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 (2006)

2010.03.21 07:21

DJUNA 조회 수:4182

연출: Claus Guth 출연: Ildebrando d'Arcangelo, Anna Netrebko, Bo Skovhus, Dorothea Röschmann, Christine Schäfer, Marie McLaughlin, Franz-Josef Selig, Patrick Henckens, Oliver Ringelhahn, Florian Boesch, Eva Liebau, Uli Kirsch

오늘 이야기할 M22 [피가로의 결혼]은 2006년 7월 26일 잘쯔부르크 페스티벌 공연을 녹화한 것입니다. 이 공연은 당시 텔레비전으로 15분 딜레이가 있는 생방송 중계되었으니 HD 버전을 녹화해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어딘가 있겠죠.

이 공연에 대해 제가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결코 이 공연을 [피가로]의 표준으로 삼지 말라는 거예요. [피가로의 결혼] DVD를 단 하나만 가지고 싶다면 터펠과 해글리가 나오는 가디너 버전을 사세요. 옛날 판이라 화질은 조금 떨어지지만 우리가 [피가로의 결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즐거움은 거의 모두 가지고 있죠. 이에 비하면 M22 [피가로의 결혼]은 괴상한 일탈이에요. 나름 흥미로운 해석이지만 결코 모범적인 공연은 아니에요.

무대연출을 맡은 클라우스 구트는 이 이야기의 시대 배경을 19세기 중후반 정도로 옮겼어요. 제가 '정도'라고 말한 건 그것도 아주 정확한 편은 아니기 때문이죠. 수잔나나 마을 처녀들이 입고 나오는 옷 같은 건 20세기 초중반의 스타일에 더 가깝거든요. 지리적 공간도 조금 북쪽으로 옮겨진 것 같아요. 오스트리아와 같은 중부유럽국가일 수도 있지만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국가일 수도 있죠. 구트는 이 프로덕션을 계획하는 동안 스트린드베리의 희곡들과 베리만의 영화들을 참고 자료로 검토했다고 하니 정말 스웨덴일 수도 있겠어요.

무대가 되는 알마비바 백작의 저택은 장식없이 하얗고 커요. 2막을 제외하면 커다랗고 넓은 계단이 무대와 2층을 연결하고 있지요. 2층 구석에도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관객석에서 보이지 않는 몇몇 장면들을 잡아내지요. 조명도 밝은 편이 아니라 종종 가수들은 노스페라투처럼 길고 음침한 그림자를 벽에 깔고 다닙니다. 4막이 되어도 이들은 이 저택에서 나가지 않아요. 로렌조 다 폰테의 리브레토가 아무리 정원과 숲에 대해 떠들어도 주인공들은 여전히 1층 계단 근처에 머물러 있지요. 그나마 자연에 가까운 건 2막에 방 안에 날아든 낙옆들과 가끔 등장하는 죽은 까마귀의 시체뿐이에요. 갑갑하지만 의도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아요. 구트가 [피가로의 결혼]에서 다루고 싶어했던 건 캐릭터 내면의 갈등이니 그 드라마를 포착하기 위해 인공적이고 추상적인 공간이 필요했겠죠.

이 공연은 묵직하고 어둡습니다. 아마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의 피가로는 지금까지 나온 피가로들 중 가장 컴컴한 인물일 거예요. 그에게는 농담꾼이나 익살꾼의 느낌이 전혀 없어요. 오히려 위험하고 조금 폭력적인 복수자에 가깝지요. 관객들은 오페라가 진행되는 동안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안나 네트렙코의 수잔나는 상대적으로 조금 밝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연기나 노래의 톤은 어두운 편이죠. 노래의 느낌이 수잔나보다는 비올레타에 가까워요. 백작부인이 우울증에 걸린 건 당연하다 쳐도, 알마비바 백작은 왜 이렇게 어두운 걸까요? 그는 생각없는 스페인 바람둥이가 아니에요. 섹시한 하녀에 대한 자신의 육체적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갈등하는 톨스토이 주인공에 가깝죠. 그는 여자들이 다가오면 땀을 뻘뻘 흘리고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떱니다. 그에겐 이 유혹이 너무 힘겨워요.

구트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섹스를 강조하고 있어요. 그것도 쾌락으로서의 섹스가 아니라 주인공의 의지를 멋대로 통제하는 자연의 힘으로서의 섹스지요. 그 때문에 분위기는 컴컴해요. 알마비바 백작은 1막에서 이미 수잔나를 성추행하고 있고 수잔나도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백작부인 역시 그리 결백하다고 할 수 없으니, 2막에서 백작부인과 수잔나도 케루비노를 성추행하는 거나 다름없거든요(케루비노야 고마워했겠죠!) 이 장면은 너무 노골적이라 거의 레즈비언 쓰리썸처럼 보여요. 백작과 백작부부의 갈등이 종종 폭력적인 애무로 연결된다는 것도 지적해야겠군요.

구트의 해석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건 케루빔의 삽입이에요. 원래 이 캐릭터는 오페라에 없죠. 케루빔은 케루비노의 분신인데, 케루비노와 같은 옷을 입고 작은 날개를 단 말없는 젊은 남자가 캐릭터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그들을 조종하거나 유혹하거나 놀려대는 거죠. 아마 전적으로 사실적인 공연이었다면 케루빔의 존재는 튀었겠지만 이 공연의 연기는 무용이나 마임처럼 살짝 양식화되어 있지요. 그래도 기존의 [피가로의 결혼]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케루빔의 존재를 받아들이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전 지금도 이 캐릭터가 완전히 정당화되어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비엔나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니콜라스 아르농쿠르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장중한 19세기식으로 끌어가고 있어요. 날아다니는 벌새처럼 발랄깜찍해야 할 서곡부터 컴컴하고 느리지요. 정상적인 공연에서는 가볍고 유쾌해야 할 곡들이 아르농쿠르의 손을 통하자 은근히 섹시한 웨이브가 들어가고 템포가 느려져요. 좀 험악하게 말하면 동요 반주에 맞추어 부담 웨이브를 추는 연예인들을 보는 것 같아요. 한 번 들으면 신기하고 재미있죠. 하지만 이게 4막까지 가면 좀 지쳐요. 게다가 이 공연은 가디너 버전보다 25분이나 길어요!

정리해보죠. 많은 사람들이 이 공연을 싫어해요. 너무 느리고 심각하며 모짜르트적이 아니라는 거죠. 다들 맞는 소리에요. [피가로의 결혼]은 모짜르트적이고 보마르셰적일 때 가장 좋죠. 스트린베리/베리만 실내극 버전 [피가로의 결혼]은 괴상하고 어처구니없어요. 하지만 그래도 공연의 질은 높은 편이고 이 이야기가 일관성을 잃고 방황하는 건 아니니 한 번 정도 시도해볼만은 해요.

DVD는 음질 화질 양호한 편이고 PCM 스테레오와 DTS 5.1을 모두 지원해요. 전 5.1은 확인 안 해 봤어요. 오페라를 5.1로 듣는 건 좀 웃기는 일이기 때문에. 카탈로그나 예고편을 제외하면 메이킹 다큐멘터리가 하나 지원되는데, 꽤 재미있어요. 피아노 반주의 커스텀 리허설을 엿볼 수 있고 리허설 때의 연출과 최종 연출이 차이나는 부분도 잡아낼 수 있지요. 인터뷰어가 안나 네트렙코를 지나치게 편애하는 게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얼굴마담이니 어쩔 수 없겠죠. 참, 전 레이어가 끊어지는 부분이 걸리더군요. 왜 그냥 막이 바뀔 때 레이어도 함께 바꾸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둘 다 다음 막이 시작되고 조금 뒤에 레이어가 끊기는데, 4막은 견딜만 하지만 2막에 나오는 백작부인의 아리아는 레이어가 바뀔 때 끝부분이 살짝 끊긴답니다. (07/09/25)

 
관객들에게는 안 보이는 계단.

 
군대에 끌려가는 불쌍한 케루비노.

 
수잔나와 백작부인에게 성추행 당하는 케루비노.

 
불쌍한 백작은 케루빔을 짊어지고 노래를 불러야 하지요.

 
편지의 이중창.

 
피가로는 수잔나가 백작부인인 줄 알았다가... 
에이, 이건 그냥 직접 봐요.

기타등등

셰퍼가 케루비노로 나오는 버전 중엔 현대 웨딩샵이 무대인 것도 있죠. 껌을 딱딱 씹고 다니는 불량소년으로 나온다던데. 그것도 한 번 시도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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