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와 파리 The Spider and the Fly (2002)

2010.03.20 20:36

DJUNA 조회 수:9212

Mary Howitt (글), Tony DiTerlizzi (그림), 장경렬 (옮김) 

"'Will you walk into my parlor,'/ said the Spider to the Fly..." 메리 호위트의 유명한 시 [거미와 파리]는 이 음침한 제안으로 시작됩니다. 영어권 사람들이라면 학교를 졸업해 시를 다 까먹은 뒤라도 이 무시무시한 첫 두 행은 기억하고 있겠죠. 하긴 이것만 가지고도 완벽한 공포물의 이야기가 완성되니까요.

호위트의 시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교훈적입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에 쓰여진 이 교훈적인 시의 경고까지 낡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지레 겁먹은 구닥다리 도덕주의자의 움찔한 느낌이 남아 있긴 하지만 세상의 어두운 유혹에 대한 이 경고의 힘은 세기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라질 수가 없겠지요.

토니 디털리지의 그림책 [거미와 파리]에서 주인공 파리는 파리보다 풀잠자리를 연상시키는 날씬하고 아리따운 20년대 풍의 아가씨입니다. 거미는 실크햇을 쓴 정장 차림의 징그럽고 뚱뚱하고 사악하고 음흉한 유혹자고요. 이 무시무시한 악당은 늙은 바람둥이의 느끼한 미소를 흘리며 그가 전에 잡아먹은 벌레들로 장식된 음침한 인형의 집으로 파리를 유혹합니다. 그의 이전 희생자들인 귀뚜라미와 나비 유령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파리는 조금씩 거미의 감언이설에 넘어갑니다.

디털리지는 이 작품을 20년대에 만들어진 무성영화 호러물처럼 만들었습니다. 음침한 흑백의 그림부터가 낡은 영화관의 스크린에 영사된 흑백영화의 이미지처럼 보이죠. 디털리지에 따르면 거미의 사악한 이미지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디털리지의 책은 어둡고 사악하며 은근히 잔인무도한 유머가 깔린 고딕 공포물입니다.

디털리지의 책은 메리 호위트의 책이 쓰여졌던 당시보다 더 어두운 주제를 깔고 있습니다. 호위트의 글은 기본적으로 성적 유혹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 동안 조금 더 무서워졌지요. 아니면 그 동안 세상의 무서움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더 늘어났거나요. 디털리지의 [거미와 파리]는 난봉꾼 악당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영리하고 성공적인 연쇄살인마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전 희생자들의 시체들이 꽁꽁 묶여 전시되어 있는 응접실 장면 같은 걸 보면 벌레 버전 에드 기인의 집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죠. 나중에 디털리지는 거미의 입을 빌어 독자들에게 거미만이 사냥꾼이 아니며 벌레들만이 희생자가 아니라고 조언하는데, 이런 교훈은 이 그림책을 읽는 어린 독자들에게 난처할 정도로 현실적인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경고의 현실성과 진지함은 그림책의 재미와 조금씩 충돌합니다. 디털리지의 정교한 손재주 덕택에 음흉한 거미가 순진무구한 파리를 유혹하는 과정은 정말로 재미있고 박력넘치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이야기의 사악한 유머를 즐기기엔 그 어두운 주제가 너무 현실에 가깝죠. 하지만 그 충돌이 일으킨 불쾌한 불협화음이 독특한 아취를 자아낸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독자들이 어느 쪽에 치중해 책을 읽건, 디털리지의 이 컴컴한 그림책이 그들을 밍밍한 상태로 방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겁니다. (04/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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