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시대 공포영화제작소

2010.03.21 21:57

DJUNA 조회 수:2940

[소녀시대 공포영화제작소]의 계획에 대해 들었을 때 제 머릿속에 떠오른 건 두 가지 모순되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나. 와, 끝내준다. 둘. 망하겠구나.

“와, 끝내준다”라는 반응은 제 취향에 기대고 있습니다. 전 아마추어들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걸 구경하는 게 좋습니다. 그들이 그를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더 좋고요. 게다가 그들이 만들려고 하는 최종 작품이 공포영화라면 제가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여기엔 나름 성공 사례도 있습니다. [라인업]요. 그렇게 인기를 끈 프로그램도 아니었고 저 역시 [라인업]을 보기 위해 [무한도전]을 거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경규와 신정환이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설쳤을 때 전 재방송으로나마 그들을 꾸준히 따라갔습니다. 물론 그 최종결과물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만 그 진지함은 꽤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정도의 진심만 보여준다면 저도 반갑게 이 코너를 따라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보다 결과가 좋으면 좋겠지만.

하지만 “망하겠구나”라는 바이브가 여전히 강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대상에 도전하는 프로그램을 제대로 만들려면 그 대상에 대해 잘 알고 그 대상에 대해 진지한 내부인이 처음부터 한 명 이상 개입해야 합니다. [무한도전]만 해도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때마다 집중적으로 멤버들을 관리하는 전문가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포영화제작소]에서는 그런 전문가들의 손길을 (아직까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이 과연 공포영화라는 장르에 얼마나 진지한지, 그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들의 일차목적은 예능이고 그 다음이 영화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결과보다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능적인 재미가 더 중요하다고 해도 과정 자체에 대한 진지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예능의 재미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뭐든지 닥치는 대로 하고 보는 [무한도전]의 멤버들이나 오랜 꿈을 예능 프로그램으로나마 실현해보려 했던 [라인 업]의 멤버들과는 달리 소녀시대 멤버들에게는 그런 진지함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멤버들마다 편차가 있긴 하지만 이 사람들은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 안에서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타입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냥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인형처럼 보일 가능성이 크죠.

어제 첫 방송이 있었습니다. 예측했던 대로 절망적으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진행자들이 공포 소재로 몰래 카메라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나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오해가 있을까봐 하는 말인데, 전 공포 소재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몰래 카메라는 별로지만 공포가 결합되었을 때는 좋아해요. 하지만 이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대한민국 텔레비전은 이 장르의 가능성을 몽땅 갉아먹었어요. 여전히 새로운 소재로 새롭게 도전할 영역은 남아있지만 흉가 귀신 이야기로 할 수 있는 건 뻔합니다. 아무리 무당의 권위와 분위기 잡기로 밀어붙여도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몰래 카메라의 주인공이 된 태연 역시 속았다기보다는 쇼를 망치기 싫어서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것처럼 보입니다. 전 다음 에피소드도 기대 안 합니다. 여전히 담력 테스트 비슷한 걸 하는 모양이더군요.

여기엔 심각한 계산 착오가 있습니다. 이 코너를 만드는 사람들은 ‘공포영화’라는 소재의 목표가 소녀시대 멤버들을 놀라게 하고 겁을 먹게 하고 그 광경을 찍어 오락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공포영화제작소]라는 제목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은 ‘공포’가 아닙니다. ‘공포영화’거나 ‘제작’이지요.

공포영화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르는 게 분명한 (그랬다면 몰래 카메라 따위로 코너를 시작을 하지도 않습니다) 제작자들을 돕기 위한 기초설명을 하겠습니다. 공포영화란 존재하지 않는 위협과 현상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창조해 보는 사람들에게 공포 또는 그와 이웃하고 있는 감정들을 끌어내는 장르입니다. 조작이라는 면에서 공포영화는 마술에 가장 가깝습니다. 도그마 영화로 가장 만들기 힘든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만) 장르도 호러죠. 아무리 단순한 공포영화라도 인공적인 조작이 개입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공포영화는 가장 영화적인 장르이며 그만큼 만들기 재미있는 장르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공포영화’를 ‘마술’이라는 단어로 대체해서 다시 한 번 프로그램의 콘셉트를 들여다봅시다. 이 사람들은 소녀시대 멤버들을 도구 삼아 일종의 마술쇼를 펼치려 하고 그 과정을 공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녀시대 멤버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과연 ‘관객들의 반응’입니까? 네, 공포영화에는 공포에 떠는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표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건 ‘제작소’라는 제목을 단 코너가 없어도 얼마든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테크닉을 담력시험이나 몰래 카메라로 알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그냥 지독하게 나이브한 것입니다. 공포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겁에 질린 연기를 하는 것이라 그를 통해 관객들을 겁에 질리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이를 통해 배워야 할 건 어떻게 기술적으로 관객들을 겁을 주느냐이지 몇 데시벨로 비명을 지르느냐가 아닙니다. 물론 대부분 시청자들은 [일밤] 제작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그렇게 올바르다고 할 수도 없는) 선입견을 맥없이 따라하는 것에 무슨 재미가 있답니까? 만드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시청자들을 넘어서길 포기한다면 그 프로그램은 시작도 하기 전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사람들 절실하지 않습니까? 어쩌자고 시작부터 이렇게 게으르답니까?

아마 몰래 카메라나 담력 테스트는 프로그램의 일부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마 그들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무엇이건, 영화를 만드는 행위에 진지하지 않는 한 이 코너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정말 거기에 대해 열심히 공부를 하고 그 결과물을 의식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출연자들의 입에서 영화팬들이나 알 법한 어휘와 고유명사들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기 전엔 이 프로그램은 제 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 없어요. 역시 [무한도전]이 모범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제가 제시할 수 있는 답은? 제발 대상에 대해 아는 사람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시킬 것. 모르면서 아는 척 하지도 말고 자기가 아는 것이 대상의 전체라고 생각하지도 말 것. 멤버들을 출연배우로만 여기지 말고 붐 마이크 들기에서부터 폴리까지 가능한 모든 영역에 참여시킬 것. 경쟁 구도를 만들어 멤버들을 분산시킬 것.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되건 제발 괜찮은 영화를 만들려 시도할 것. 하지만 이런 요구를 심각하게 던지고 있는 제가 지금 얼마나 순진해 보이는지요.

* * *

다음 날 추가한 부록입니다. 만약 제가 시청률 무시하고 소시 공포영화제작소를 만든다면...

게시판에서 mp3님도 지적하셨겠지만 세 그룹으로 쪼갭니다. 이러면 인원을 비교적 쉽게 통제할 수 있고 3부작은 호러장르에서 아주 당연한 것이니까 이치도 맞습니다.

작가진과 감독들을 일찍 투여해서 배정된 멤버들에 맞는 스토리를 멤버들의 의견을 들어가며 함께 만듭니다. 이건 잘만 한다면 진짜로 재미있는 게 나올 수도 있지요. 예능을 넘어서는 드라마가 생길 수도 있고요.

일단 이야기가 정해지면 관련된 작품들을 숙제시킵니다. 멤버들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관련 장르를 공부시키고 덕후화시킵니다. 무한도전보다는 조금 더 나가게 되겠습니다.

멤버들의 일을 배우에만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이건 전에도 말했죠. 붐마이크나 카메라도 들게 하고 폴리도 시키고 분장도 시킵니다.

장르팬들과 교류를 추가합니다. 사실 몇 번의 시도를 목격한 뒤로 팬들이 참여한다고 해서 특별히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미녀와 기크 설정을 살릴만한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그룹은 임의로 쪼개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들 중 연기가 되는 사람들이 몇 명이 되나요? 윤아, 수영, 유리 정도가 되겠죠? 다들 연기 수업은 받았겠지만 이들 세 명 정도가 아마추어에서 간신히 벗어나 있습니다. 그 중 윤아는 [신데렐라 맨] 때문에 나올 수 없으니... 음, 참 암담하군요. 하여간 연기가 되는 멤버를 한 명씩 넣고 그 주변에 예능이 되는 멤버를 넣는다는 생각이었는데, 수영과 유리는 둘 다 예능이 강한 사람들이기도 하니 난처하군요.

진행자들은 빼버립니다. 아니면 이들에게 독립적인 역할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제작자 역할이죠. 이들에게 제한된 자금을 주고 직접 감독이랑 작가들을 찾아 설득하고 계약하게 합니다. 어차피 사람들이 부글거리는데 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들다 보니 저녁시간대 예능프로그램의 성격에서 점점 벗어나는군요. (09/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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