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륜

2010.03.20 21:15

DJUNA 조회 수:2308

몇 년째 잘 쓰고 있던 일상적인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지 않나요? 전 얼마 전에 ‘사과’라는 단어를 읽다가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문소리 주연의 새 영화 포스터를 보다 느꼈던 거죠. 도대체 사과가 뭐지? 왜 이 단어를 아무런 생각 없이 당연하게 썼던 거지? 발음도 이상하잖아. 사과, 사과, 사과... 게다가 전혀 다른 뜻의 두 단어가 하나의 발음에 모였네. 왜 이걸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했지?

‘사과’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진다고 해서 특별히 세상이 나아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쓰는 단어들을 이런 식으로 재검토한다면 결과는 훨씬 긍정적이 될 수 있지요.

오늘 주제로 삼고 싶은 단어는 ‘패륜’입니다. 패륜이 뭡니까? 여러분은 이 단어를 한자로 쓸 수 있습니까? 悖倫입니다. 어그러질 패, 인륜, 무리 윤입니다.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뜻이죠. 영어사전을 찾아봤더니 그냥 심심하게 immorality나 depravity로 번역하고 있더군요. 물론 한자어권에서 패륜은 의미가 더 큽니다. 보다 강한 유교적 의미를 담고 있지요. 도리를 깨거나 왜곡시키거나 위반하는 건 거의 종교적 (유교를 종교라고 친다면) 근본을 부정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이 단어가 한자어권에서 그렇게 무섭게 들리는 거죠. 수천 년간 이어져온 조건반사의 결과입니다.

조건반사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자연스럽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죠. 패륜이 왜 그렇게 무서운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인식했다면 그 다음 단계는 우리가 그런 단어를 들으면 생각도 없이 쫄아버리는 것이 옳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얼마 전에 [올드 미스 다이어리]라는 시트콤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 직후 카우치의 노출사건이 나왔던 터라 두 사건은 현재 공중파 방송의 엄청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고 [올드 미스 다이어리]는 노출 소동이 있었던 [음악캠프]와 함께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솔직히 전 이 둘을 연결시켜야 할 필요를 모르겠습니다. 전혀 성격이 다르니까요. 일단 카우치 소동은 방송국에서 어쩔 수 없었던 사고였습니다. 방송국에서 형식적 책임은 질 수 있어도 도의적 책임까지 몽땅 져야 하는 건 아니죠. [올드 미스 다이어리]의 따귀 소동은 반대로 작가들의 의식적인 표현의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올드 미스 다이어리]의 책임이 더 큰 것일까? 그걸 묻기 전에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따귀를 때리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 일로 비추어졌던 걸까요? 세상엔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들이 있고 드라마와 텔레비전에서는 그것들을 당연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종영된 [부활]의 마지막회만 봐도 자살 두 건에 살인미수 한 건을 다루고 있더군요. 그것도 마지막회만 그랬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올드 미스 다이어리]에서는 그렇게 현명하거나 선량하지도 않은 며느리가 끓어오르는 감정에 못 이겨 시어머니의 따귀를 한 대 친 것뿐입니다. 그 작품이 그런 일을 옳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상이 곧 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왜 이게 더 중요해야 합니까?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얼마 전에 [굳세어라 금순아]에서는 이혼한 옛 며느리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 시아버지가 등장했습니다. 당연히 패륜입니다. [올드 미스 다이어리]의 며느리와는 달리 계획적 범죄이니 죄도 더 큽니다. 하지만 그 드라마에서 패륜을 다루었다고 떠드는 거 봤습니까? 왜 [올드 미스 다이어리]의 따귀 소동이 더 중요해야 합니까?

답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소동은 사실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유교적인 관념에 생각 없이 기계장치처럼 순응하고 있다는 것이고, 아무리 학교 선생들이 유교의 평등(가능)성을 주장해도 우리가 사는 세계에선 수직적인 권위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유교의 부정이나 긍정, 심지어 비판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건 단어와 개념을 다루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심지어 지금 우리가 ‘패륜’이라는 단어를 다루는 방식은 조선시대보다 더 형편없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패륜’의 철학적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겁에 질린 동물처럼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낑낑대며 무서워할 뿐입니다.

[올드 미스 다이어리] 소동은 우리가 시트콤에 묘사된 소동 자체보다도 그 소동이 상징하는 시스템의 붕괴를 더 무서워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런 식이죠. ‘이걸 놔둔다면 노인네들이 대접받지 못하고 박해받는 세상이 올 거야, 아 무서워!’

이런 공포는 의미 없습니다. 왜냐고요? 이미 우리 사회에서 노인네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패륜’에 매달린다고 해서 우리가 그네들을 보호했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가족에 맡기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방심하고 방치했죠. 그걸 보고 ‘눈가리고 아웅’이라고 합니다.

결정적으로 노인네들도 바뀝니다. 지금의 젊은이들도 나이가 들면 늙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지금의 노인네들과 같을까요?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노화의 불친절함은 그네들에게도 미치겠지만 그들의 문화나 사고방식은 다를 겁니다. 노인이 된 서구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사고방식이 다른 것처럼요. 그 때엔 노인네들과 젊은이들 사이엔 다른 종류의 관계가 형성될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들의 재점검이 필요합니다. 일단 이들 관계 사이에 껴서 생각을 방해하는 모든 관념들을 검토해야 합니다. ‘패륜’도 그런 관념 중 하나입니다. 쓰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의미를 무시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쓰기 전에 그게 어떤 문화적/철학적 맥락 안에서 쓰이는지 한 번 생각이나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책 읽기가 귀찮은 사람들은 그냥 컴퓨터 앞에서 자판 몇 번 두드리면 됩니다.

[올드 미스 다이어리]에 대해서 덧붙인다면, 그 프로그램은 노인네들을 당당한 주인공들로 내세우고 그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다루었던 얼마 안 되는 프로그램입니다. 과연 그 사건 하나만 가지고 그 프로그램을 ‘패륜방송’으로 몰고가는 게 얼마나 따분하고 비생산적인 일인지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죠. (0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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