분 눈 보호와 과시용이었으니 김홍도의 안경 역시 도수가 없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도수가 있었다면 묘향산 호랑이를 그리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겠지요. 돋보기였다면 따로 가져오는 게 당연하고요.

시스템 묘사는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효원이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자비대령화원이라는 직책이 정조 1년에 과연 있었습니까? 예판의 '정조 1년' 이야기는 실수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재방송 때 반영하겠죠. 사실 목계월이 기모로 있는 계월옥의 묘사도 수상쩍은 건 마찬가지인데, 이건 저보다 조선 풍속사에 밝은 분들이 설명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것들은 구체적인 디테일의 문제지만 실존인물을 다루는 방식도 자꾸 신경이 쓰입니다. 전 실존인물을 그리는 데에 상상력을 허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심지어 이를 통해 여자 신윤복이 나온다고 해도 말이죠. 전 정순왕후가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설정도 용납합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그 캐릭터가 더 멋있어졌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여기에도 선은 있습니다. 이번 이명기의 묘사는 아무리 봐도 그 선을 넘어섰습니다. 임호의 캐릭터 묘사가 썩 재미있긴 해도 말이죠. 많이 야비하기도 합니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이런 식으로 남의 그림까지 훔치지 않아도 충분히 위대합니다.

규칙을 완전히 위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신윤복과 김홍도의 이야기를 당시 궁중음모에 지나치게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것 역시 스토리에 무리를 줍니다. 어차피 원작의 주인공들도 궁중음모와 연결되어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의 무리한 노력 때문에 이야기는 지나치게 통속적이 되고 흥이 떨어집니다. 주인공에게 불필요한 역사적 중요성을 달아주려는 노력은 그냥 촌스럽고요. 이 드라마가 그렇게까지 '격조'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첫회부터 알고 있지만 꼭 이렇게 작정하고 일을 망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그마나 이득을 본 건 김조년 캐릭터와 그를 연기한 류승룡일 것입니다. 설정에 갇혀 기가 죽어 있던 두 주연배우들과는 달리 류승룡은 이번에 자신의 카리스마와 연기력을 뽐낼 기회를 얻었습니다. 앞으로를 기대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다들 라인에 신경을 쓰느라 중반 이후에 문근영과 류승룡의 연기대결이 나와야 한다는 걸 잊고 있군요.

하지만 여전히 캐릭터 설정의 일부는 신경이 쓰입니다. 에피소드 후반의 내기판 묘사는 김조년의 성격과도 맞지 않고 기본설정과도 어긋납니다. 그렇게 손님들을 겁주어서야 다음 손님들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클라이맥스 장면이 심하게 걱정됩니다. 그리고 드라마가 중반에 접어들었는데도 여전히 설청의 캐릭터는 따로 놀아요. 이걸 어쩌면 좋답니까?

10회

10회는 9회보다 많이 낫습니다. 극적으로 거의 무의미한 경합 에피소드를 간신히 건너 뛰고 본론에 들어갔기 때문이지요. 사실 구성이나 논리를 따른다면 본격적인 어진화사는 8회나 9회에 시작되는 게 맞습니다. 이 시리즈는 길이를 늘이기 위해 노골적인 필러들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이유(예술적이라기보다는 사업적인)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덜 늘어지는 건 아닙니다.

이야기는 대충 두 덩어리로 나뉘어져 있다고 봅니다. 전반부에서는 김홍도와 신윤복이 같은 방을 쓰면서 겪는 소동으로 슬랩스틱 코미디가 주를 이룹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 그들은 마침내 왕의 초상화를 그리고 정조로부터 사도세자 초상화의 비밀을 듣습니다. 이 부분은 미술 드라마 + 미스터리입니다.

도입부의 코미디는 재미있고 유치하지만 먹히는 농담 소재들도 몇 개 가지고 있습니다. 윤복의 가슴 묶는 천을 이용한 농담들이 그렇죠. 하지만 소재의 희극성을 최대한으로 뽑아내기엔 지나치게 호흡이 깁니다. 절반 정도 줄였으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코미디는 짧게 치고 빠질수록 좋죠. 윤복의 목욕 소동은 지나치게 길어서 보는 게 힘겨울 정도입니다. 근데 웃기죠. 에로틱한 면은 전혀 없는 장면인데, 홍보팀에서는 여기에 '문근영 목욕신'이라고 이름을 붙여 떡밥을 던졌잖아요. 그걸 또 많은 사람들이 물은 거고. 노출만 따지면 이번 목욕장면은 문근영이 나오는 게살몽땅 광고보다 얌전한데 말이죠.

여기서부터 슬슬 박신양이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전 신윤복에 비해 김홍도의 역할이 축소되었다는 일반적인 불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의 화원]은 원래 신윤복의 이야기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은 신윤복을 바라보는 김홍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중반부터 이들과 김조년의 대립이 분명해지는 후반까지 김홍도의 내면 갈등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요. 문제는 박신양을 포함한 시리즈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직 이 갈등을 어떻게 표면화시켜야 할지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제 막 내면 갈등의 발단 단계인데, 벌써 비슷비슷한 [군선도] 플래시백이 두 번이나 나왔습니다. 억압된 욕망에 시달리는 남자의 내면갈등이라는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소재가 나왔는데, 이걸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죠. 그 때문인지 박신양의 연기는 최근 들어 계속 위축되어 보입니다. 간신히 코미디를 할 때만 기운을 차리는데, 그래도 이전의 흥을 따라잡지는 못해요.

시리즈의 후반부는 지금까지 3회나 장황하게 끈 어진화사 에피소드의 본론입니다. 이거 기다리느라 지쳐 죽는 줄 알았습니다. 특히 사도세자 이야기는요. 이 시리즈가 미스터리를 처리하는 방식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원작의 미스터리 자체가 엉성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까발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정순왕후 패거리들과 정조의 표면적 대립을 줄이고 미스터리에 조금 더 시간을 투자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특히 김조년이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부분은 어떻게 다룰지 궁금하군요. 지금으로서는 원작의 길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후반부의 재미는 어진을 그리는 화가의 작업을 꼼꼼하고 정교하게 보여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과정이 얼마나 성실한 고증에 바탕을 두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9화의 에피소드와는 달리 이 작업과정의 묘사는 믿음직한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하긴 드라마에선 그게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겠죠.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시청자들을 설득하는 것.

남은 건? 아, 불쌍한 영복이 있군요. 이 친구의 결말을 너무 암담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합니다. 잠재적인 여자친구를 옆에 찔러주었으면 활용도 좀 하고요. 하여간 이 친구는 10회에서 가장 울림이 큰 인물입니다. 나오는 장면은 짧지만 말이죠. 문제는 과연 영복의 희생이 윤복에게 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윤복은 이미 [단오풍정]을 그리지 않았습니까?

시간이 좀 남았으니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를 조금 건드려보기로 하죠. [미인도] 말입니다. [미인도]가 신윤복의 자화상이라는 것은 소설의 2대 아이디어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걸 드라마에서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걱정되지 않습니까? 문근영은 [미인도]의 모델과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눈매부터 다르지요. 이걸 그려놓고 자화상이라고 우긴다면 여러분은 심각하게 신윤복의 시력을 걱정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모델이라고 우기자니 이유가 부족하고 특별히 고를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정향이 있긴 하지만 문채원은 [단오풍정]의 빨간 치마 아가씨와 닮았지 [미인도] 모델과는 별로 닮지 않았죠. 결국 자화상이라고 우기고 떠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대안의 가능성을 한 번 고려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08/10/31)

기타등등

1. 메이크업으로도 문근영 코에 난 멍을 완전히 감출 수 없군요. 안타까워요.

2. 설청은 도대체 몇 살이랍니까? 왜 이 사람만 10년 동안 나이를 하나도 안 먹은 거죠?

3. 9회에서 '혜원 신윤복'이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언급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건 그냥 실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혜원이라는 호가 만들어지는 장면을 계획에 두고 있었겠죠. 하지만 이렇게 호가 나왔으니 그 아이디어는 물 건너 갔습니다. 사실 그 아이디어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예요. 결코 신윤복의 손으로 돌아오지 못할 이전 그림들에도 혜원의 낙관이 찍혀 있는 걸요. 하긴 그걸 엄밀하게 따지다간 [기다림] 에피소드도 날아가버리겠죠.

4. 예고편이 없더군요. 9화 때 유달리 심하게 티가 나긴 했지만, 이 사람들 시간이 딸리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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