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케멜먼의 두 단편들

2010.01.31 18:21

DJUNA 조회 수:1957

해리 케멜먼의 단편 [9마일은 너무 멀다]는 한동안 시들어 있었던 본격단편추리소설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부활시킨 걸작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닉 웰트 시리즈는 그 뒤로 이만한 걸작은 내놓지 못했지만 그래도 같은 제목의 단편집의 전체적인 수준은 아주 높습니다. 오늘 오후는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이 단편집의 두 작품, [9마일은 너무 멀다]와 [지푸라기 남자]를 비교하며 캐멜먼의 장점과 단점을 가려내보기로 하죠.

우선 [9마일은 너무 멀다]! 이 작품은 케멜먼의 장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그의 장점이 뭐나고요? 극소로 줄인 단서들로부터 논리적으로 가능성을 끌어내는 그 과정의 깔끔함과 경제성. 그리고 무엇보다 그 추리가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의 교묘한 조작입니다.

안 읽으신 분들을 위해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해드리죠. 화자인 검사는 어떤 모임에서 섣부른 추론을 전개하다 망신을 당합니다. 닉 웰트는 추론이란 그럴싸해 보이더라도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11 단어로 된 문장만 주면 그 안에서 그럴싸한 추론을 끌어내보이겠다고 말하죠. 검사는 그래서 그에게 "9마일은 너무 멀다. 비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라는 문장을 제시합니다. 닉 웰트는 그 문장을 분석해서 하나의 상황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교묘하게 계획된 살인입니다. 제시된 문장은 검사가 우연히 엿들은 대화의 일부임이 드러나면서 추론은 사실과 연결됩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소설의 논리가 얼마나 교묘하게 처리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닉 웰트는 우선 한 문장은 진공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그 문장이 말해진 공간을 바로 그들의 도시로, 시간을 오늘로 제한합니다. 이게 사실과 일치한 건 우연이지만 억지스러운 우연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우연에 의해 문장과 겹치된 상황은 단 하나의 결론만을 향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케멜먼이 쓴 서문을 읽으신 분이라면 그의 집필 순서를 눈치채셨을 겁니다. 간단히 일반화시켜 볼까요? 우선 특이해 보이는 사건을 생각해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사건의 설명이 될 만한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닉 웰트를 끌어들여 그 상황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증명합니다.

[9마일은 너무 멀다]는 이 방식이 완벽한 성공을 거둔 작품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냐고요? 그가 출발한 단어는 너무나 넓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어서 다양한 상황을 만들어낼 여유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모든 사건이 다 그렇게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실패의 원인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지푸라기 남자]는 그 때문에 처음부터 걸려넘어져 버린 작품입니다. 물론 저는 이 작품도 상당히 뛰어난 퍼즐 미스테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실패작이기도 합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애당초부터 무리한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에 실패작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잘해냈으니 뛰어나다는 것이지요.

줄거리를 말씀드릴게요. 지역 유지인 의사의 외동딸이 유괴됩니다. 의사는 몸값을 지불하고 딸을 되찾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위해 고용된 탐정이 그 사건을 경찰에 알리지요. 그래서 공개 수사가 시작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협박 편지에 지문이 찍혀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부러 찍은 것처럼 편지 전체에 다닥다닥...

멋진 시작이고 다 좋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편지에 지문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쉽지 않다는 거죠. 케멜먼은 하나의 해결책을 생각해내기는 하지만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결말도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를 끌어다가 결국 자기가 만든 상황에 걸려 넘어지고 만 거죠.

여기엔 교훈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습작을 하는 추리 작가 지망생이라면 꼭 기억해두셔야 할 일입니다. 그건 바로, 만족스러운 결말을 생각해낼 수 없다면 아무리 근사해보이는 시작이 생각나도 그것만 가지고 작품에 덤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94/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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