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솔루틀리 패뷸러스 Absolutely Fabulous (1992-2004)

2010.03.14 22:02

DJUNA 조회 수:4641

감독: Bob Spiers 출연: Jennifer Saunders, Joanna Lumley, Julia Sawalha, Jane Horrocks, June Whitfield, Christopher Malcolm, Gary Beadle, Naoko Mori, Christopher Ryan, Mo Gaffney, Kathy Burke, Adrian Edmondson, Harriet Thorpe

1.

1990년, 영국의 코미디언 콤비인 제니퍼 손더스와 던 프렌치는 이기적이고 덜떨어진 엄마와 조숙한 학구파 딸의 대립을 다룬 [The Modern Mother and Daughter]라는 짧은 콩트를 BBC 코미디 프로그램인 [프렌치와 손더스]에서 선보인 적 있습니다. 이 설정이 콩트 하나만으로는 아깝다고 생각한 그들은 곧 같은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시트콤을 계획했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오늘 제가 다룰 [업솔루틀리 패뷸러스 Absolutely Fabulous(일명 AbFab)]이지요.

[AbFab]의 첫출발은 상당히 위태로웠습니다. BBC의 담당 이사는 주정뱅이 아줌마들이 온갖 주접을 떨어대는 파일럿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BBC에서 일하는 어떤 비서가 이 작품에 매료되면서 사정은 변했습니다. 시리즈의 가능성을 본 그 비서는 테이프를 돌리면서 사람들을 설득했고, 결국 시리즈는 정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사람들은 비수로 쿡쿡 찌르는 듯한 대사와 근사한 앙상블 캐스트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AbFab]는 BBC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트콤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영국 시트콤 중 [AbFab]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는 작품은 없습니다.

2.

[AbFab]의 주인공은 중년의 PR 담당자인 에디 몬순입니다. (제니퍼 손더스는 실제 PR 전문가인 린 프랭크스 Lynn Franks를 에디의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아직도 젊었던 6,70년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에디는 이미 사라져버린 젊음을 필사적으로 움켜쥐려고 기를 쓰며 처절할 정도로 철없는 나날을 보냅니다.

에디는 두 번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했고 지금은 조숙한 딸인 사피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집은 딸의 명의로 되어 있으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딸의 집에 얹혀사는 셈이죠.) 두 사람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모녀 이미지와 정반대입니다. 사피가 똑똑하고 엄격하다면 에디는 방탕하고 책임감 부족하며 늘 놀 생각만 하고 있지요. 에디가 어린아이처럼 징징거리는 동안 사피가 따끔하게 엄마를 다그치는 일은 몬순 집안에서는 당연한 일상입니다.

마치 가족의 일원이라도 되는 양 몬순 집안에 기생하는 에디의 친구 팻시 스톤은 [AbFab]의 또다른 축입니다. 이 덜떨어진 퇴물 모델은 에디의 단짝 친구이자, 에디가 벌이는 유치찬란한 모험의 공범자이기도 합니다.

[AbFab]는 이 세 여자들을 중심으로 한 삼각 관계의 이야기입니다. 사피는 엄마를 경멸하고 종종 증오하지만 그만큼이나 엄마에게서 인정과 애정을 바랍니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독점해왔던 팻시를 싫어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에디는 시리즈를 통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아들 서지를 이상화하고 사피를 건성으로 대하지만 그래도 딸에 대한 피상적인 모성애는 지니고 있습니다. 워낙 얄팍한 사람이라 그만한 감정의 깊이가 없는 것뿐이죠. 팻시는 사피와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으며 종종 그 감정을 극단적으로 유치하게 표출하지만 그만큼이나 그녀를 부모처럼 두려워하기도 해요. 이 시리즈에서 남자들의 비중이 적은 것도 그들이 이 분주한 관계 사이에 끼여들 여지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관계는 90년대 초를 사는 에디 연배의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기도 했습니다. 정말로 6,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에디의 동년배 사람들 중 상당수는 중년을 넘긴 뒤에도 어른이 될 생각을 하지 않았지요. 종종 '나이'는 한 시대의 문화적 성격이기도 합니다. 현실적인 압력이 어른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면 이 세대의 사람들은 여전히 철없는 파티 피플로 남을 가능성이 컸던 거죠. 그들이 보다 현실적인 환경에서 자란 그들의 아이들과 역할이 바뀐 싸움을 벌이는 것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에디가 속해있는 90년대 초의 연예/패션계는 이런 사람들이 한창 기가 살아 돌아다닐 수 있는 무대였습니다. 80년대부터 시작되었던 호사스러운 문화적 분위기가 한창 절정에 달했던 때였지요. 경기는 좋았고 크리스티앙 라크르와와 같은 화려한 디자이너들이 기세등등했죠. 이런 분위기는 에디처럼 경제력 있는 나이 든 상류층 사람들에게 상당히 잘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따라온 그런지 룩이나 웨이프 유행은 기본적으로 주머니 가벼운 젊은이들의 것이잖아요.

[AbFab]는 이런 세계에 대한 잔인무도하기까지 한 풍자였습니다. 시리즈는 이들의 저열한 스노비즘, 책임감 결여, 유치찬란함을 묘사하는 데 가차 없었습니다. 미국적인 감상주의는 끼여들 구석도 없었지요.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늘어난 체중에만 신경을 쓰고, 이디오피아나 소말리아 사람들의 재난을 바겐 세일 쯤으로 생각하는 에디나, 출판사 사장과 자는 것 이외엔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쓸모없는 알콜/코카인/니코틴 중독자인 팻시는 결코 실생활에서는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죠. 에디의 모델인 린 프랭크스도 시리즈를 고소하려다가 자기가 에디의 모델이라는 걸 광고하고 싶지 않아 포기했다고 하니까요.

3.

그러나 에디와 팻시는 경멸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지요. 팬들은 이 대책없는 커플을 사랑했습니다. 제가 종종 '돈 키호테 효과'라고 부르는 게 여기서도 먹혔던 거죠. 이들은 무자비한 풍자로 시작했지만 너무나도 잘 묘사되었기 때문에 그런 결점들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겁니다. 게다가 에디와 팻시는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완벽한 커플이었습니다. 잠시 헤어졌던 그들이 뉴욕에서 재회하는 시즌 3의 피날레는 그 때문에 감동적이기까지 했죠.

풍자의 타겟이 된 패션 피플들 역시 [AbFab]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로버트 앨트먼의 [프레타 포르테]와는 달리, 패션 세계에 대한 [AbFab]의 묘사는 정확했습니다. 게다가 에디와 팻시는 패션 피플들도 자랑스럽게 여길만큼 자기 나름대로의 확고한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스타일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어요.

미국의 코미디 센트럴에서 [AbFab]가 방영되자 이 작품은 곧 컬트가 되었습니다. 특히 게이 시청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습니다. 에디와 팻시는 90년에 나온 가장 중요한 게이 아이콘들이었고 그 동네 드랙 퀸들이 가장 많이 모방하는 모델이었습니다. 시리즈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해가 될 거예요. 특히 팻시는 실제로도 거의 드랙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요.

시리즈의 여파는 [AbFab]가 94년에 종영된 뒤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로잔느 바가 계획한 시리즈의 미국판 리메이크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뒤의 수많은 미국 시트콤들이 [AbFab]를 직간접적으로 모방했습니다. 가장 노골적인 것은 배우 엄마와 조숙한 딸, 엄마의 주정뱅이 친구를 삼각 구도로 세운 [시빌]이었지요. 패션 잡지사를 무대로 내세운 [저스트 슛 미] 역시 [AbFab]에서 많은 것들을 빌려온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윌 & 그레이스]의 카렌(아마도 잭도)이 에디와 팻시의 후예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시리즈는 영어권의 경계를 넘어 프랑스에서도 자식을 낳았습니다. 작년에 이 시리즈를 번안한 [Absolument fabuleux]라는 프랑스 영화가 나오기도 했으니까요. 이 영화에서 에디 역은 조지안느 발라스코가, 팻시 역은 나탈리 베이가, 사피 역은 마리 질랭이 맡았습니다. 제니퍼 손더스 자신도 카메오로 출연한 모양이에요.

[AbFab]는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시리즈이기도 했습니다. 우선 시리즈의 창조자인 제니퍼 손더스는 이 작품으로 영국 코미디의 대모로 떠올랐습니다. 조안나 럼리도 팻시 역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고요. 사피 역의 줄리아 사왈라가 최초로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시리즈도 이 작품이었습니다. 역시 이 시리즈로 알려지기 시작한 제인 호록스는 나중에 [리틀 보이스]로 골든 글로브와 BAFTA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죠. [AbFab]의 연출자인 밥 스피어스도 시리즈를 기반삼아 할리우드에 진출했습니다. 그 결과가 [명탐정 디씨]나 [스파이스 월드]였으니 결코 성공했다고는 못하겠지만요.

4.

[AbFab]는 93년에 시작해서 94년에 3시즌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절정일 때 시리즈를 끝내려는 게 손더스의 의도였겠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어요. 96년에 사피의 결혼식 소동을 담은 [The Last Shout]라는 2부작 텔레비전 스페셜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2000년에는 [AbFab]의 주연 배우들이 웨스트 엔드의 연극 배우들로 나오는 [미러볼]이라는 30분짜리 스페셜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계속 [AbFab] 시리즈의 복귀에 대한 소문이 떠돌았고요.

[AbFab]는 마침내 2001년에 텔레비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5년이나 세월이 흘렀으니 아주 같을 수는 없었죠. 에디는 그 동안 텔레비전으로 영역을 넓혔고 대학을 졸업한 사피는 필사적으로 엄마한테서 독립하려고 애를 쓰면서 자신의 일생을 바탕으로 한 희곡을 쓰고 있습니다. 저번 시즌에 크리스티앙 라크르와가 쉬크한 유행의 상징이었다면 시즌 4에선 스텔라 매카트니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죠.

시즌 4는 이전 시즌만큼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긴 21세기 초의 문화적 배경은 90년대 초만큼 [AbFab]라는 시리즈의 스타일과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미 이전 시리즈에서 할 말을 대충 다한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시즌 4의 질은 여전히 상당히 높습니다. 특히 사피의 연극 공연을 다룬 [Small Opening]같은 에피소드는 전성기의 에피소드들을 능가하는 힘을 지니고 있어요. 1시즌의 [Fat]과 비슷한 소재를 다룬 [Donkey]도 소재의 새로운 면을 발굴하는 부지런한 에피소드였습니다. (0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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