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티에 라탱 Le Quartier Latin (2000)

2010.03.20 20:32

DJUNA 조회 수:1993

Ken'ichi Sato (글) 김미란 (옮김) 

역사는 당사자들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특히 그 역사가 문화 상품의 재료로 사용될 때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 허망한 일이죠. 잔 다르크를 보세요.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아일랜드 작가 조지 버나드 쇼와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쉴러의 것입니다. 덴마크의 마마보이 왕자 햄릿도 영국 작가 셰익스피어가 없었다면 그만큼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요? 조금 더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예수는 어때요?

그러나 이런 식의 역사 차용이 작가가 속해있는 문화권을 훌쩍 벗어난다면 그 결과는 재미있어집니다. 서구 문화야 처음부터 기독교의 영향에 젖어 있으니 예수의 일생은 당연한 문화의 일부입니다. 잔 다르크가 프랑스인이라고 해도 작가들에게 그렇게까지 먼 이웃은 아니니 다른 유럽 작가가 그 소재를 채택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고요. 하지만 서구 작가가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역사를 다룬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아니, 더 재미있는 건 그 반대의 경우죠. 동양 작가가 서구 역사를 소재로 삼는 것 말이에요.

사토 겐이치는 후자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르네상스 이후의 프랑스를 무대로 한 여러 편의 역사 소설들을 써왔고 그 중 [왕비의 이혼]과 [2인의 검객]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카르티에 라탱] 역시 신구교의 갈등이 첨예화되던 16세기의 파리를 무대로 하고 있는 역사 미스터리입니다.

독자들, 특히 저와 같은 제3국 독자의 입장에서 작가의 국적과 소재의 불일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토 겐이치의 경우는 특이성보단 우리에게 익숙한 보다 보편적인 문화적 소비의 한 양태를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습니다다. 태평스럽게 서구 역사를 자신의 기본 소재로 삼는 일본 소설가들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겠지만, 이런 식의 역사 활용 자체가 드문 것은 아니죠. 모두가 아는 [베르사이유의 장미]도 그런 예중 하나가 아니던가요. 심지어 그 작품은 자크 드미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죠. 프랑스 내에서는 개봉도 되지 않았던, 프랑스 영화인 척하는 일본 영화였지만요. 서구 문화권의 오리엔탈리즘 성향처럼, 일본과 같은 동양 문화권의 서구 문화의 소비에는 분명 자기만의 기울어진 취향이 녹아 있고 어떤 경우 그 열정은 '소유자들'을 능가하기도 합니다. ([빨강 머리 앤]의 가장 열광적인 팬들은 누구죠?)

그렇다고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사토 겐이치의 소설을 동격으로 놓을 필요는 없으니, [카르티에 라탱]은 분명 전문가의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제목 [카르티에 라탱 Le Quartier Latin]은 '라틴어 구역'이라는 뜻으로, 파리 센 강 좌안의 대학가를 가리킵니다. 소설은 가문의 힘을 등에 업고 야경대장이 된 풋내기 청년 드니 쿠르팡과 그의 옛 가정교사인 마지스테르 미셸이 카르티에 라탱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범죄들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죠. 얼핏보면 평범한 작은 범죄에 불과했던 것 같던 이 일련의 사건들은 곧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 속에서 기독교 신학의 근간을 위협하는 거대한 음모로 발전해가고 그에 따라 소설의 스케일도 커져갑니다.

[카르티에 라탱]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작가가 전문 지식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분명 사토 겐이치는 노트르담 성당의 매춘부에서부터 세느강에 떠내려가는 죽은 말의 시체에 이르기까지, 당시에 대한 정보들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고증을 당시의 사상적 흐름과 연결할 정도의 여유도 갖추고 있고요. 덕택에 이 소설은 알맹이가 꽤 있는 역사물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토 겐이치가 심각하기만 한 철학소설을 쓴 것도 아닙니다. 별명이 '울보 드니'인 화자 드니 쿠르팡은 신학적 토론에 안심하고 안주할만큼 지성적인 젊은이는 아닙니다. 그가 따라가는 살인과 섹스, 첫사랑의 고민으로 범벅이 된 스토리의 전개는 충분히 대중들의 관심을 끌만큼 자극적이고 다채롭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카르티에 라탱]의 자극적 재미는 소설의 깊이와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사토 겐이치가 동원한 수많은 전문 지식과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들어낸 16세기의 파리는 여전히 어딘가 모자랍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완벽하게 재현했어도 여전히 반짝거리는 플라스틱처럼 보이는 레이싱 게임의 파리처럼요. 장 칼뱅이나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이니고 데 로욜라와 같은 당시의 저명 인사들을 등장시켜 당시의 역동적인 신학적 논쟁을 재현하는 시도에도 깊이보다는 지적 허영과 과시가 더 잘 드러나보입니다. 소설은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진지하게 검토해보면 피상적인 정보 이상의 내용은 없어요.

결국 이건 전문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통제하는 작가 자신의 문제입니다. [카르티에 라탱]에선, 인간에 대한 부족한 통찰력을 이국적이고 낯선 단어들의 남발과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멋진 서양 남자주인공'으로 커버하려는 시도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입니다. 아마, 작가가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라는 시대 배경을 잡은 것 때문에 그 의도가 더 심하게 드러나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툭하면 '마지스테르 미셸'과 '마지스테르 미셸의 법칙'을 외쳐대는 드니 쿠르팡의 나레이션은, 극적인 순간에 긴 유럽식 이름들을 나열하는 데 어설픈 집착을 보이는 일본 만화 주인공들의 페티시에서 크게 떨어져 있지 않으니 말이에요. (0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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