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 문학

2010.03.13 23:12

DJUNA 조회 수:2210

문학의 기본 목적은 예술적 성취 자체입니다. 아무리 작가나 시인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쓴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같은 길로 떨어지고 말죠. 적어도 후대 독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이 부분은 많은 예술가들의 골치거리이기도 하죠. 도대체 작품에 대한 평가가 의도와 맞아 떨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실용성이나 교훈은 세월이 지나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남는 것은 예술성뿐이죠. 요새 누가 바우하우스 의자의 불편함을 비판하겠어요. 그 의자들은 이제 감상 대상인데.

그러나 후대가 뭐라건, 문학의 실용적인 가치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가까운 예로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자잘한 이야기들은 순전히 특정한 교훈을 주입시키기 위해 쓰여진 작품들로, 자칫하면 추상적이 될 수도 있는 주제를 구체화시켜 학생들의 이해를 극대화시키는 데 사용됩니다. 시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되지요. 이 경우 리드미컬한 시의 운율이 메시지의 암기를 쉽게 만듭니다.

이런 작품들이라고 해서 모두 일회용으로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우린 교훈을 담은 글들을 위선적으로 여기지만 작가가 그 교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열정을 쏟는다면 거기에서도 훌륭한 예술적 성취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사실 '교훈'이라는 건 애매하기 짝이 없는 단어로, 경계를 긋기 쉽지 않습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휴머니즘을 다룬 보편적인 소설인가요, 아니면 노예해방이라는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진 정치 팜플렛인가요?

그렇다면 보다 경계를 긋기 쉬운 작품들을 생각해보죠. 교훈 대신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문학적 도구를 사용한 작품은 어떨까요? 역사책 같은 것은 제외합시다. 인간적인 요소가 풍부한 그런 장르의 책들은 쉽게 문학적이 되기 마련이니까요. 앞으로는 과학을 다룬 문학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죠.

물론 과학을 다룬 책들도 훌륭한 문학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칼 세이건이나 토머스 헉슬리처럼 훌륭한 전문가이면서도 좋은 작가인 사람들도 있죠. 소재나 주제로 작품을 차별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픽션으로 넘어가면 어떨까요? 종종 과학자들은 소설의 형식을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는 논문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행동 심리학자인 B.F. 스키너는 [월든 투]라는 소설을 쓴 적 있는데, 이 작품은 일단의 학자들과 학생들이 스키너의 행동 심리학적 이론을 적용한 이상적 공동체를 방문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월든 투]는 흥미로운 소설이기는 하지만, 그건 소설 자체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이런 인간의 조건 반사를 제어하는 극단적인 이상적 공동체에 대한 스키너의 이론이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월든 투]는 다루는 주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과학 논문보다는 입체적이지만 문학적인 매력이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사실 소설이라기보다는 기형적인 논문에 가깝죠.

그보다 더 직설적인 픽션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는 톰킨즈씨라는 평범한 영국인 은행원을 주인공으로 한 일련의 단편들을 썼는데, 이 작품에서 톰킨즈씨는 장인인 물리학자를 가이드로 삼아 양자 역학과 상대성 이론이 이상할 정도로 부풀어 있는 환상 세계를 여행합니다. 톰킨즈씨가 겪는 모든 모험들은 지극히 환상적이고 나름대로 풍부한 상상력을 과시하지만, 큰 문학적 의미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현대 물리학을 독자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가모브의 술수일뿐이죠. 여기서 캐릭터의 깊이나 심리 묘사, 구성의 묘미 따위를 캐려한다면 헛수고입니다. 가모브의 소설에서 픽션이라는 형식은 순전히 도구에 불과합니다. 종종 가모브는 픽션의 허울을 벗어버리고 장인인 물리학자에게 수학공식이 잔뜩 들어있는 강연을 시키기도 합니다. 톰킨즈씨의 환상 모험은 개념을 대충 설명하기엔 유용하지만 이론을 보다 깊이 있게 설명하려면 역시 칠판과 분필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가모브식의 모험담은 이미 교양 과학에서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최근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노빈손' 시리즈도 이런 식의 '에듀테인먼트'의 성공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꽤 재미있는 책들입니다. 하지만 역시 문학적 의미는 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작가들의 실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지식 전달이 먼저이고 문학적 의미는 두번째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세 번째나 네 번째일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그들을 탓할 수도 없으니, 아무리 문학 장르의 형식을 차용했다고 해서 늘 문학적 의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대에 문학적 걸작으로 남지는 않겠지만 수명 짧은 작품들이라고 해서 모두 무익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교양 서적의 창작자들에게 문학적 욕구가 늘 부차적인 문제일까요? 그렇지도 않다는 증거는 이미 있습니다. 과학 소설의 존재가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초기 과학 소설'로 알려진 작품들의 상당수는 '에듀테인먼트'를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20세기에 본격적으로 장르 과학소설이 탄생했을 때도 미래의 과학과 기술을 예측하고 대중에게 소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지식 전달이 줄어들고 문학이 부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어슐러 르 귄이나 로저 젤라즈니, 코니 윌리스,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에서 초기 '에듀테인먼트' 소설의 흔적이 보이나요?

그렇다면 그 이후에 나온 에듀테인먼트 소설의 작가들도 초기 SF 작가들처럼 문학적 야심에 불탈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죠. 그들이 '에듀테인먼트'를 위해 차용한 형식이 문학적으로 충분히 흥미롭다면요.

최근에 번역된 앨런 라이트맨의 작품 [아인슈타인의 꿈]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앨런 라이트맨의 이 소설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기 직전에 아인슈타인이 꾼 꿈들을 열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을 다룬 '에듀테인먼트' 소설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형식이죠. 아마, 라이트맨은 광속을 극도로 줄여서 상대성 이론에서 나타나는 환상적인 효과를 과장하면서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하겠지요.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꿈]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물론 그는 그런 식으로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는 꿈을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쓴 대부분의 글들은 현대 과학과 무관할 수도 있는 순수한 환상입니다. 시간이 정지된 세계, 시간이 흐르면 엔트로피가 줄어드는 세계, 사람들이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세계, 행성의 1년이 사람의 평생보다 긴 세계, 이전의 기억만 가지고 있을 뿐 현재의 기억을 계속 잃어버리는 세계, 시간이 순환하는 세계... 이 모든 것들은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이런 것을 대중들을 위해 쉽게 표현하려 노력하는 자연과학자들의 머리에서 온 것이 분명한 지극히 과학적인 상상력이지만, 정작 실제 지식을 제공할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이런 상상력이 지식 전달의 목적을 버리고 독자적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아인슈타인의 꿈]은 과학 교양 서적의 경계선을 넘어 '문학'이 됩니다. (0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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