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Hamlet (2004)

2010.03.20 23:38

DJUNA 조회 수:12974

연출: Patrice Caurier & Moshe Leiser 출연: Simon Keenlyside, Natalie Dessay, Béatrice Uria-Monzon, Alain Vernhes, Daniil Shtoda, Markus Hollop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다룬 오페라가 은근히 없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원래 훌륭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가 얼마 없어요. 기껏해야 [피가로의 결혼] 정도죠. 몰리에르나 쉴러의 원작을 각색한 오페라가 얼마나 되나요? 별로 없잖아요. 호프만스탈의 경우야 처음부터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에게 빌붙은 경우이니 예외고요. 차라리 소설이 오페라로 각색하기 쉬워요. 각색자의 여유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셰익스피어와 같은 희곡을 각색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죠. 이미 무대 환경을 계산하고 꽉 짜여진 작품을 어떻게 다시 오페라로 각색하겠어요? 게다가 셰익스피어의 경우는 장면 전환도 엄청 많잖아요. 결코 만만치가 않다고요.

그래도 워낙 텍스트가 주는 매력이 강렬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은 오페라들이 꽤 많이 나오긴 했어요.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주제페 베르디의 오페라들일 거예요. [맥베스], [오텔로], [팔스타프]는 모두 원작의 낯을 살려준 훌륭한 오페라들이죠. 벨리니와 구노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한 오페라를 작곡한 적 있고요. 최근엔 벤자민 브리튼이 [한여름밤의 꿈]의 오페라 버전을 만든 적 있고, 희곡은 아니지만 [루크레치아의 능욕]을 각색한 오페라도 쓴 적 있어요. 이 정도면 적다고 할 수는 없죠. 이것 말고 지금은 거의 공연되지 않는 수많은 오페라들이 있으니까요. 지금은 서곡만 가끔 연주되는 오토 니콜라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과 같은 작품들 말이죠.

앙브루아즈 토마의 [햄릿]도 발표 당시엔 꽤 인기있었던 작품입니다. 요새는 [미뇽]만이 주로 상연되지만 [햄릿]도 당시엔 작곡가의 대표작 중 하나였죠. 하지만 발표당시에도 논란이 많았던 작품이기도 해요. 가장 큰 이유는 각색 때문이죠. 토마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관객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원작을 많이 바꾸었어요. 어차피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쓴 유일한 작가도 아니니 그 정도야 용납할 수 있지만, 해피 엔딩으로 바꾼 결말은 정말 기가 막힌답니다. 그걸 걱정해서인지, 토마의 오페라가 영국에서 상연되었을 때는 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충실한 새로운 판본을 작곡가가 직접 작곡했다고 하더군요. 그 버전도 궁금해요. 전통이 어떻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었느냐... 일단 오필리아의 비중이 엄청 커졌어요. 거의 주연급이에요. 원작과는 달리 둘은 결혼 직전까지 간답니다. 심지어 오필리아의 광란과 자살 장면만으로 제4막이 채워지니 어떻게 보면 햄릿보다 더 대접이 좋은 거죠. 햄릿의 주변 상황은 더 힘겨워요. 원작에서는 클로디어스의 단독범행이었잖아요. 그런데 이 오페라에서는 거트루드와 폴로니어스까지 공범이지요. 캐릭터들이 많이 날아가기도 했어요. 로젠크렌츠와 길든스턴은 등장하지도 않고 호레이쇼도 잠시 얼굴만 내밀고 사라지죠. 햄릿도 보다 적극적인 인물이에요. [곤자고의 시역] 장면에서 햄릿은 정말로 클로디어스가 살인자라고 고발한답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서 은근슬쩍 미치광이 흉내로 빠지지만요.(아니면, 정말 미친 건가?) 결정적으로 결말이 달라요. 오필리아의 장례식 장면에서 모든 게 다 해결된답니다. 갑자기 햄릿 선왕이 나타나 햄릿을 부추기는 거예요. 그럼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찔러 죽이고 왕이 된답니다. 아니, 뭐, 세상에, 이런, 뭐... 정말 할 말이 없군요.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건 좋지만 이건 너무 건성이잖아요! 시간이 모자랐다면 차라리 쓸모없는 1막을 뺄 것이지!

그러나 아무리 후반이 얼렁뚱땅이라고 해도 토마의 [햄릿]은 고유의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트루드 역시 살인자이기 때문에 거트루드와 햄릿의 대결은 굉장히 강렬하죠. [곤자고의 시역]을 발레(DVD에서는 무언극)로 공연하고 햄릿에게 그 내용을 읊게 한 처리도 훌륭한 오페라적 해결책이고요. 비중이 커진 오필리아 혼자서 끌어가는 4막은 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능가할 정도입니다. 에너지와 기교는 오히려 더 들어갈 걸요. 주변에 다른 가수들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얼렁뚱땅 이야기를 뜯어고친 각본치고는 원작의 요소들을 꽤 많이 남겨놓고 있어요. 대사들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다'나 '존재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와 같은 유명한 대사들은 그대로 들어가죠. 토마의 지나치게 달짝지근한 19세기 프랑스풍의 음악은 텍스트와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귀에 들어오는 좋은 아리아들도 많고(가장 유명한 노래가 햄릿이 부르는 축배의 노래이니 대충 분위기는 짐작하시겠죠) 극적 효과도 좋은 편입니다. 여전히 그렇게 잘 짜여진 오페라라고는 할 수 없고 부분부분 따로 감상하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수준이지만요.

오늘 이야기할 DVD에 수록된 공연은 2003년 바르셀로나의 리세우 대극장에서 베르트랑 드 비이의 지휘 아래 공연한 버전인데요, 사이먼 킨리사이드가 햄릿을, 나탈리 드세가 오필리아를 연기하고 있습니다. 시대 배경은 19세기 말 정도를 잡고 있는데, 살짝 시대착오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현대적이어서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는 아니에요. 사실, 19세기 말 정도의 분위기가 [햄릿]에겐 좋죠. 햄릿의 우울한 로맨티시스트 분위기에 딱이니까. 전체적으로 연출은 납득이 가요. 은근슬쩍 피투성이이고 신경질적인 분위기도 마음에 들고요.

사이먼 킨리사이드가 불어로 노래를 부르는 걸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인데, 발음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저도 모르죠. 하지만 그는 햄릿 역에 상당히 잘 맞습니다. 침울하고 사색적이고 은근슬쩍 광기가 넘쳐 흐르죠. 이 사람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곤자고의 시역]인 것 같아요. 냉정하게 통제된 조용한 증오가 한 걸음씩 분노와 광기를 향해 옮겨가는데 그냥 근사해요. 나탈리 드세는 위에서 언급한 4막 하나만 가지고도 본전을 뽑았다고 할 수 있고요. 4막의 아리아를 부른 뒤엔 박수가 너무 길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가 어려울 정도더군요. 거트루드를 연기한 베아트리스 우리아-몽종과 사이먼 킨리사이드가 대결하는 3막 2장도 훌륭했고요. (07/05/11)


 
유령 아빠의 등장.

 
"쟤가 울 아빠를 죽였어!"

 
"지금 죽이면 복수가 아니잖아."

 
오필리아를 차는 햄릿.

 
거트루드와 햄릿.

 
광란의 루치아...아니, 오필리아. 불어식으로 하면 오펠리죠.

 
다음 연기로 들어가야 하는데 박수가 안 멎어요.

 
유령 아빠가 뒤에서 잡고 있는 동안 아들이 칼을 뽑아요.

기타등등

토머스 햄슨과 나탈리 드세가 출연하고 시대배경이 1920년대인 영상물도 있다는군요. 그것도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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