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는 신들

2010.01.31 18:23

DJUNA 조회 수:2707

1.

프레드릭 브라운의 [유아론자]와 아이작 아시모프의 [최후의 해답]에 등장하는 신들은 아무래도 영원한 삶에 질릴대로 질린 모양입니다. 영원에 어떻게 질릴 수 있을까? 이것도 따지고 보면 재미있는 문제겠지만 넘어가기로 하지요. 보다 재미있는 부분을 다루기로 합시다. 신들의 자살 방법 말입니다.

(1) 유아론자-프레드릭 브라운

[유아론자]의 신의 자살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는 주인공 지호버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나와 마찬가지의 방법을 쓰면 되지. 먼저 우주를 창조해라. 그리고는 그 안에서 너와 같은 유아론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래서 그 자가 우주를 다 없애버린 다음에 스스로의 존재를 마감하려 하면 그 때 그 자와 자리바꿈을 하면 되는 것이지. 자, 그럼 잘해보게."

미안해서 어쩌나... 그런 식으로는 자살할 수 없습니다. 어림도 없지요. 우선 신이 창조한 유아론자는 우주를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순서를 보세요. 먼저 우주가 나왔고 그 안에 유아론자가 생겼습니다. 그가 골수 유아론자라면 그가 관측하는 모든 외물들을 자신의 마음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유아론에 대한 대중들의 오해이기도 하죠. 사실 유아론의 선두주자라고까지 여겨지는 버클리도 자기만 존재한다는 엄청난 생각 따위는 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가 속해 있는 우주는 그와 같은 수준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안 없어져요.

약간 개조해봅시다. 먼저 유아론자를 창조하고 그 다음 그의 마음에 우주를 창조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한다면 유아론자는 우주를 없앨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없앨 수 없죠. 아니에요. 어떻게 자신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신은 절대로 못 없애요. 신은 그보다 상위의 존재인 걸요. 여러분의 공상 속의 존재가 여러분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세요?

또 개조해 볼까요? 만약 신이 자신과 동등한 수준을 가지는 우주를 창조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래도 유아론자는 우주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신과 동등한 수준의 유아론자를 먼저 창조한다면? 우주는 없앨 수 있겠지만 유아론자와 신은 그대로 남죠. 같은 수준이니 역시 유아론자는 신을 없앨 수 없습니다. 만약 유아론자가 신을 없앨 수 있었다면, 신은 유아론자 따위는 만들지 않고 그냥 자살했겠죠. 만약 신보다 높은 수준의.... 아아, 이건 불가능하죠. 낮은 수준의 존재에서 높은 수준의 존재가 나올 수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유아론자를 만들어 낸 것은 괜한 헛고생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자살하고 싶은 신이라면 다른 방법을 쓰셔야 되겠네요.

(2) 최후의 해답-아이작 아시모프

농담처럼 가볍게 쓰여진 브라운의 단편과는 달리, 아시모프는 이 주제를 꽤 치밀하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는 무한의 개념을 도입할 때 발생하는 패러독스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나름대로의 대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해답]은 논리적인 문제점은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바로 그래서 아시모프의 신은 자살에 실패합니다. 아시모프는 패러독스에 빠지는 위험은 간신히 피했지만, 그의 신에게 구체적인 자살 도구를 쥐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신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 열반의 방법을 넥서스들이 찾아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만... 그 영원한 기다림은 머레이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의 자살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자신이 불사임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이 소멸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부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의 정의를 들먹이며 반격하지 마세요. 여기서는 통하지 않으니까요. 그 목소리는 자신을 '정의한' 적이 없습니다. (9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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