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 오브 앤젤]의 천사들

2010.02.22 11:02

DJUNA 조회 수:6292

1.

시티 오브 엔젤 City of Angels은 로스 앤젤레스의 별명입니다. 따라서 [베를린 천사의 시]를 미국판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야무진 할리우드 사람들이, 검은 코트를 주윤발처럼 휘둘러대는 키 큰 천사들을 이 삭막한 회색 도시에 끼워넣었다고 해서 불평할 필요는 전혀 없죠. 한마디로 이름값을 하는 셈이니까.

2.

천사를 숭고한 존재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는 뭘까요? 그리고 천사를 꼭 우월한 존재라고 해야 할 이유 또한 뭐고? 아마 그 친구들도 나름대로 걱정거리가 있을지도 모르고 나름대로 귀찮은 관료 체계로 가득 찬 곳에서 직장인들처럼 힘겹게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끔 할리우드에서는 그런 천사들을 보여주는데, 숭고한 존재보다 그런 천사들이 더 보기가 재미있으니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멋진 인생]의 천사 클레멘스는, 결국 주인공을 구하는 데에 성공하기는 하지만 칠칠치 못하기 그지 없습니다. 국내에서는 [이완(늘 하는 말인데 Ewan은 유완이지 이완이 아닙니다!) 맥그리거의 인질]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영화에서 홀리 헌터와 딜라이 란도가 연기한 천사는 천사보다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악당 로봇 같고요. 존 트라볼타가 [미카엘]에서 연기한 천사 미카엘은 주정뱅이에 게을러 빠졌죠.

그러고보니 우리의 주인공 세스는 순진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마 세상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봐요. 하긴 밥 대신 해뜨는 소리를 먹는 친구니 어련하려고.

3.

냠냠 맛있는 배(그래도 우리나라 배맛의 반만이나 할까)를 먹고 있는 메기(멕 라이언)에게 천사 세스(니콜라스 케이지)가 묻습니다.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배 맛을 설명해봐요."

아하,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면서 몰랐던 것 하나가 해결되는 순간입니다. 왜 천사들이 그렇게 도서관에 집착하는 걸까요? 답. 그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인간의 감각을 체험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고 보니 티비 시리즈 [천사의 미소 Touched by an Angel]에서 주인공 천사 모니카가 지상에 와서 커피 중독자가 된 것도 이해가 가요.)

그러고 보니 시인이란 사람들이 그처럼 '뮤즈'의 존재를 읊어댔던 것도 설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들 옆에 천사들이 버텨서서 그들에게 글을 써서 자신들이 모르는 감각을 설명해달라고 보챘던 모양이죠. 시인들은 천사들을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4.

도서관에서 메기는 세스에게 직업을 묻습니다. 세스 가라사대: "나는 메신저입니다. 신의 말씀을 전하지요."

세스의 답변은 이 리메이크 영화를 핀트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세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뭔가 잘못되어도 상당히 잘못된 것이죠.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천사들이나 [시티 오브 엔젤]에 나오는 천사들이나, 모두 인간과의 접촉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의 말씀을 전달하기는 커녕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힘겨워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외로움과 고립, 건조한 삶이 [베를린 천사의 시]와 [시티 오브 앤젤]에 나오는 천사들의 특징이 아니겠어요?

다른 영화 속의 천사들이라면 세스의 답변이 더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천사의 미소]에 나오는 천사들은 바빠서 고독을 씹을 여유도 없습니다. 성가대에서 보낸 풋내기 시절을 끝내면 특수 인명 구조대로 가고 그 다음에는 영혼 구조대로 가죠. 매 에피소드마다 뒤에 조명을 띄우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세요.' 하고 아일랜드 악센트로 떠들어대야 하는 모니카는 아마 세스처럼 존재론적 고뇌는 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고보면 그런 고뇌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법입니다. 게으른 손은 사람의 머리를 흐려놓습니다.

5.

하지만 [시티 오브 앤젤]의 천사들에게는 [베를린 천사들의 시]에 나오는 천사들이 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천당으로 인도합니다.

이 설정 자체는 기독교적 내세관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지만, 영화의 설정으로는 조금 이상합니다.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이상하죠. [베를린 천사의 시]의 주제이기도 했지만 [시티 오브 앤젤]의 주제이기도 한 어떤 것을 완전히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생하는 천사와 단명하는 인간의 대비입니다. 인간의 영생을 보여주면 천사들의 영생이 그렇게 강한 선명도를 띄지 못합니다. 왕년에 천사였던 메신저(데니스 프란츠)는 세스에게 "난 아직 안 간다고 그 쪽에 전하게."라고 말하는데, 그런 그는 어딘가 휴가를 연장해달라고 비는 회사원 같습니다.

영생을 경험한 천사에게 인간의 삶은 눈 깜박할 정도에 불과할 겁니다. 그 눈깜빡을 경험하고 다시 천당으로 올라간다면 검은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지상으로 떨어지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어요. 지루한 천사 직무에서 도피하기 위한 바캉스에 불과하죠. 그리고 그렇다면 영화 끝의 메기의 죽음 역시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에요. 어차피 곧 다시 만날텐데요, 뭐. 메기가 어디 있는 지 찾기 힘들어도 전직 천사의 빽을 쓴다면 일도 아닐 거예요.

6.

[시티 오브 앤젤]에서 천사가 인간이 되려면 어딘가 높은 곳에서 뚝 떨어져야 합니다. 세스도 그렇게 합니다. 불쌍하게도 [베를린 천사의 시] 세계와는 달리 엘에이의 천사들은 퇴직금용 갑옷도 못받지만요.

뚝 떨어진 천사... 그러니까 타락 천사입니다. 영화나 연극 제목으로 너무 많이 쓰여서 거의 지겹기까지 한 표현이에요. 왕가위 영화가 fallen angels의 한자식 표현을 국내에 도입해 준 것은 그 때문에 고맙습니다. 뻔한 표현이 잠시 동안이나마 덜 지루해 보이기 때문이죠.

기독교 세계관에 따르면 타락 천사는 악마 루시퍼입니다. 천상에서 상당히 괜찮은 직위에 있던 이 왕년의 천사는 세스처럼 그 곳이 따분해졌는지 지상으로 뚝 떨어져 천상 세계의 골치거리가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보스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지겨워서? 천상의 관료체계에 싫증이 나서? 독립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었겠지요. 다른 천사들과 의견차가 심했거나. 루시퍼는 천상에서 그렇게 잘나가는 친구였으니 다른 동료들보다 많이 튀었을 겁니다. 그리고 똑똑해서 튀는 친구들은 언제나 트러블 메이커인 법이죠.

하지만 세스의 추락은 보다 단순합니다. 그는 그저 천사로 사는 게 재미가 없었던 거예요.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겠어요? 흑백으로 세상을 보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과, 먹을 것 다 먹고 칼라로 세상을 보면서 단명하는 것 중에? 후자를 택하는 사람들이 꽤 될 겁니다. 먹을 거 다 먹고 주접떠는 것도 곧 지겨워지겠지만 단명한다니 그럴 기회도 없겠죠.

하지만 우리는 천사의 삶을 부러워합니다. 특히 이런 IMF 시대에 죽어도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하는 인간으로 살면서 목 떨어질 날 만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 끔찍합니다. 지상의 번뇌로부터의 자유, 해탈, 영생과 같은 것들이 부럽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시티 오브 앤젤]의 교훈은 그렇게 시적이 아닙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진짜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다." (9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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