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핑 더 벨벳 Tipping the Velvet (1998)

2010.03.14 09:37

DJUNA 조회 수:4738

Sarah Waters (글) 다른 제목: 벨벳 애무하기

사라 워터스는 처녀 장편인 [티핑 더 벨벳]을 통해 완벽한 가짜 빅토리아 시대 소설을 창조해냈습니다. 주인공 낸시 애슬리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19세기 문학 작품의 고풍스러운 어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톰 존스]나 [몰 플랜더즈]와 같은 18세기 피카레스크 소설의 플롯에 디킨즈의 느낌을 첨가한 듯한 투박하고 멜로드라마틱한 스토리 역시 예스러운 냄새를 풀풀 풍기지요.

그러나 워터즈가 그려낸 19세기 말의 영국은 독자들에게 이상할 정도로 낯선 곳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주류 작가들은 결코 이런 식의 소설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워터스가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그들이 소설의 소재로 쓸 수 있었던 곳이 아니었으니까요.

우리의 주인공 낸시 애슬리 역시 전통적이면서도 낯선 캐릭터입니다. 해변 마을에서 태어나 부모가 경영하는 굴식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소녀는 어느날 뮤직홀에서 남장 가수인 키티 버틀러에 매료됩니다. 키티의 의상담당이 되어 런던에 올라간 낸시는 곧 키티의 공식적인 파트너 겸 애인이 되지만 키티의 배신으로 그들의 짧은 허니문은 끝나버리죠. 키티를 떠난 낸시는 런던에서 혼자만의 모험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낸시의 첫번째 모험은 남자로 변장하고 동성애자들을 상대로 한 남창 노릇을 하는 것이었지요...

워터스는 오감을 자극하는 생생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을 웨스트엔드의 뮤직홀과 남창 세계, 상류 사회 귀부인들로 이루어진 사치스러운 '사피스트' 클럽, 막 싹트기 시작한 노동 운동과 여성 운동의 현장으로 인도합니다. 어떻게 보면 워터즈의 작품은 역사학자의 작업에서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티핑 더 벨벳]이 일차적인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역사의 주체로 행세하던 이성애자 남성들에 의해 시선 밖에 밀려나 있었던 당시 동성애자 사회의 숨은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었을테니까요. 새로 발굴된 빅토리아 시대의 은어들('tom', 'renter', 'mary-anne' 그리고 이 책의 제목으로 쓰인 'tipping the velvet')에서부터 당시 섹스 토이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이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은 광대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신선한 정보들에 비해 스토리는 비교적 전통적인 편입니다. 결국 이 소설이 하는 이야기란, 첫사랑한테서 배반당한 주인공이 천상과 지옥을 오가는 다양한 모험을 겪다가 마침내 진정한 사랑을 만나 행복하게 자알 살았다는 내용이잖아요. 무대가 백 여년 전의 영국이 아니었다면 낸시의 마지막 변신이 지나치게 설교투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러나 이런 익숙함이 책의 재미를 떨어뜨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매력의 일부일 거예요. [티핑 더 벨벳]의 1차적인 매력은 전통적이고 익숙한 스토리와 낯설고 금지된 소재의 대조에 있으니까요. 그건 어떻게 보면 워터스가 무대로 삼은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적 매력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런 걸 다 잊는다고 해도, 이런 고전적인 이야기가 주는 익숙한 재미도 강렬한 법이고 (어떻게 두 행복한 연인들의 키스로 끝나는 해피엔딩을 냉소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겠어요?) 정확한 풍속묘사와 은근한 대리 만족의 판타지를 뒤섞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끌어가는 워터스의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도 뛰어나서 불만의 여지는 없습니다.

하여간 재미있는 책입니다. 무척 빨리 읽히기도 하고요. 일단 책을 잡으면 결말에 이를 때까지 472 페이지가 물 흐르듯 술술 넘어가는군요. (01/07/30)

기타등등

BBC에서 3부작 미니 시리즈로 각색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국내 채널을 통해 방영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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