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봄밤에 수다: 김예리 1탄

2010.08.04 05:52

봄밤 조회 수:11182

김예리: 필모그래피(제목을 클릭하시면 작품 혹은 예고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2010)… 이모미 알파, 베타 역

2. 로드 넘버 원 (2010)… 인숙 역

3. 백년해로외전 (2010)… 차경 역 (제9회 미장센 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연기부문)

4. 귀 鬼 (2010)… 란 역

5. 파주 (2009)… 미애 역

6.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2009)… 원우 역

7. 달세계 여행(2009)

8. 푸른 강은 흘러라 (2008)… 숙이 역

9. 봄에 피어나다 (2008)…성은 역

10. 귀향 (2008)… 소연 역

11. 기린과 아프리카(2007)…예린 역 (제7회 미장센 단편영화제 연기상)

 

외 다수

 

본격수다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면 거기 맞는 배우를 캐스팅해 본다. 내가 좋아하는 여주인공은 대체로 엉뚱한 것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엄청난 추진력과 흔들리지 않는 페이스를 가지고 있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고민 많고 좀 연약한 구석도 있는 소녀다. 그런 소녀를 연기하는 데는 엘렌 페이지가 좀 일가견이 있다. 한국에서 고르라면, 김예리를 고르겠다. 청순함과 명랑함과 섹시함 사이만 시계추처럼 오가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존재감으로 영화를 장악하는 소녀. 어쩐지 자꾸 쳐다보게 되는 아이 같은 얼굴에, 정확한 발음과 군더더기 없는 말투를 가진 배우. 실제로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서 만나자고 열심히 꼬드겼다.

 

7월 28일 오후 한 시, 외대 정문 앞. 김예리는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생각보다 더 몸이 작고 얼굴이 하얘서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횡단보도를 건너와 우리를 마주하자마자 그런 느낌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인사를 나누며 미소지은 게 아니라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또 그건 찍사가 <로열 테넌바움>의 리치 테넌바움처럼 화려한 헤어밴드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김예리는 무지 재미있어 하면서 스스럼없이 그를 놀렸다. 장난기 많은 표정이 금세 드러난다.

 

저녁 7시에만 가도 재료가 떨어져 먹을 수 없는 외대 앞 작은 초밥집에 들어갔다. 이 집 초밥을 한 번 맛보면 다른 집에선 초밥을 먹을 수가 없다. 셋이서 연신 맛있다고 너무 감탄을 해대선지, 김예리 얼굴이 낯이 익어선지, 좀처럼 그런 일이 없는 무뚝뚝한 주방장 아저씨가 초밥을 쥐어 놓아주면서 자꾸 김예리 얼굴을 쳐다본다.

 

요즘 뭐가 제일 맛있던가요?

음, 옥수수? (웃음) 제가 제천 출신이다 보니까... 이모들이-저희 이모가 6명인데요-조그만 밭을 가꾸고 계셔서 갖다 주시거든요. 겨울엔 고구마가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해요. 아빠랑 제가 고구마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밥 대신 고구마를 먹어요. 얼마 전에는 쑥개떡을 이만~큼 해가지고, 그때그때 물 넣어서 반죽해서 쪄먹구요. 우리끼리 다람쥐 가족이라고... 김치냉장고가 폭발할 만큼 먹을 걸 저장을 해놔요. 얼마 전에는 이모들이 또 오디랑 산딸기를 이만~큼 얼려가지고 오셨어요. 그거 꿀 넣고 샤베트처럼 해먹으면 진짜 맛있거든요. 여름에 음료수랑 그런 거 너무 차잖아요. 그렇지도 않고, 보양도 되고. 집에 매실청, 복숭아청, 복분자청 그런 거 항상 있고, 엄마가 겨울에는 항상 인삼을 꿀에 재서 아빠랑, 저랑, 동생들이 끊이지 않고 먹어요.

(너무 신나서 얘기하니 찍사가 웃는 걸 보고) 저 먹는 데 민감해요.

 

그럼 맛집 좀 추천해주세요.

지역을 골라 주세요.

 

음... 학교 근처? (이문동)

석관시장 떡볶이집! 무용원 1기부터 계속 가는 집이 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그리고 학교 건너편, 왜 서점있는 골목에 있는 조그만 내장탕집 있잖아요. 내장탕도 좋아해요. 남자친구가 국밥을 좋아해서...

 

아니 이런, 남자친구가 있다는 비보가!

네. 아는 분은 아실 텐데.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같이 나왔어요. 한 학년 후배고 가야금 전공하는데. 원래 선후배 1년 차이가 제일 엄격하잖아요. 그래서 대학교 와서 친해졌죠. 6년째 만나고 있어요. 지금 군대갔어요.

 

이거 써도 되나요? 저야 좋은데.

저도 좋아요. 아, 금방 헤어질 건데, 이럼 안되나... (웃음) 소지섭씨가 자 이제 이 신발만 거꾸로 신으면 돼! 하더라고요.

 

사실 남자친구가 불안할 거 같아요. 이제 드라마도 나오고, 군대 가 있는 사이에 예리 씨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있을 수가 있잖아요.

네. 근데 제가 이 일 하는 거 좋아해요. 언젠가 한 번은, <달세계 여행>을 혼자 보러 갔나봐요. 저도 안 갔는데(웃음). 근데 보면서 혼자 또 울렁울렁했나 봐요. 거기서 제가 쓰는 털모자 있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털모자를 사서 쓰고 왔어요. 무슨 짓이야? 하니까 “사랑이 하고 싶어졌어” 그러는 거예요. 영화 속 인물을 저로 안 보는 거 같아요. 기린과 아프리카 때도 선생님이랑 키스하는데 우와... 이러고. (웃으며 핸드폰 사진을 뒤져서 보여준다.)

이 모자예요! 아, 사진이 얼굴이 잘 나온 게 없어서...

 

근데 같이 다니면 예리 씨가 더 어려보일 것 같아요

네. 또 얘가 할아버지, 아저씨 같은 데가 있어서...

 

 

대답을 너무 열심히 하느라 김예리 앞 접시에는 초밥이 쌓여가는데, 어느새 찍사의 접시는 텅 비어있다. (혼자만 ‘특’을 시켰는데도!) 그러자 김예리가 초밥을 우물거리면서 자기 앞의 접시를 가리키며 먹으라고 눈짓을 한다. 내가 가운데 앉아 있지 않았다면 미처 말릴 시간도 없었을 거다. 신나 하는 찍사를 간신히 제지했다. 그런 둘을 보며 김예리는 또 깔깔 웃는다.

 

국립국악학교-국립국악고등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하셨는데요. 한국무용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장난스럽게 깔깔 웃는다) 아 이게 되게 웃겨요. 제가 제천 출신인데요. 제천에 무용학원이 별로 없어요. 있다가도 사라지고, 또 생겨나고... 저는 이희경 무용학원이라는 데 다녔어요. 원래는 발레랑 현대무용을 했었는데, 엄마가 계속 무용을 하려면 서울에 가야 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알아보니까, 예중들이 있잖아요. 선화, 예원... 그런데 기숙사가 있는 학교가 국립국악학교밖에 없어요. 그래서 엄마가, 너 이제부터 한국무용을 해야겠다! (좌중 폭소) 재밌죠? 그래서 1년 동안 진짜 빡세게 한 거죠 한국무용을.

 

장르가 갑자기 바뀐 건데 저항이 없었나요?

아 제가 또 엄마가 회초리 들기 전에 막 (손을 마구 비비면서 비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비는 애라서. 그 때는 엄마 말이 진리니까. 해야 된다니까 한 거죠.

그렇게 서울에 온 게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서울에 오고 나서 인생이 막 ‘폭폭폭’ 변하기 시작했죠. 초등학교 때는 애들이 저를 잘 기억도 못할 정도로 조용하고 그랬는데 무용 하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어요. 많이들 그렇게 바뀌어요.

 

<기린과 아프리카>에 제가 좋아하는 명대사가 있어요. 선생님이 선 본 상대하고 통화하고 있으니 전화기 뺏어서 하는 대사요. “웃지 마! 눈가에 주름져. 여자 나이 서른이면...”

(바로 뒤를 받는다) 하루가 1년이야! (웃음)

 

아무래도 처음 얼굴을 알린 작품이다 보니까, 그걸 보고서는 실제 성격이 반영됐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어요. 선생님한테 대드는 장면도 인상적이고... 학창시절에 실제로 선생님한테 그렇게 대들어 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저는 선생님이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도 하는 애였어요. 무용 선생님들이 무서우시거든요. 게다가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스승님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저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다들 벌벌 떨어요. 선생님 만나러 갈 때도 문 앞에 서서 친구들끼리 긴장해서는 서로서로 복장 점검하고 들어갔다니까요. 대학 때까지 그랬어요.

 

 

대학 때도 선생님이 무서우셨다고요?

네, 사실 그보다 대학 때는 뭘 할 때 제 의견이 반영이 잘 안 되는 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학교 공연은 안 하겠다, 마음을 먹고 선생님한테 말씀을 드렸죠. 저는 선생님 밑에 계속 있을 것도 아니고 무용단에 들어갈 것도 아니었거든요. 어차피 혼자서 뭔가 길을 찾아야 되는데, 그러려면 지금부터 외부 작업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굉장히 바쁘시거든요. 따로 선생님 방에 가서 얘기할 시간도 없어서 자판기 앞에서 3분 딱 얘기하시는데, (선생님 말투와 하이톤의 목소리를 흉내낸다. 좌중 폭소) “음,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힘들다, 그렇죠? 예리양 생각은 알겠어요.” 솔직히 좀 서운하기도 했거든요. 혼을 내거나 하실 줄 알았는데... 나한테 애정이 없으신가... 그랬는데, 이후로 계속 제가 공연한 것 보여 드리고, 자주 연락드리고 하다 보니까 이제, 미워하시진 않는 것 같아요.

 

무용단에 들어가진 않을 거라는 생각은 무용을 하면서 계속 해오던 생각이었나요?

그건 아니고요, 키가 잘 안 크면서부터. 서울의 무용단은 다들 키가 커야 되는데 신체적인 제약이 생기니까요 제 친구들만 해도 중학교 때 172, 3 작아도 168. 한국무용이 다들 그래요.

 

어쨌든 그녀 몫의 초밥을 끝까지 맛있게 다 해치우고, 초밥집을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로 향했다. 학교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인사를 한다.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한 김예리, 미장센 영화제에서 수상한 소식을 들었다고 하니 으하하 웃는다. 쑥스럽다기보다 재미있어하는 느낌이다. 잠시 이야기 나누라고 자리를 비워줬다가 다시 돌아오니, 휴대폰으로 문자를 열심히 보내고 있다. 나가자고 하니 쑥스러운 듯, “저 잠깐 엄마 심부름 좀 해도 될까요?” 묻는다.

 

담배 한 대 피울 만한 시간이 지나고, 카페 옆 야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찜통더위에 에어컨도 잘 안 틀어주는 학교에서 제일 시원한 곳이긴 한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분다.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휘날리고, 그 와중에 또 사진을 찍고 있는데도 그닥 난감해 하진 않는다. 그저 그사이 찍사의 컵이 텅 빈 걸 보고는 “으악 벌써! 막 흡입해!” 하면서 으하하하 웃고, 아는 사람들이 지나가면 인사하고, 뭐하냐고 물으면 그냥 ‘놀러왔다’고 대답한다.

 

그러고 보면 어른들 말을 잘 듣는다고는 하는데, 계획을 세워 착착 진행한다기보다 선택의 시점에 모험을 하는 쪽인 것 같아요.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런 것 같고요. (그녀는 같은 학교 영상원에 다니던 김민숙 감독 작품의 안무를 도와준 것이 계기가 되어 <기린과 아프리카>에 출연한 후 연기를 계속하게 됐다)

네, 맞아요. 그런데. 저도 원래 계획은 있었죠. 무용을 하면서 계획이라는 게 있었는데... 국립국악학교 나와서 국립국악고등학교 나오고, 한국무용 하려면 전통을 알아야 하니까 또 전통원에 진학했구요. 나중에 이수, 전수 받고 싶은 무용도 있었고 대학원 진학 계획도 세우고. 그런데 뻥! 연기를 하게 되면서 이게 다(웃음).

 

 

-2009년 10월, 부산국립국악원에서 공연한 <찰나, 소나기를 품다>

 

그래도 연기와 무용, 둘 중 하나만 해야 한다면 무용을 한다고 하신 적이 있죠? 지금도 계속 공연들을 하고 계시고요.

네. 그럴 것 같아요. 무용은 워낙 계속 해온 거고, 저한테는 의미가 좀 다른 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 둘 다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영화는 사람들하고 같이 일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만 춤은 골방에서라도 혼자 출 수 있는 거니까요. 아마 평생 할 것 같아요. 여전히 전수도 받고 싶고요.

 

그렇다면 연기를 그저 좋은 경험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하게 한 영화의 매력은 뭘까요?

일단 둘이 저한테는 정말 많이 달라요. 무대에서는 한 번을 위해서 2~3개월을 연습하는 거잖아요. 기회가 딱 한 번뿐인데 그걸 위해서 수천 번 같은 동작을 연습하면서 애쓰고. 그걸 다 토하고 나올 때의 희열이란... 그리고 관객의 시선이 느껴져요! 그럴 때 막 찌릿찌릿하고정말 소름이 돋아요.

영화는 할 때마다 몸보다 마음에 더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 다르죠. (내가 연기하는) 이 사람은 이래, 라고 사람들한테 설득을 해야 하는 거고, 그걸 위해서 사실적으로 묘사를 해야 하잖아요. 그걸 아주 적절하고 적당하게 해야 해요. 이건 아주 이성적인 일인 거 같아요. 감성적인 걸 하면서도 이성적인 것. 그리고 자료가 계속 남는다는 거, 포장이 가능하다는 거, 그래서 결과가 과정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

 

몸으로 감정을 표현한다는 게 연기할 때 도움이 되나요?

무용은 말도 안되는 동작을 백번 천번 연습해서 자연스럽게 만드는 거잖아요. 연기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죠. 체력도 좋지만! 체력 좋은 것도 한몫하는 거 같아요. 배우들이 왜 운동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영화 속에서 진짜 춤을 추신 건 두 번인데(기린과 아프리카, 푸른 강은 흘러라)  저는 그보다도 <바다 쪽으로, 한뼘 더>에서 쓰러지거나 절뚝거리는 게 춤추는 것처럼 우아해 보여서 감탄했어요.

(막 웃는다) 그런 게 있겠죠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덜 어색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장점인 거 같구요. 저희 선생님들도 택시 잡으실 때 (손을 우아하고 절도 있게 흔들어 보인다. 좌중 폭소) 이렇게 잡으시거든요. 인사하실 때도 이렇게 (머리 쓸어올리며 춤동작처럼 고개를 갸웃한다, 표정까지 제대로!) 그런 거 보면 저도 절뚝거릴 때 춤추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린과 아프리카>의 예린

 

데뷔작인 <기린과 아프리카>가 2008년 작품이니까 3년째인데, 그동안 작품을 몇 개나 하셨지요?

안 세어 봤어요.(웃음)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작품을.

<기린과 아프리카> 바로 다음이 <봄에 피어나다>예요. 그게 몇 개월 뒤였고...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한 건 아닌데 제가 한 작품들이 사람들 사이에 거론이 좀 되어서 그렇게 느껴지나 봐요.

 

여자 감독님들과 작업을 많이 하셨죠. <기린과 아프리카>도, <봄에 피어나다>도, (끼어들어서 함께 세기 시작한다) <파주> <백년해로외전> <푸른 강은 흘러라> <바다 쪽으로 한 뼘 더>도! 다 여자 감독님이랑 작업하셨네요. 아 참, <귀>는...

<귀>도 여자 감독님이예요. 남자 감독은 손에 꼽아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요. 이종필 감독님, 일섭 감독님, 윤성호 감독님, 세명이네요 . 남자들이 안 좋아하는 얼굴이라는 거죠.

 

그보다 여자들이 심하게 좋아하는 얼굴인 게 아닐까요.

아 그런가. (웃음)

 

제일 좋았던 상대 배우는 누군가요?

(조금 고민하다) <푸른 강은 흘러라>의 철이요. 같은 또래기도 하고, 촬영 때 굉장히 즐거웠어요. 그때 옌볜 친구들이랑 매일 같이 양꼬치에 맥주 마시고. 지금도 연락하는데요. 재미있는 게 옌볜에 실시간으로 한국 공중파 방송이 나가요. 얼마 전에 <로드 넘버 원>을 봤다고 연락이 왔길래 나 사투리 쓰는 거 괜찮아? 하고 물어봤어요. 괜찮다고, 잘했다고 해서 힘이 많이 됐어요.

 

-<푸른 강은 흘러라>의 철이와 숙이

 

<로드 넘버 원>의 인숙은 다소 억양이 강한 사투리를 쓰는데요. 홈페이지 게시판 가보니 평양에선 그런 말 안 쓴다고 화내시는 분들도 있던데요. 지금 남한에 탈북자 수가 2만 명이 넘는데 제대로 못하냐고 하고. 옌볜 말을 쓰는 연기도 이미 한 상태에서 예리 씨는 어땠나요.

사투리 문제는 작가님이랑도 얘기를 했어요. 평양에서는 거의 서울과 비슷한 말씨를 쓴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국군들도 다들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고 해서 남한에서 쓰는 말과 북한에서 쓰는 말은 더 차이가 확 나야 실감이 난다고 그러셨고요. 그래서 좀 더 북쪽인 함경북도 사투리에 가까운 말을 쓰게 된 거죠.

 

<로드 넘버 원>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아 이것도 재미있는데. <푸른 강은 흘러라>의 강미자 감독님이 <로드 넘버 원> 편집기사이신 이현미 감독님이랑 같은 사무실 쓰시거든요. 거기서 북한말 쓰는 역할이 필요하니까 저를 추천하신 거죠. 보자고 연락이 와서 피디님을 한 번 보고, 또 다시 연락이 왔어요. 또 보자고. 막상 그때 저는 드라마 하기 좀 무섭습니다,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전화하셔서 무작정 “빨리 와봐!” 하시더니 “뭐가 문젠데? ”하고 물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드라마는 순발력도 좋아야 되고... 아무튼 준비가 아직 안 된 거 같다, 총은 있는데 총알이 없는 거 같다는 느낌이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저를 잘 보셨는지 “네 뒤에 지금 총탄이 엄청 많다. 쏘기만 하면 된다!” 해주셔서 하게 됐는데 정작 촬영은 다른 팀이랑 해서 그 감독님이랑은 한 번도 같이 못했어요. (아쉬운 듯 웃는다)

 

왜 겁이 났을까요? 저는 오히려 김예리 씨 연기스타일이 감정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면이 있어서 드라마에서도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인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제가 트레이닝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학습에서 나온 연기를 해본 적 없기 때문에... 쪽대본이 나오고, 하루 스무 씬을 찍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로드 넘버원은 사전제작이라 그러진 않았지만 아무튼 그런 상황에 들어가는 건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 있는 배우들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죠.

 

연기 훈련을 정식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네, 있어요. 또 드라마를 하게 된다면 대사 암기 방식이나 대사 치는 방식, 또 카메라에 어떻게 비춰는지를 알기 위해서 훈련하는 걸 생각해 볼 거 같아요. 실제로 현장에 갔을 때 영화에 비해 굉장히 빨리 진행되고 연기 디렉션도 별로 없었어요. 처음엔 안정제도 먹었어요. 혼나는 게 너무 싫어서요. 특히 긴장해서 대사 틀려서 혼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랬는데 3회차쯤 찍고 나니까 적응이 되더라구요. 아, 이렇게 찍는 거구나. 이런 걸 나한테 요구하는구나. 배역에 들어갈 시간이 별로 없어요. 영화는 감정을 끌어낼 시간을 주잖아요. 카메라가 돌아갈 때도 자기가 감정을 주면서 대사를 하고, 그런데 그렇게 했더니 영화하는 사람들이 드라마에서 이런다면서 싫어하더라고요. 아, 그냥 대사를 정확하게 해야 하는구나, 깨달았죠.

 

-<로드 넘버 원>의 인숙(오른쪽)

 

그래도 처음으로 헤어진 오빠 얘길 할 때 신파적으로 흐를 수 있는 장면이 예리 씨 연기 덕분에 힘을 얻었다고 봤어요. 인숙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인물인지 조금은 보이는 느낌이었거든요.

제가 맡은 역할이 수연(김하늘)을 옆에서 그냥 돕기만 하면 되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수연이 밥은 먹었나, 지금 어떤 상태인가, 게속 살피고 물어봐야 하는 역할이예요. 드라마에서 대부분 주인공 친구 역할들이 그렇죠. 그래서 자기 얘기를 하는 장면이 한두 장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이 부분을 확실하게 해서 (캐릭터가)쌓이지 않으면 나중에 오빠를 만났을 때 시청자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없어질까 봐 신경을 많이 썼어요.

 

홈페이지 인물 소개에 가보니 역할 이름과 사진이 있으면 비중이 있다는 얘긴데 배경이나 성격에 대한 설명이 한 줄도 없더라고요. 예리 씨도 백지 상태에서 대본만 가지고 연기를 한 건가요.

네, 인숙 역의 배경은 거의 없었어요. 또 힘들었던 점이, 저하고 1중대 단역 분들 빼면 작은 역이라도 다 매니저가 있어요. 저는 혼자 지하철 타고 짐 싸가지고 왔다 갔다 했죠. 차 끊기는 시간에 끝나면 엄마가 고맙게도 데리러 와주시는데 그러다 차 사고도 한 번 났어요. 엄마가 힘들어서 못하겠다, 너 하고 싶어 하는 거니까 알아서 해라, 하시더라고요. 밥도 다 알아서 각자 먹는 시스템이고 의상도 원래 자기가 챙겨야 된대요. 그래도 로드넘버원은 시대극이니까 의상이 따로 준비가 되었지만...

 

 

 

그럼 앞으로도 드라마를 하게 된다면 기획사에 들어갈 생각도 있으신 건가요?

네. 제가 계속 드라마 할 거면 이대로는 못하겠다 싶더라고요. 그리고 미장센 상을 딱 두 번 받고 나서(기린과 아프리카, 백년해로외전) 사람들이 그랬거든요. “이제 너는 독립영화에서 불러주지 않을 거야.” 그럼 어떡해? 하니까 기획사에 들어가! 하는데 정말로 생각은 해보고 있어요.

 

기획사에 들어가면 모든 게 굉장히 달라질 수 있을 텐데요.

생활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각오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쪽에서 저한테 투자를 하는 거고....(잠시 숨을 고른다) 저도 그분들을 실망시키는 건 싫으니까... 무용은... 1년에 한 번만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해야죠. 좀 더 배우로 클 수 있게 해주는 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조바심 내지 않고, 소모품처럼 여기지 않고.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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