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Phantom Lady (1942)

2010.03.17 00:00

DJUNA 조회 수:4051

William Irish (글)

아서 코난 도일,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심지어 모리스 르블랑까지 번역 붐을 타는 동안 코넬 울리치/윌리엄 아이리시가 무시되고 있는 건 조금 뜻밖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미 늦은 건지도 모르죠. 이 괴팍한 펄프 작가의 축축한 재즈와도 같은 분위기는 한참 하루키 같은 작가들이 유행이었던 90년대 초 중엽에 더 어울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달콤씁쓸한 소설들이 순식간에 약발이 닳았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길. 도시인들이라는 종자들이 살아남아 있는 한 이들의 나르시시즘과 고독을 자극하는 이 남자의 소설들은 꽤 오래동안 버틸만 합니다.

오늘 소개할 그의 대표작 [환상의 여인]은 그런 그의 개성을 즐기기 좋은 작품입니다. 꽤 유명한 소설이니 안 읽으신 분들도 줄거리는 아실 줄 믿어요. 한 남자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그의 알리바이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그와 저녁을 함께 보낸 수수께끼의 여자고요. 째깍째깍 사형집행일이 다가오는 동안 그의 친구와 애인은 그 정체불명의 여자를 찾기 위해 40년대 뉴욕의 밤거리를 돌아다닙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알리바이를 보조해줄 증인들은 하나씩 죽어나가고요.

상당히 근사한 반전이 있긴 하지만, [환상의 여인]은 그렇게까지 좋은 '퍼즐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안 읽은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겠는데, 이 작품의 구성은 정당한 게임 대접을 받기엔 지나치게 억지스러운 우연의 일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중간에 수없이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배분입니다.) 독자들을 속여 넘기기에 바빠 정작 심리 묘사의 일관성을 잃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고요.

그러나 독자들은 책을 읽는 동안만은 그런 억지스러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기엔 이야기를 끌어가는 아이리시의 솜씨가 너무나도 그럴싸하기 때문이죠. 소설의 구성에는 거의 노골적이라고 할 정도로 이상한 구멍들이 존재하지만 아이리쉬가 워낙 그럴싸하게 그 사실을 흐려놓는 통에, 대부분 독자들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결코 페어플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능숙하게 서스펜스를 구축하며 이야기를 끌어가니, 중간에 뭐라고 투덜거리기가 쑥스러운 거죠.

아이리시의 서스펜스 구축 능력만큼이나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것은 그의 분위기 창출 방식입니다. 전 아이리시 문체의 팬은 아니지만 (제 취향에 맞추기엔 지나칠 정도로 간지럽고 달아요.) 그거야 제 사정이고, 만약 여러분이 이 작가의 달콤한 감상을 이겨낼 만한 위를 지니고 있다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40년대 뉴욕 밤거리의 그 구슬프면서도 위험한 정서에 흠뻑 젖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환상의 여인]을 읽는 건 아주 잘 만든 필름 느와르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로버트 시오드막 감독, 엘라 레인즈 주연으로 근사한 필름 느와르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책을 끝내고난 뒤에 그 영화를 확인해보고 싶은 사람들은 생각만큼 많지 않을 겁니다. 책이 이미 그 모든 시청각적 경험들을 다 제공해준 뒤일 테니 말이죠. (02/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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