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2008) [19회-20회]

2010.03.21 20:19

DJUNA 조회 수:8167

각본: 이은영 연출: 장태유, 진혁 출연: 문근영, 박신양, 문채원, 류승룡, 배수빈, 이준, 안석환, 임지은, 박진우, 이미영, 김응수, 박혁권

19회

19회는 6분 길이의 과거 에피소드 요약정리로 시작됩니다. 그 뒤에 전편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이 4분 정도 길이로 재현되니, 실제 러닝타임은 기껏해야 46분 분량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에피소드들 중 가장 짧지요.

어쩌자고 이렇게 짧은 걸까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화사 대결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에피소드 하나를 잡아 크게 다루어야 하지요. 끝에 늘 클리프행어를 다는 버릇이 있는 시리즈의 성격을 고려해볼 때, 완전히 결말이 나기 직전에 이야기를 끝내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선택.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구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화사 대결에 1시간을 빼곡하게 채울만한 이야기가 없는 건 역시 당연한 일이니 이야기가 짧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 다 이해합니다. 이해한다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에피소드의 졸렬함이 옹호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에피소드가 드라마나 영화라는 매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 장면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예술가들이 아닌 비평가들입니다. 이미 모든 액션이 끝난 뒤에 거기에 주석을 다는 사람들이지요. 돈 많고 시간 많은 노인네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수다를 떠는 게 전부죠. 아무리 제시된 그림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해도 이건 시청자들에게 사건을 직접 보여주어야 하는 드라마라는 장르에 맞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린 화가가 직접 뛰어들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설정은 한없이 민망하고요. (이 이야기는 정말 수없이 되풀이하게 되는군요.) 따라서 프로젝트가 시작되자마자 각색을 통한 보완작업을 계획했어야 마땅한 부분인데, 이 사람들은 그냥 원작을 따라갔습니다. 정말 전 이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다들 다른 행성에서 왔나 봐요.

그들이 설정의 밋밋함을 보완하기 위해 동원한 장치들도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작품에 도입된 CG는 초라함의 극을 달립니다. 재현 장면들은 우스꽝스럽고요. 점점 전 배우들을 동원해 동양화를 재현하려는 시도가 올바른 예술적 선택인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건 데릭 저먼이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재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작업입니다. 현실세계를 완벽하게 모방하려는 서구 예술가의 그림과 그를 보다 여유롭게 재해석하는 동양화를 일대일로 놔서는 안 되지요. 정 모델이 되는 현실세계를 끌어들이고 싶다면 그냥 미완성의 재료로 보여주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캐릭터들을 다루는 방법에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주인공들은 정말 아무 것도 안 합니다. 심지어 그림도 안 그리죠. 원작에서도 그림 그리는 장면은 없지 않냐고요? 언제부터 이 드라마가 원작에 그렇게 충실했습니까? 그나마 하는 것은 자기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인데 화가가 자기... 이 이야기를 또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이 설정도 지나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참을 만합니다. 늘 주인공이 드라마의 한가운데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윤복의 캐릭터를 보면 그런 소리도 안 나옵니다. 얘는 지금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복수를 하고 정향을 구하는 건 모두 윤복의 일이에요. 얘가 가장 바쁘고 가장 용감하고 가장 민첩하고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야 할 때지요. 하지만 모든 일들은 홍도가 하고 윤복은 그냥 멍 때리고만 있어요. 언제부터 윤복이 이렇게 작고 초라한 역이었습니까? 이걸 시청자들이 받아들일 거라고 여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지막 회 바로 전에도 주인공이 이러고 있다는 건 이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개념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설명은 불가능해요.

저에게 또 거슬리는 건 화사 대결의 스포츠화입니다. 물론 이 설정 자체에 스포츠의 성격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 대결을 마치 현대 권투 경기 중계처럼 그리고 있어요. 김조년이 아나운서 노릇을 하며 선수들과 심판들을 소개하는 건 도가 지나칩니다. 류승룡의 좋은 발성이 아나운서 노릇과 브리핑에 낭비가 되고 있는 걸 보니 그냥 슬프군요. 그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배우입니다.

20회

20회는 시리즈 최악의 에피소드입니다. 능력 없는 사람들이 고집을 부리면 무슨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준다고 할까요. 처음부터 많이 망가질 거라고는 예상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심할 줄은 몰랐지만. 몇몇 사람들은 이를 생방송으로 찍어대는 환경 때문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는 아무리 제대로 찍어도 소용없죠. 이건 시작부터 잘못된 기획이었습니다. 아무리 재편집을 해도 나아질 수 있는 에피소드가 아니에요. 만드는 사람들을 바꾸지 않는 한은.

도대체 어쩌자고 이 사람들은 이러는 걸까요? 척 봐도 이 드라마는 신윤복의 이야기여야 합니다. 제목에 나오는 ‘바람의 화원’이 신윤복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윤복은 김홍도가 함께 하는 순간부터 매력과 지능과 의지력을 조금씩 조직적으로 약탈당합니다. 끝에 가서는 혼자 아무 것도 못하고 최면에 걸린 것처럼 홍도를 따라다니며 ‘스승님’을 부르고 있지요.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지 않습니까? 모르겠다고요? 장르를 한번 바꾸어 생각해보시죠.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뱀파이어물입니다. 여기엔 정식 명칭도 있습니다. 심리적 뱀파이어 Psychological Vampire라고 하지요. 이는 주변 사람들의 심리적 에너지를 빨아먹는 괴물을 가리킵니다. 홍도를 뱀파이어로 놓고 본다면 모든 미스터리가 풀리고 진짜 이야기가 보입니다. 왜 홍도가 제자를 죽어라 스토킹했는지, 왜 홍도와 같은 방을 쓰면서부터 윤복이 기억을 잃고 성격이 흐릿해졌는지. 심지어 윤복에 대한 홍도의 감정도 설명할 수 있지요. 셰리단 레 파누는 [카르밀라]에서 “뱀파이어는 특별한 이유에 있어서, 마치 사랑의 열정과도 같이 마음을 빼앗기는 격렬한 힘으로 누군가에게 매혹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뱀파이어들은 먹잇감에게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죠. 홍도가 윤복이 여자라는 걸 모르는 동안에도 끌렸던 건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윤복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사라진 것도 이것으로 설명 가능합니다. 홍도가 잠시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동안 그의 영향력이 희미해졌고 그 틈을 통해 정신을 차려 달아났던 거죠. 와, 이건 닷냥팬들에게 희소식이 될 수도 있겠군요. 이런 식의 이야기 전개를 바란 사람들은 아무도 없겠지만.

왜 원작의 비극적인 연인이었던 김홍도가 뱀파이어로 추락했고 이야기가 의도하지 않은 호러물이 되었던 걸까요? 당연히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봐도 이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뭔가 뱀파이어적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부자연스럽고 기형적인 무언가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의 예술적 흐름을 차단하고 그 자리에 뭔가 비정상적인 것을 심은 것이죠. 이건 그냥 “신윤복이 여자니까 멜로를 심을 수 있겠다”식의 유치한 원론이나 이성애적 편견을 넘어서는 어떤 것입니다.

당연히 음모론이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디씨인사이드의 [바람의 화원] 갤러리에도 지금 하나 돌아다니고 있지요. 전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썩 그럴싸해 보입니다. 적어도 이 가설은 드라마의 뱀파이어적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음모론이 자연스럽게 먹힌다면,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드라마는 결코 성공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드라마는 흐름의 예술입니다. 감정은 유려하게 흘러야 합니다. 아무리 회상신을 넣고 조성모 음악을 깔면서 시청자들에게 최면을 걸려고 해도 흐르지 않는 건 흐르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어색한 상황에 외부의 음모론이 이치에 맞는 설명을 제공한다면 그건 예술적으로 끝난 겁니다. 산송장이지요. 뱀파이어란 말입니다.

하여간 20회의 모양새는 꼴보기 싫습니다. 일단 당연히 넣어야 할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우선 이 이야기의 진정한 클라이막스여야 할 그림자 마술 장면은 어디로 간 겁니까? 그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주제 자체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소설에서 가장 영화적인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걸 그냥 건너뛰었습니다. 뱀파이어 홍도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이죠. 하긴 넣었어도 별 소용이 없었겠습니다. 이미 윤복은 여장을 두 번이나 했고 지금 홍도에게 기를 다 빨려 의지란 것이 남아 있지 않으니. 참, 뱀파이어 홍도가 윤복의 뒤치다꺼리를 계속 해준 이유를 아십니까? 그래야 먹잇감이 아직도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다른 사람들의 의심 없이 더 오랫동안 식량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믿거나 말거나.

새로 넣은 장면들은 어색하거나 질척거립니다. 특히 윤복과 홍도가 함께 있는 장면은 느끼하기가 버터로 만든 곤죽 같습니다. 아마 여기서부터 몇몇 분들은 제 뱀파이어 이론이 고마울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적어도 덜 느끼할 테니까요. 정향의 이별장면은 대실망입니다. 몇몇 분들은 대인배 정향을 예찬하실 수도 있지만 사람 감정이 정말 그렇습니까? 갑자기 김조커라는 별명을 얻은 김조년의 어이없는 퇴장은 어떻습니까? 그 이후 홍도와 윤복을 엮고 떼어놓기 위해 만들어놓은 장황한 변명들은 맘에 드십니까? 그리고 정향과 윤복은 도대체 어디로 떠났답니까? 이 나라에서 그 작은 배를 타고 짐도 없이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그나마 위엄을 갖추고 살아남은 건 정순왕후뿐입니다. 참, 설청도 두 장면 정도는 예뻤습니다. 생각해 보니 김효선씨는 참 딱하군요. 남장여자가 주인공인 이야기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남장무사로 나와 주제를 흐리다가 장기인 무술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죽다니.

슬슬 장태유 피디의 죄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의 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첫째, 무능입니다. 그에게는 자그마치 1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거의 전작제가 가능했던 기간이죠. 적어도 [다모] 정도의 완성도는 보장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시간 배분을 제대로 못한 통에 초반 몇 회만 빼고는 생방송으로 질주해야 했습니다. 여기엔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는 피디로서 무능합니다.

둘째는 철학의 빈곤입니다. 섹스와 예술, 역사와 허구에 대해 무한한 이야기를 펼쳐놓을 수 있는 캔버스가 주어졌는데도 그의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신윤복이 여자라면...” 말을 맺기도 싫군요.

셋째는 에고의 과잉입니다. 척 봐도 사방에서 이치에 맞는 피드백이 쏟아질만한 상황인데도 그는 조금도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자기가 뭔가 대단한 걸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경향이 시리즈 끝까지 보입니다.

넷째는 그의 사생활 관리입니다. 전 박신양에 대한 그의 감정이 육체적인 것인지, 플라토닉한 것인지 모릅니다. 남의 사생활에 참견할 이유는 없죠. 하지만 그런 개인적 감정이 드라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방을 하나 따로 잡고 직접 해결할 일이지 괜히 드라마를 중간도구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드라마는 공공재입니다.

이 모든 것은 리더의 자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철학이 빈곤한 무능한 리더가 공사를 구분 못하고 똥고집을 부린다면 아무리 재능 있는 사람들이 밑에서 뺑이를 쳐도 결과가 좋을 수 없단 말입니다. 이런 경우... 음...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드라마 이야기가 맞습니까?

그럼 누가 이 역할을 맡아야 했던 걸까? 수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고 있노라니 거기서 지금 판타지 사극 멜로 [천지연]을 찍고 있는 손규호 피디가 훨씬 적역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특히 그가 B팀 감독인 주준영을 이렇게 몰아붙였을 때 전 마치 [바람의 화원] 이야기가 아닌가 의심했던 것입니다. "야, 그림만 뻔지르르하게-- 인물감정 죄다 놓치고 배우 연기 컨트롤 하나도 못하고 말이야! 도대체 사람 냄새를 찾아볼 수 있어야지, 재촬영해!"

전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전 게시판의 라인 대립에 대해 뭔가 근사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간단히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건 만든 사람들 잘못입니다. 라인 대립은 필연적으로 작품의 내용에 종속됩니다. 만약 20회가 될 때까지 라인 대립이 남아있다면 그건 각자 라인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시청자들의 잘못이 아니라 끝까지 주인공의 감정을 이치에 맞게 설명하지 못한 제작진의 잘못입니다.

전 캐릭터 죽이기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예수가 아니라면 멀쩡한 캐릭터를 죽이지 마세요. 절대로 다시 안 살아납니다. 뒤마가 에드몽 당테스를 학대했던 건 그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몬테 크리스토 백작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주인공에게 그런 발전을 가져다 줄 능력이 없다면 처음부터 죽이지 않는 게 낫습니다.

전 심지어 닷냥팬들 사이에서까지 가끔 볼 수 있었던 호모포비아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전 이미 몇 년 전 클리셰 사전에 거기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을 읽으시길. 그래도 여전히 “[베바] 애들이 우리 드라마 보고 동성애물이래!”하고 울면서 돌아오는 시청자들에겐 마법의 개념을 하나 선물로 드리고 싶군요. 그건 레즈비언 연속체 lesbian continuum라고 합니다. 미국의 시인 아드리안 리치가 고안한 이 개념에 꼭 100퍼센트 동조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닷냥 커플에게는 아주 잘 먹힙니다. 적어도 ‘윤복이 정향에게서 여성성 어쩌구’나 ‘예인들끼리 어쩌구’하는 이야기보다 훨씬 낫습니다.

아, 잊었군요. 전 이 시리즈가 한없이 남발했던 변명과 설명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냥 설명하지 마세요! 심지어 작가가 그들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이론 무장이 필요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냥 캐릭터들에게 자유를 주세요. 그들은 작가보다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아니까요! 사랑에 빠진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것은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조악한 일입니다. 알리바이와 변명이 필요한 건 범죄자들이지 연인들이 아닙니다!

뭐가 남았나요? 아, 영화. 드라마하우스에서는 [바람의 화원] 영화 판권도 함께 구입했답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빠른 시일 내에 영화로 만들어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미인도]의 흥행성공과 시리즈의 참패 이후로는 더욱 어렵죠. 그러나 문근영의 신윤복을 이렇게 소비하고 끝나는 것은 범죄입니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고 지금으로서는 영화가 유일한 해결책인 것 같습니다.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발 루튼은 오슨 웰즈가 남긴 세트를 재활용해 쓰면서도 [캣 피플]이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와 같은 아름다운 걸작들을 만들었습니다. 왜 우리가 상상하는 가상의 영화가 같은 길을 따라서는 안 됩니까? 최근에 충무로에서 나온 사극들을 보면 중요한 게 제작비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충무로 카피라이터들이 ‘웰메이드’나 ‘명품’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정말로 그 이름에 걸맞는 작품들인 것도 아니고요. 지금의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영화쟁이들의 창의력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아마 많은 [바람의 화원] 팬들이 자신만의 영화를 상상하고 있을 겁니다. 저도 저 자신의 영화를 상상할 권리가 있겠지요. 이미 전 연극을 대상으로 비슷한 일을 한 적 있지만 영화도 한 번 건드려보기로 하겠습니다.

캐스팅. 물론 전 문근영을 신윤복으로 캐스팅하겠습니다. 문근영 캐스팅이야 말로 이 가짜 영화를 계획하는 1차적인 이유니까요. 아마 전 문채원도 캐스팅할 것입니다. 문근영이 아닌 다른 배우를 신윤복으로 캐스팅한다면 문채원도 나가야겠지요. 하지만 이 두 사람은 하나로 묶어야 합니다. 박신양은 캐스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가상의 영화는 그의 개런티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고 그의 역할도 드라마보다 작을 테니까요. (대신 캐릭터가 더 낫다는 건 보장합니다.) 류승룡은? 아뇨, 전 그를 조년 역으로 캐스팅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조년은 드라마의 조년보다 최소한 열 살 정도 나이가 많아야 합니다. 대신 전 그에게 홍도 역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발성도 정확하고 사극 연기에도 익숙하며 불필요한 스타의 에고를 과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본 구조는 제가 전에 상상했던 가짜 연극을 따를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소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실내극이며 욕망과 감정의 방향이 엇갈리는 네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 때문에 드라마 제작진들이 벌레처럼 기피했던 2부가 오히려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물론 이건 연극보다 까다롭습니다. 영화는 연극처럼 쉽게 내면의 독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죠.

전 드라마가 소설에서 취했던 대사들은 모두 퇴출시킬 것입니다.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차별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드라마가 사용하지 않은 소설 대사들은 활용할 것입니다. 거기엔 사랑에 빠진 윤복이 중얼거리는 “네가 보고 싶어서...”의 한탄이나 기생집을 드나드는 자신을 나무라는 홍도에게 던지는 윤복의 싸늘한 대답 같은 것들이 추가될 것입니다. 물론 그림자 마술도 넣습니다. 전 미치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과정에서 드라마의 세부 사항은 드라마보다 오히려 더 원작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소재가 가진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제가 수용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 정향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수없이 말했지만 이 드라마가 제대로 발전시킨 유일한 캐릭터니까요. 특히 [월하정인]의 에피소드는 따르고 싶습니다. 윤복이 자신의 성을 홍도보다 정향에게 먼저 노출시킨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습니다. 그 이후 방향이 문제였을 뿐이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나오는 김홍도는 죽음을 앞둔 노인네로 그릴 것입니다. 아들 교육비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면서도 경제관념이 형편없어서 자기보다 한참 젊은 아내를 괴롭히는 무능한 노인네. 죽음을 앞둔 그의 정신은 혼미할 것이고 현실과 환영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 여기에 비교적 몸과 정신이 온전한 이인문을 등장시켜 대화상대로 삼을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이인문을 등장시킨 건 훌륭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전혀 써먹지 못한 게 문제였지요. 이 이야기에서 그는 훌륭한 호레이쇼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전 에필로그 중반에 김홍도가 병사하도록 방치할 것이고 그 뒤에 이인문이 방구석에 걸려 있던 [미인도]를 발견하게 하겠습니다. 아마 당시 김홍도와 함께 했던 그가 가지고 있던 기억은 김홍도의 혼란스러운 회상과 많이 다를 것입니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관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저는 바화갤에서 어떤 사제라인 지지자의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그 분은 윤복이 무의식적으로 홍도를 자극하는 여우같은 인물로 그려졌으면 좋았을 거라고 하더군요. 저도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가장 매혹적으로 보일 때는 마치 금방이라도 취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늘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을 때입니다. 전 윤복을 그런 인물로 그리겠습니다. 모든 면에서 굉장히 유혹적이지만 자신의 매력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무지한 인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놀랄 정도로 매정할 수 있는 인물. 드라마는 정말 그런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6회까지는. 이럴 경우 홍도에 대한 윤복의 태도가 차갑고 무심할수록 홍도의 감정은 더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굉장히 좋은 로맨스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정향과 윤복의 관계는 레즈비언 연속체의 위를 마주 질주하는 두 점으로 그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린 이들에게 엄청난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로건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들에게 [엘워드]식 섹스를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원하는 건 그냥 [트리스탄과 이졸데]식 금지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섹스의 제한이 더 에로틱하고 유혹적인 법이죠. 사실 드라마의 정향과 윤복도 그랬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자기네들이 무엇을 원하고 어디에 빠져 있는지 몰랐을 때가 가장 매혹적이었습니다. 문근영과 문채원이 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전 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이런 신윤복이 문근영이 처음 그렸던 신윤복에 훨씬 가까운 인물이라고 확신합니다. 심지어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그런 인물을 어떻게 연기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을 끝내 놨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전 김조년을 훨씬 큰 인물로 묘사할 것입니다. 그는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고 정향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다 우아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는 악인이기도 하지만 예술과 사람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아마 그는 일자무식의 천민일 때부터 그런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으면서도 둔한 심미안 때문에 모든 걸 놓치고 지나가는 부유한 양반들을 경멸했을 것입니다. 아마 지금까지 그가 저지른 악행은 그런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 그가 필연적으로 거쳤던 과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정향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그의 나이가 치울 수 없는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고통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전 심지어 그가 정향과 윤복의 관계를 어느 정도 용납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적어도 분노한 윤복이 자신에게 그림으로 선전포고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이런 인물이 자존심과 사랑 사이에서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묘사한다면 정말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와 신윤복과 같은 젊은이의 대립 역시 흥미롭게 그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문근영과 류승룡은 단 한 번도 이런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문근영은 스승님 앞에서 징징 짜느라, 류승룡은 영감님들 앞에서 브리핑하느라 바빴죠.

가짜 연극에서와 마찬가지로 추리와 정치는 축소됩니다. 정치적 음모는 하드보일드 소설의 사회악처럼 어둡고 필연적인 그림자로 존재하지만 중반 이후까지 대화 속에서 암시적으로 언급될 뿐입니다. 영화가 시작될 무렵엔 이미 홍도는 왕의 어명을 받았고 윤복 역시 아버지의 원수를 찾고 있습니다. 이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은 중반까지 밝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관객들이 일찍 눈치 채도 상관없습니다. 구조상으로 그게 나아서 쓰는 거니까요. 비밀을 숨긴 초상화가 김조년 집에 모두 숨어있다는 설정은 여기서도 사용합니다. 여기엔 핑계도 있습니다. 김조년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걸 알면서도 예술 작품을 파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전 영화를 중간에서 시작하면서 전반부의 이야기를 조각내 과거 회상처럼 삽입하는 방식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다소 혼란스럽겠지만 이를 통해 드라마나 [미인도]와 차별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 네 주인공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한 자리에 모여 신윤복의 그림(네, [월하정인]이 좋겠습니다)에 대한 교양이 넘치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 이들 네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조금씩 드러내다가 갑작스러운 회상 장면을 몇 초 떨구겠습니다. 그것은 윤복과 정향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 될 수도 있고 김조년이 둘의 관계를 처음 알아차리는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짧은 회상이 번개처럼 휙 지나간다면 그들 네 사람의 관계는 아무리 교양으로 치장한다고 해도 이전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회상 구조는 다소 에피소드 위주인 영화의 스토리를 보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에피소드를 절약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진화사의 경우 직접적인 회상을 넣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이 방식은 적절하게 사용하면 제작비 절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전 여기에 조성모의 노래 따위는 얼씬도 못하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병우가 작곡한 두 편의 음악은 재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를 기용해 나머지 장면들도 커버했으면 좋겠군요. 단지 전 새로 작곡되는 음악이 드라마의 음악보다 덜 노골적이길 바랍니다. SBS에서 이미 그려놓은 복사화들을 대여해준다면 돈이 얼마나 더 절약될까요. 물론 나중에 나온 작품들은 다시 그렸으면 합니다만. 전 사실 이들의 의상에도 별 불만은 없습니다. 사화서의 유니폼은 포기하고 싶지만.

이건 제가 즉석으로 만들어낸 아이디어입니다. 다른 때에 생각했으면 전혀 다른 아이디어가 만들어졌을 수 있죠. 아마 여러분도 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 수 있겠죠. 그리고 내기해도 좋지만 이 상상의 영화들은 모두 이번 주에 끝난 드라마보다 더 나을 겁니다. 슬픈 일이지 뭡니까. (08/12/05)

기타등등

몇몇 분들이 보내주신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우선 전 바화갤에 딱 한 번 정보제공용 답글을 올린 적 있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고정닉으로 활동한 적 없어요. 그건 다른 게시판이나 커뮤니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 게시판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아요. 거기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제 생각이 종종 일치한다면 그건 그냥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제가 없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는 증거가 되겠죠. 이 대답에 만족하셨기를 바랍니다.

모두들 끝까지 시리즈를 참고 보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문근영씨, 푹 주무시길. 이번 결과에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다음 기회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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