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Prinz Hamlet (2005)

2010.03.21 12:08

DJUNA 조회 수:2435

 Friedrich Karl Waechter (글, 그림) 김경연 (옮김)

전 어린이를 위한 셰익스피어 각색물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원작의 매력을 어린 독자들에게 제대로 소개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요. 램 남매의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나름대로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 역시 모범적인 줄거리 축약본일 뿐 원작의 풍미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지는 않죠. 그냥 나중에 셰익스피어를 읽을 독자들을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카를 베히터의 [햄릿]은 조금 다릅니다. 이 작품은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책인데, 단순한 축약본이 아닙니다. 베히터는 단순히 줄거리를 요약하는 대신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그대로 가져와 해체해서 자기 식으로 자유롭게 재구성하고 있어요. 파격적이지만 예상외로 원본에 충실한 각색이기도 합니다.

이 각색에서 가장 동화적인 것은 햄릿의 장난감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곰인형과 어릿광대 인형요. 어린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유치한 설정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은 달라요. 오히려 이들은 꽤 진지한 존재들이며 역할도 큽니다. 이들은 햄릿의 마음을 읽기도 하고 그에게 조언을 주기도 하며 이 각색물에는 정식으로 등장하지 않는 다른 인물들, 그러니까 호레이쇼, 병사들, 배우들과 같은 인물들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장난감들의 대화는 다르지만,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는 많이 남아있습니다. 프레임 밖에 있는 지문이 그림의 상황을 설명하면, 안에 있는 텍스트는 극중 인물의 대사들을 전하는데, 그게 원작에 상당히 충실한 것이죠. 어떻게 보면 연극 무대를 그림책의 형식에 이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곰인형과 어릿광대 인형이 나오는 그림책이지만, 베히터는 어린 독자들을 위해 애써 이야기의 수준을 낮출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햄릿의 기본 줄거리를 모르고 보면 이 그림책의 이야기는 헛갈려요. 배경도 설명 하지 않고 등장인물 소개도 안 하니까요. 몇몇 장면은 정말 성인용입니다.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가 섹스하는 침대 밑에서 햄릿이 웅크리고 있는 장면 같은 게 그렇죠.

가장 큰 차이는 결말입니다. 이 그림책에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에는 있는 복수의 쾌락이 제거되어 있습니다. 폴로니어스를 살해한 햄릿은 감금되고 복수는 중단됩니다. 클로디어스는 처벌되지 않고 햄릿은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지요. 어떻게 보면 원작보다 훨씬 더 우울한 결말입니다. 그나마 요란한 죽음으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기라도 했던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패배의식과 죄책감,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절대 고독에 갇혀버리죠.

대충 그린 캐리커처와 같은 거친 그림체는 건성으로 보이지만 서서히 사람 마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이처럼 쉽게 그린 그림이 이 만큼 강렬한 시를 품고 있는 걸 보면 신기할 정도죠. (08/10/17)

기타등등

베히터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그는 이 작품을 쓰고 2005년 9월에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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