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유산 (2009)

2010.03.21 22:16

DJUNA 조회 수:3046

각본, 소현경 연출: 진혁 출연: 한효주, 반효정, 김미숙, 문채원, 배수빈, 이승기, 유지인, 한예원, 연준석, 이승형, 민영원, 전인택, 최정우

파프리카 도대체 왜 [찬란한 유산]을 보기 시작했나요?

듀나 세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바람의 화원]에서 문채원과 배수빈을 좋게 봤어요. 문채원의 경우는 테크닉이 아슬아슬한 배우라 계속 발전할 수 있을지 궁금했고요. 게다가 이야기 자체가 제 흥미를 끌었습니다. 도입부는 거의 찰스 디킨스 풍이고 흥미진진한 추리물이 될 수 있는 설정들이 많았죠. 그리고 전 드라마가 시작하기 몇 개월 전에 비슷한 설정의 아이디어를 낸 적 있었습니다. 이런 아이디어를 시스템 내에서는 어떻게 소화를 하는지 궁금했어요.

파프리카 결과는요?

듀나 결코 즐거운 경험이었다고는 못하죠. 지루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저를 자극하는 것 대부분이 짜증과 혐오였다면 문제가 크죠.

무엇보다 캐릭터 문제가 컸어요. [찬란한 유산]은 불쾌하거나 지루한 인물들의 스테레오타입만을 모아놓은 진열장 같아요. 그나마 제 흥미를 끄는 사람들은 서너 명 정도인데, 그들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죠.

가장 끔찍한 인물은 남자주인공 선우환이었어요. 작가가 이 인물을 어떻게 그리려고 했는지는 이해하겠어요. 교정가능성이 있는 매력적인 부잣집 망나니로 여자주인공을 만나 연애를 하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겠죠. 안다고요.

하지만 만들어진 캐릭터는 그냥 흉물스러웠어요. 특히 초반은 혐오스러워서 못 봐줄 지경이었죠. 말투와 행동에는 폭력성만 남아있었고 같잖은 계급의식은 유치하면서도 더러웠죠. 문제는 이 캐릭터의 현실성 여부가 아니었어요. 이런 사람들은 정말로 있으니까. 문제는 현실세계에서 이런 캐릭터들은 결코 개과천선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렇게 인물을 만들어놓고 설득력 있는 변화를 끌어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드라마 역시 완벽하게 실패했지요. 드라마가 이 인물에 대한 시청자들의 동정심을 끌어내고 개선하기 위해 무슨 도구들을 동원했는지 보라고요. 과거의 트라우마는 웃기지도 않고 개선 과정은 거의 공장 생산 과정을 보는 것 같죠. 심지어 여전히 폭력적인 말투와 행동을 제외하면 캐릭터 연결도 되지 않아요. 개선 이전의 선우환이 더러운 개자식이라면 개선 이후의 선우환은 아무 것도 아니죠. 성격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여전히 흉악한 말투가 조금 남아있을 뿐이지.

파프리카 아, 전 후반부에서 선우환의 캐릭터가 뭔지 알 것 같았어요.

듀나 그게 도대체 뭔데요?

파프리카 드라마 후반에 선우환이 유승미를 차는 장면 있죠? 그걸 보고 알았어요. 그 장면에서 선우환은 유승미에게 자긴 처음부터 특별한 감정 따위는 없었다고 말하지요. 처음에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조금 더 보니 암만 봐도 그 말을 진짜로 믿고 있는 게 분명해요. 8년 동안 커플들이 하는 온갖 일들을 다하고 주변 사람들도 다 공식 커플로 인정하고 있는데도 그렇단 말이에요. 보면서 ‘녀석은 참 세상을 쉽게 사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선우환은 입장이 바뀌면 그 입장에 자신을 잽싸게 적응시키는 인간이에요. 그리고 녀석에겐 그게 굉장히 손쉽죠. 그것이 자신의 과거를 배신하는 일이어도 상관없어요. 자기 기억은 언제나 새 입장에 맞추어 교정하면 되니까. 역겨운 부류에요. 현실세계에서는 등에 칼 맞기 딱 좋은 성격이지요.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선우환 캐릭터는 시작부터 인기를 끌었어요...

듀나 전 그 현상이 더 불쾌했어요. 그 반응이 인물의 매력에서 기인한 게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도 눈에 잘 보였기 때문이지요. 이건 학습에 의한 조건반사예요.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죠. 초반의 선우환은 동정을 살 가치가 없는 불쾌한 인물로 그려졌고 비교적 호감형의 연예인인 이승기를 캐스팅했다는 걸 제외하면 추가된 매력은 제로였어요. 하지만 방영 첫 날부터 게시판은 ‘선우환 오빠 짱!’ 따위의 게시물로 도배가 되었죠. 모두 이승기 팬들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해요. 팬들이란 다들 어느 정도 장님이 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게 드라마 시청자들의 습관에서 비롯되었다는 거예요. 그들은 선우환이 소위 ‘길들여지는 나쁜 남자’의 공식에 속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때문에 인물이 실체 있는 매력을 전혀 보여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으로 그를 받아들였지요. 이건 어떻게 봐도 좋은 현상이 아니에요.

파프리카 전 선우환보다 선우환에 대응하는 고은성의 태도가 더 짜증나더군요. 특히 말투요. 겨우 두 살 많은 남자애에게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존댓말을 올려붙이는 건 못 봐주겠더이다. 선우환이야 할머니에게도 말까는 놈이니 포기한다고 쳐도 고은성은 도대체 왜 그런답니까? 심지어 드라마 후반부에서 고은성은 선우환의 상사였어요. 마땅히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하지요. 상대방이 계속 말을 깐다면 최소한 자기도 까야지.

듀나 맞아요. 종종 전 드라마 작가들의 수구성에 소름이 돋을 때가 있어요. 언어, 특히 언어를 통한 권력 관계는 드라마에서 굉장히 중요해요. 하지만 그걸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생각 외로 드물고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많은 작가들이 그들이 사는 실제 세계의 것보다 훨씬 보수적인 틀 안에서 생각하고 있어요. 드라마의 논리에 따르면 고은성은 씩씩하고 자존심 강한 인물이어야 해요. 하지만 선우환과 대화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면 작가가 자기가 쓴 설정집을 제대로 읽긴 했나 의심을 하게 되지요.

이건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에요. 로맨스를 지배하고 등장인물의 성격을 지배하지요. 고은성은 나쁘게 시작한 인물이 아니었어요. 분명 가능성이 있었죠. 하지만 선우환과 연애질을 시키면서 얘는 그냥 성격이 죽어버렸어요. 중반 이후에 보세요. 과연 고은성이 스스로 무얼 하긴 하나요? 아무 것도 안 해요. 심지어 삼각관계 중간에 서 있으면서도 그 간단한 결정도 내리지 않아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죠. 복수? 사라진 동생을 찾는 것? 그걸 위해 고은성이 도대체 무얼 했죠? 선우환 옆에서 징징 짜는 것?

파프리카 하지만 그 짜증나는 연애질을 하는 동안 시청률은 40 퍼센트를 넘어...

듀나 모든 드라마의 시청률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요. [대장금]처럼 그럴 자격이 있는 드라마도 있죠. 하지만 [찬란한 유산]의 시청률엔 훈련된 시청자들의 조건반사 이상의 의미는 없어요. 종소리 듣고 침 흘리는 개를 분석해봐야 침밖엔 얻을 수 없죠. 시청자들이 열광했다는 선우환의 고백 대사를 보세요. 그게 과연 진지하게 받아들일 종류의 것인가요? 어디선가 좀비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요. 입도 움직이고 소리도 들리는데, 의미 있는 생각 따위는 찾을 수가 없군요. 설탕 친 죽은 관습이죠. 하긴 설탕 맛에 먹는 사람들도 있겠다.

파프리카 그거 보면 재미있기도 해요. 작가는 어떻게든 고은성을 자립형 여자주인공으로 만들어주려고 하는데 그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요. 이런 캐릭터는 어떻게든 틀을 넘어서 행동하고 사고해야 하는데, 고은성은 철저하게 틀 안에서만 움직이지요. 바로 그 틀이 캐릭터의 자립을 방해하는 데도요. 고은성의 가장 큰 적은 백성희 여사가 아니에요. 바로 작가지요. 고은성은 피란델로 희곡 주인공처럼 작가와 연출자에게 반기를 들지 않고서는 결코 스스로 설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듀나 다른 캐릭터들도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박준세는 은근슬쩍 고은성에게 허락도 안 받고 말까는 것만 빼면 준수한 친구죠. 하지만 지나치게 ‘키다리 아저씨’ 롤 모델로 그려져서 의미 있는 개성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철저하게 도구적 인물이지요. 민폐 모녀 오영란과 선우정은 기능성 캐리커처에 불과한데 그 역도 제대로 못 했어요.

파프리카 제가 가장 싫어했던 인물은 고은성 아빠 고평중이에요. 이 인간은 그냥 첫 회에 죽었어야 했어요. 아니면 중간에 백성희에게 살해당하든지. 보험사기범이고 모든 민폐의 기원인 주제에 백성희에게 도덕 강의를 늘어놓는 걸 보면 기가 차더라니까요. 그러면서 틈틈이 작가에게 아부라도 떨었는지 감옥에도 안 가요. 그는 절대로 이렇게 잘 봐줄 가치가 있는 인물이 아니에요.

듀나 이 드라마의 진짜 악당은 박 변호사지만 짜증유발만 따진다면 고평중을 능가할 수 없죠. 그러는데 웃기는 건 박 변호사도 감옥에 안 가요. 더 웃기는 건 그 사람도 몇 초 만에 개과천선해서 마지막 회에는 착한 척 하고 있다는 거죠.

파프리카 모든 사람들은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건 드라마의 중요 주제이긴 하지요. 이 드라마에서 그나마 견딜만한 사람들도 모두 시작은 나빴어요. 표집사는 전과 있는 조폭 출신이고 혜리는 학교 일진이었잖아요.

듀나 솔직히 인물 소개에 나온 그 사람들 과거는 못 믿겠어요. 별다른 일관성이 느껴지지 않아요. 드라마 중간에 ‘개선’되는 인물들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들은 변할 수 있다’라는 주제를 내세우고도 변화 과정을 이렇게 조악하게 그릴 수밖에 없다면 드라마는 그냥 실패했다고 할 수밖에요.

파프리카 아까 이 드라마에서 흥미를 끄는 인물들이 서너 명 정도 있다고 했지요?

듀나 네, 세 사람이죠. 장숙자, 백성희, 유승미요. 장숙자 여사는 인물 자체가 흥미로웠고, 백성희와 유승미는 그 사람들의 딜레마가 당겼어요. 드라마가 끝난 뒤에 보면 세 사람 모두 그리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고, 사실 백성희와 유승미는 철저한 실패작이었지만, 그래도 관심을 갖고 따라갈 만한 사람들이긴 했어요.

파프리카 제 의견을 말하라면 이 드라마에서 가장 생생했던 커플은 장숙자와 고은성이었어요. 고은성과 선우환은 그냥 작가가 어거지로 끼워 맞춘 사이였지요. 어색하고 좀비 같았어요. 하지만 장숙자와 고은성의 이야기는 스토리 내에서 비교적 자연스러웠고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도 진짜 같았어요. 심지어 장숙자는 트렌디 드라마의 젊은 남자 주인공이 할 법한 행동들을 일부러 고은성 앞에서 하기도 해요. 은퇴를 앞둔 한국 할머니가 손녀뻘 되는 아가씨 앞에서 차를 끌고 나와 멋있는 척 하는 걸 보는 건 정말 재미있었다니까요.

듀나 고은성과 선우환이 재미없었던 것도 그 대비 효과 때문일 거예요. 이들의 관계는 스토리 내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관습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졌지요. 최악이에요. 하지만 장숙자와 고은성의 경우는 스토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작정하고 그 관습을 파괴하고 있어요. 당연히 상대적으로 기가 죽을 수밖에.

전 장숙자의 변태성에 끌렸어요. 게시판에서 드라마 생중계를 하는 동안 우린 이 사람을 ‘SM 할머니’라고 불렀죠. 실제로 장숙자는 만만치 않은 변태예요. 철저하게 권력 관계에 집착하고 쾌락 대부분을 그 관계를 통해 얻지요. 가족 관계도 그렇고 회사에서도 그래요. 심지어 고은성과 연애하는 동안에도 그랬어요. 장숙자는 고은성에게 마음을 열고 전재산을 주려는 착한 할머니가 아니에요. 신분을 위장해서 애를 작정하고 괴롭히고, 집안이 호랑이굴인 걸 알면서 고은성을 끌어들이고... 그러면서 엄청난 밀고 당기기의 고수여서... 그런 사람이 왜 지금까지 가족들을 그렇게 방치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아, 알 수도 있겠다. 이렇게 엉터리로 방치하다가 갑자기 목줄을 죄면서 즐길 생각이었을 거예요. 며느리와 손주들 돈줄을 끊고 나서 장숙자가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보셨나요? 가족에 대한 사랑? 물론 사랑 맞죠. 철저하게 사디스틱한 사랑이어서 탈이지.

파프리카 그 변태성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장숙자가 곯아떨어진 손자의 발을 씻어주면서 할미 사랑이 어쩌구 하는 자뻑 독백을 늘어놓는 장면이었는데... 그 장면은 와...

듀나 정말 끝내주죠!

아쉽게도 주제와 연결된 장숙자의 기본 가치는 이 사람의 변태성이나 연인으로서의 자질을 따라잡지 못해요.

우선 장숙자의 존재 이유를 보죠. 이 사람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올바른 기업인의 상으로 설정되었어요. 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잘 다룬다면 충분히 유의미한 드라마가 나올 수도 있고요.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하지만 올바른 기업인의 상을 그리는 것만으로 드라마는 완성되지 않아요. 사람이 좋은 것으로, 그 사람의 일차적 행동만으로 모든 게 극복되면 좋겠죠.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던가요? 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 교정하고 저항이 발생하면 저지하는 시스템이 존재해요. 만약 생판 모르는 젊은 여자에게 전재산과 회사를 물려주고 그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완성시키려는 기업인의 이야기가 드라마의 주축이라면 당연히 그 드라마의 메인 스토리는 그 두 사람과 시스템과의 싸움이어야 해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각관계가 아니라. 그리고 거기엔 철저한 사전 조사와 그에 따른 사실성이 개입되어야 하지요. 하지만 [찬란한 유산]에서 그런 사전조사나 사실성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건 방사능 돌연변이 거대 개미 나오는 영화를 만들어놓고 핵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거랑 전혀 다를 게 없어요.

파프리카 [그들!]은 재미있는 영화였지요.

듀나 재미있었죠. 하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잖아요. 하여간 문제는 주제에 대한 작가의 이 건들건들한 태도가 장숙자라는 인물의 성격을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행동을 제약했다는 거예요. 정작 마지막 힘을 다 쏟아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를 완성하려는 기업가의 이야기가 젊은 애들 사각 관계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으니 말이죠. 게다가 그 제한된 시간 동안 장숙자가 하는 일은 얼마나 허술한가요. 막판에 사원들에게 자기 소유의 주식을 나눠주는 것만 해도 그래요. 몇 초 동안 산타 기분은 낼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게 과연 해결책일까요? 문제의 끝일까요? 전 오히려 장숙자가 빌라도처럼 손을 씻으며 “여기까지 했으니까 난 앞으로 일어날 일에 책임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더군요.

파프리카 백성희로 넘어갈까요? 전 이 캐릭터가 등장했을 때 정말 탄성이 나오더군요. 김미숙의 존재감과 연기가 그만큼 대단했거든요.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캐릭터를 이해하기가 어렵고... 정말 모든 게 이상해졌어요.

듀나 백성희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어요. 정말로 무시무시한 악당이 될 수 있는 기회와 딸의 행복을 위해 전력질주하다 계속 잘못된 선택을 해서 구렁텅이에 빠지는 습관적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이들 중 한 쪽에 집중했어도 이 인물은 대단한 성공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사람은 드라마 진행 중 중간에 끼어버렸어요. 기본 설정, 인물, 드라마 기여도 모두가 조금씩 어긋나고 맞지가 않아요.

아까 김미숙의 연기에 대해 말했죠. 제가 보기에 그건 훌륭한 연기이면서도 결과적으로 실패작이에요. 김미숙은 백성희에 강렬한 카리스마와 무게감을 부여했어요. 여기까지는 좋아요. 문제는 백성희가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거죠. 이 사람은 엄청난 악당도 아니고 똑똑하지도 않으며 핸디캡을 커버할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평범하고 엉성한 소악당이죠. 이런 인물을 그리려면 결코 김미숙처럼 접근해서는 안 돼요.

물론 최종 실패의 원인은 작가에게 있어요. 아까 백성희의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사실 선택의 여지는 하나밖에 없어요. 두 번째 가능성은 백성희가 보다 주인공의 위치에 가까울 경우에나 제대로 먹히니까요. 백성희는 처음부터 팥쥐 엄마로 설정되었으니 일단 악역의 위치에 충실하는 게 낫죠. 백성희가 딸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음모를 꾸미고 그것들이 계속 들통 나서 그것들을 덮느라 또 엉성한 거짓말을 저지르는 걸 보는 건 나름 재미있지만 전체적인 드라마에 큰 도움은 안 돼요. 이런 인물은 영리하고 능력 있을수록 좋죠. 입체적인 인간성과 갈등을 부여하는 건 다음 문제고. 일단 도대체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잖아요. 몇 초 슬쩍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지는 거짓말들인데. 고은성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이어서 그렇지 정상적인 드라마라면 다 합쳐도 서너 회 안에 파탄 났을 걸요. 백성희를 제대로 된 악당으로 만들었다면 김미숙도 이렇게 낭비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파프리카 그래도 백성희와 유승미의 애증섞인 갈등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입체적이고 흥미진진한 드라마였어요. 고은성이 대한민국 연애 이야기의 기본 공식에 따라 생기 없이 움직인다면 백성희와 유승미에게는 의미있는 동기와 갈등이 있었어요.

듀나 다른 내용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사용되었다면 더 좋았겠죠. 여기선 그냥 용두사미예요. 뭐, 이런 식으로 유승미가 백성희의 뒤를 이어 꼬마 악당이 되었다 좌절하는 이야기도 무의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드라마의 가능성을 최대한 살리는 것도 아니고 배우에게도 좋지 않아요. 드라마의 낙차가 그리 크지 않으니까요. 원래 굴복하는 사람들보다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죠. 이 드라마에서 유승미가 도대체 무엇을 했나요? 드라마가 거의 끝날 때까지 맨날 울고 징징거리고 사정하고 애원하고... 간신히 거짓말 한 번 해서 악역이 되나 싶었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 변명만 늘어놓고. 이게 설정낭비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죠?

파프리카 유승미는 많이 딱하지요.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인생을 망친 대표적인 경우랄까.

듀나 그런데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능력도 매력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제인 에어가 세인트 존 리버스를 선택했거나 로체스터가 미스 잉그램을 선택했다면 둘이 얼마나 지루한 사람들이었겠어요? 그건 사람들의 심미안을 보여준다고요. 물론 이 드라마 우주의 경우 워낙 남자물이 형편없었으니 눈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평생 독신으로 살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파프리카 이 드라마에 개선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듀나 드라마가 품고 있는 장르물의 가능성을 살렸다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백성희가 남편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을 죽였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죠. 이 드라마엔 쓸모 없으면서 계속 살아남아 시간 낭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단 말이죠.

파프리카 그랬다면 지금처럼 '착한 드라마' 소리는 듣지 못했겠지요.

듀나 도대체 착한 드라마가 뭡니까? 그게 정말 막장 드라마보다 나은 건가요? 주인공들이 순둥이이고 다들 대충 원칙적으로 올바른 것 같은 말을 하면 '착한 드라마'가 되는 건가요? 그게 좋은 거예요? 최소한 시청자들은 [아내의 유혹]을 보면서 그 이야기에 속아 넘어가지는 않았어요. 자기네들이 막장 드라마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찬란한 유산]은 '착한 드라마' 껍질을 쓰고 너무나도 노골적인 결점들과 단점들을 감추고 훌렁훌렁 넘어가려 하고 있어요. 전 이게 굉장히 기분이 나빠요.

전 이 이야기가 왜 '착한 드라마'가 되어야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죽음을 위장한 보험사기라는 설정부터가 자극적이고 그 자극성은 다루는 소재나 이야기하려는 주제와도 잘 어울렸는데. 세상이 막장이라면 그 막장을 정직하게 그리는 게 '좋은 드라마'죠. 드라마가 무슨 건강식품인가요.

파프리카 착한 드라마로 만들려는 의도 때문에 더 막장 드라마로 떨어지는 작품들도 많지요. 막장 드라마의 화룡정점을 찍는 결말은 대부분 어처구니 없는 화해잖아요. [찬란한 유산]의 허겁지겁 해피 엔딩에도 그런 구석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세상이 물렁물렁하다고 거짓말 하는 게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듀나 전 '닭다리다' 따위의 노래를 연애하는 장면에 넣으면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해가 안 되지요. 천재 피아니스트가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는 내용이면서 이 드라마의 음악은 막장의 끝을 달렸어요. 종종 음악이 삽입되는 마르첼로에게 미안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만큼.

파프리카 고은우 역의 연준석은 연기를 잘 하더라고요.

듀나 잘 하는 배우들이 있었죠. 반효정은 늘 하는 대로 하면서 인물 성격과 잘 맞았고, 김미숙은 조금 어긋난 느낌이 있긴 했지만 좋은 배우라는 게 보였어요. 하지만 배수빈과 한효주는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 안에 갇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이외의 다른 일은 하지 못했죠. 문채원은 드러난 최종결과보다 거기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흔적이 더 재미있는 경우였고 이승기는 그냥 끔찍했죠. 다들 이 드라마로 어느 정도 지명도를 얻었을 테니 그걸 발판삼아 다음에는 더 나은 역할을 맡길 바라요.

저로서는 그냥 이 드라마가 끝나서 반가울 뿐이군요.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고. 그냥 끝내죠. '[찬란한 유산]은 별 볼일 없는 드라마다!'라고 고함 친 것만으로 전 제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해야 할 말이었으니까. (09/07/30)

기타등등

한효주와 이승기는 모두 [논스톱 5] 동창생이죠. 전 그 때 그 사람들이 속해 있던 커플들이 훨씬 좋았어요. 한효주/타블로는 거의 완벽한 커플이었고 구혜선/이승기도 나쁘지 않았죠. 적어도 구혜선/이정 커플보다는 백배천배 나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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