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 & 그레이스 Will & Grace (1998- 2006)

2010.03.13 22:49

DJUNA 조회 수:3266

출연: Eric McCormack, Debra Messing, Megan Mullally, Sean Hayes, Gregory Hines, Shelley Morrison

1.

[엘렌]의 주인공 엘렌 모건이 친구들 앞에서 커밍 아웃을 했던 97년 4월 22일은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날들 중 하나였습니다. 겨우 4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1시간 짜리 에피소드의 영향은 이곳 저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버피]의 윌로우, [ER]의 케리 위버처럼 스토리 중간에 서서히 자리를 바꾸어가는 인물들도 있었으며, [도슨의 청춘일기]의 잭처럼 수줍게 커밍아웃하는 캐릭터도 있었고, [앨리 맥빌]에서처럼 시청률 높이기용 동성 키스를 남발하는 프로그램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텔레비전 세계에서 동성애는 경계 대상이지만 엘렌이 커밍 아웃을 했던 97년 당시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바뀐 거죠.

그러나 [엘렌]은 선구자라는 자의식 때문에 중도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린 탓인지 시리즈는 후반부로 갈수록 유머를 잃어갔고 게이 시청자들과 스트레이트 시청자들 모두로부터 인기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엘렌]은 5시즌을 끝으로 텔레비전에서 사라지고 말았지요.

그 뒤를 이어 들어선 작품이 바로 [윌 & 그레이스]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윌 & 그레이스]는 [엘렌]을 부스터로 이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엘렌]의 시행착오를 모두 복습한 뒤, [엘렌]이 열심히 닦아놓은 길로 상당히 수월하게 들어선 시트콤이라고 할까요?

2.

[윌 & 그레이스]의 설정은 간단합니다. 동성애자인 변호사 윌과 이성애자인 인테리어 디자이너 그레이스는 대학 동창 사이로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레이스가 결혼식날 약혼자를 버리고 달아난 뒤로, 둘은 같은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하죠. 1시즌이 끝나면 그레이스가 맞은편 방으로 이사가긴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비교적 정상적인 두 주인공을 주축으로 두 명의 조역들이 가세합니다. 윌의 배우 지망생 게이 친구 잭 맥팔랜드와 그레이스의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하는 주정뱅이 사교계 귀부인인 카렌 워커가 그들이죠. 잭은 1시즌 끝에 카렌의 하녀 로자리오에게 그린 카드를 얻어 주기 위해 위장 결혼을 하고, 카렌은 2시즌 중반에 윌의 고객이 됩니다.

3.


설정만 따진다면 [윌 & 그레이스]는 그렇게까지 독창적인 시트콤은 아닙니다. 흔한 시트콤 설정에 두 게이 남성을 끼워넣은 것에 불과하죠. 하지만 이런 종류의 시트콤에서 중요한 것은 설정의 독창성이 아닙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성공적인 시트콤 [프렌즈]를 보세요. 여섯 명의 귀여운 남녀들을 한군데 몰아넣은 것에 불과하잖아요. [윌 & 그레이스]의 성공 이유도 게이 이슈를 끌어들였다는 게 아니라 네 명의 주인공들을 호감가고 재미있는 인물로 만들어 적절하게 뒤섞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우린 역시 게이 이슈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윌 & 그레이스]의 성공이 캐릭터와 각본의 승리라고 해도, 게이 이슈가 없었다면 이처럼 화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을테니까요.

다소 우직스러웠던 [엘렌]과는 달리 [윌 & 그레이스]는 이 모든 것들을 아주 교활하게 처리했습니다. 게이 남성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이면서도 적당히 성비의 균형을 맞출 줄 알았고, 게이 남성과 스트레이트 여성의 어정쩡한 우정이라는 설정으로 이성애자 관객들에게 로맨스의 착각을 주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윌과 잭은 모두 게이지만 정작 이들의 성생활에 대한 언급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윌 & 그레이스]는 방영 당시 분위기 속에서 적당히 이슈를 끌면서도 수줍은 이성애자 관객들을 심하게 자극하지 않는 적절한 선을 찾아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해도 발판을 다져 놓았으니 훨씬 나아질 수 있는 기반이 생기겠지요.

4.


[윌 & 그레이스]는 90년대 말에 데뷔한 시트콤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의 호응도 좋았고 상복도 많았지요. 윌 역의 에릭 맥코맥과 잭 역의 숀 헤이즈는 게이 시청자들의 애정을 담뿍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미 고약한 카렌 역의 메간 멀랠리가 21세기의 새로운 게이 아이콘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건 거의 확실합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반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게이 시청자들이 [윌 & 그레이스]에 관대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이성애자 관객들의 비위를 맞춘다고 생각하며, 어떤 사람들은 게이 스테레오타입을 지나치게 과장해 코미디 소재로 사용한다고 불쾌해합니다. 게이 여성 시청자들은 이 시리즈가 지나치게 남성 게이들에 집중하고 있고 가끔 나오는 여성 게이 묘사도 불쾌한 스테레오타입이라고 주장합니다.

모두 사실일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윌 & 그레이스]가 뻔한 패그해그 판타지라고 주장하는데, 이 비판을 부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윌이 아무리 죽어라 데이트를 해대도 결국 이 시트콤에서 그의 역할은 게이친구입니다. 다소 정서적으로 혼란한 그레이스를 위로해주고 지탱해주고 그 덕에 고생까지 덤으로 하는 그런 친구 말이에요.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비판도 일리가 있습니다. 잭의 캐릭터는 전형적인 게이 남성의 스테레오 타입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고, 바로 그런 게이다움이 코미디 소재로 이용되고 있는 것도 맞으니까요. 주인공들이 게이 남성들이니, 게이 여성들의 비중이 적은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최근 몇몇 에피소드에서 [윌 & 그레이스]가 이들의 이미지를 다루는 데 실수를 한 건 사실입니다. 그건 제작자들 자신도 인정하는 바죠.

그러나 게이 캐릭터의 활용에 대해서는 보다 조심스러운 접근법이 필요할 겁니다. 과연 어디까지가 모욕적인 농담일까요? 우리는 잭이 '게이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웃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봐서는 그게 모욕적인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건 동성애자 관객들이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이성애자 관객들이 동성애자 캐릭터의 희극적인 면만 보며 비웃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양쪽 모두일 수도 있고요. 어느 쪽이건 분명한 경계선을 찾기는 무척 힘들거든요.

우린, [윌 & 그레이스]라는 쇼 자체가 그 경계선과 유머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시트콤이 장수하기를 비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아무리 NBC의 제작진들이 자체 검열을 들고 나온다고 해도, 이들이 새로운 시즌으로 넘어갈 때마다 새로운 것을 들고 나와 텔레비전의 영역을 확장시킬 것이라는 건 분명하니까요. (01/03/02)

기타등등

AFKN에서 [윌 & 그레이스]의 1, 2시즌을 해준 적 있습니다. 2시즌은 이번 주에 끝났지요. 곧 OCN에서도 처음부터 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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