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의 역습

2010.02.05 21:54

DJUNA 조회 수:2792

1.

저번 설날 연휴에 [라스트 액션 히어로]를 보고 있는데 꽤 흥미로운 대사가 뒤에 나오더군요. 영화 속으로 돌아온 잭 슬레이터가 서장한테 이렇게 호통을 치는 겁니다. "난 앞으로 더이상 사람도 많이 다치게 하지 않고 집도 덜 부술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클래식 음악도 듣겠어요. 난 클래식이 좋아요."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재미있지 않으세요? 잭 슬레이터의 음악 취향이 갑자기 바뀐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시나리오 작가들이 잭에게 클래식 음악을 접할 기회를 주지 않았겠지요. 그랬으니, 현실 세계에서 그가 지금까지 진지하게 들은 적 없는 모짜르트에게 매료되어 그 취향을 자기 세계까지 끌고 들어간 것은 꽤 그럴싸합니다.

그런데 나머지는 뭘까요? '더 이상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건물도 부수지 않겠다?' 언제 잭이 죽이라고 해서 사람을 죽이고 부수라고 해서 건물을 부수었나요? 다들 만류하는 데도 자기 멋대로 한 짓이 아닙니까? 그건 그 사람 천성이었어요. 그런데 자기 천성을 바꿀 생각이라... 이건 폭력 형사 잭 슬레이터의 심각한 존재론적 고뇌가 맺은 결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군요. 분명히 반항입니다. 시나리오 작가로부터 자신의 자유의지를 찾기 위한!

하지만 성공할 수가 있을까요? 영화 속의 대사에서도 나오지만 그가 꾸려가던 세계는 시나리오 작가의 키보드 위에서 까딱거리며 만들어진 세계였지요. 그리고 그럴 돈을 만들어 주는 사람은 바로 헐리우드의 제작자였습니다. 과연 얌전하고 지적으로 변한 슬레이터를 위해 제작자가 돈을 대 줄는지? 만약 돈을 대 주지 않아 세계가 더이상 지속될 수 없다면 잭 슬레이터의 자유의지가 아무리 단단하게 여물었어도 허사가 아니겠어요?

2.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였지만, 바로 그 날 [스타트렉: 다음 세대]에서 역시 그만큼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재방송했었습니다. 엔터프라이즈 호 홀로덱의 셜록 홈즈 프로그램에서 모리어티 교수가 도망쳤지요. 그는 자신과 그의 연인인 백작부인을 '진짜 세계'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며 난동을 피웁니다.

어떻게 허상의 존재가 물질화될 수 있었을까? 당연히 불가능했습니다. 모리어티는 홀로덱이 만든 또다른 허상에 들어간 것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그가 나온 세계 역시 홀로덱이었지요. 피카드 선장은 그 허상을 영구적으로 지속시켜 줌으로써 교수와 백작부인에게 탈출했다는 환상을 줍니다.

이 경우 교수와 백작부인이 완전한 자유의지를 실행하며 여생을 보낼 것이라는 점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물론 자유의지가 의미하는 것이 뭐냐를 따지면 골치 아파지니까 대충 상식적인 정의로 만족합시다. 적어도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독자적인 자신들의 흐름에 따를 것이고 남의 간섭은 받지 않겠지요. 결국 그들과 세계(피카드 선장이 만들어준)의 체스 게임은 공정합니다.

물론 자유를 부르짖던 모리어티나 백작부인이 이 모든 진상을 알았다면 노발대발했을 겁니다. 그들은 여전히 꼭둑각시로 남아있으니까요. 하지만 진짜 세계로 나오건 다른 프로그램에 들어가건, 자신의 의지를 독립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는 다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진상을 모른다면요.

3.

가끔 허구의 존재들이 실제 세계에 반항하는 모습을 봅니다. 제가 막 3권을 산 [소피의 세계]에서도 주인공 소피와 녹스 선생님은 자신이 허상의 존재임을 알아내고 어떻게든 자신의 창조주와 맞서려고 합니다. 그들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두고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이라면 그런 노력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작가들에게 놀아나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자신의 의식이 어디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건지! 저같으면 니체(싫어하는 철학자지만)를 읽으면서 그냥 자신이 존재하는 수준의 세계에 진지하고 진실되게 맞서는 방법을 택하겠어요. 그게 더 솔직하고 실속있는 일입니다. (9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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