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구하기 힘든 옛날 영화들은 평이 후해요?

2004.04.24 01:15

DJUNA 조회 수:21053 추천:22

아, 이 이야기는 너무 뻔해서 정말 건드리기 싫었는데...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세 번이나 정확히 같은 내용의 질문(또는 비판으로 여겨지는 무언가)을 받았다는 건 이 이슈를 제대로 생각해본 사람이 생각외로 드물다는 증거일 겁니다. 그만큼이나 집단 사고가 무섭다는 증거이기도 하겠고요.

좋아요. 많은 평론가들은 무지한 대중들이 잘 모르는 영화들을 쌓아놓고 으스댄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버라이어티지 편집장인 피터 바트의 칼럼도 비슷한 논점으로 시작하죠. 그 사람이 비난한 것도 거의 소개되지 않은 영화들이나 배우들을 탑 텐 리스트에 올려놓는 비평가들의 허세였으니 말이에요.

바트의 논점이 문제가 되는 건, 그가 이 이슈를 순전히 스노비즘의 측면에서만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전 이런 태도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죠. 되풀이 하기 싫으니 여기로 가서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스노비즘의 측면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비평가들의 직업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을 소개하고 놓치기 쉬운 작품들에 힘을 실어주는 것도 역시 그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잘 볼 수 없는 몇몇 영화들이 리스트에 들어가는 건 당연하죠.

옛날 영화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기 쉬운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고전들은 대부분 역사를 통해 검증된 작품들이니 아직 평가가 고정되지 않은 동시대 영화들보다는 더 안정된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우린 옛 영화들에 대해 동시대 영화들보다 많이 압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로 하려고 하는 말은 이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왜 구하기 힘든 예술 영화나 옛날 영화에만 그렇게 점수를 좋게 주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보다 적절한 답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답변을 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요소를 개입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유치원생 수준의 초보 산수 실력만 있으면 돼요.

저나 여러분이나 영화를 공짜로 보지는 않습니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물론 영화 리뷰를 쓰는 사람들은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문장과 생각을 다듬는 노력 역시 투자해야 합니다. 영화는 공짜가 아니며 리뷰를 쓰는 것도 일입니다.

자, 그런데 영화들을 보기 위해 우리가 투자하는 비용은 같지가 않습니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나 한국 영화라면 극장에서 몇천원만 내고 보면 됩니다. 약간 더 된 영화라면 대여점에서 비디오나 DVD를 빌려 볼 수 있을 거고 케이블이나 텔레비전에서 하는 걸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주 옛날 영화이거나 비영어권 작품들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운좋게 영화제를 하거나 시네마테크에서 볼 수 있다면 모를까, 이런 영화들을 보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과 돈을 더 투자해야 하지요. 그렇다면 국내에서 옛날 영화들이나 비영어권 영화를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최근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보다는 훨씬 더 신중하게 작품들을 선택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방벽을 넘는 동안, 수많은 영화들이 중간에 걸러진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마 전 앞으로 한동안 30년대에 만들어진 [낸시 드루] 연재물을 볼 기회가 없을 겁니다. 그 작품들은 오래 전에 인기를 잃고 필름 창고에 박혀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서프라이즈] 같은 영화가 해외 시장에서 선전해 스필버그 영화들과 나란히 외국의 극장에 걸리는 가능성도 거의 없을 겁니다.

남는 건 정말 유치한 수준의 산수 계산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유치한 수준의 계산을 부정만 하면 되지요. "왜 구하기 힘든 영화들에만 점수를 좋게 줘요?"라는 비판이 제대로 먹히려면 그 보기 힘든 시간/공간대의 영화들이 최근 할리우드/한국 영화들처럼 거의 무작위적으로 선정되었다는 전제가 깔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영화들은 대부분 경제 논리에 의해 공들여 취사선택된 작품들이지요. 당연히 주변부로 갈수록 평점이 높아질 수밖에 없어요. 이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산수도 이렇게 간단한 산수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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