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자생적 컬트 영화일까?

1.

얼마 전에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팬 중 한 명한테서 메일을 받았습니다. 유니텔에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으니 동참해달라는 것이었죠. 유감스럽게도 전 유니텔을 이용하지 않고,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토론에는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메일을 보내는 팬들의 열정에는 흥미가 있습니다. 사실 메일을 받기 전부터 흥미가 있었지요. 이 영화는 개봉 직후부터 자생적인 컬트 영화가 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으니까요.

2.

과연 우리나라에도 컬트 영화가 있을까요? (또는 있었을까요?)

김기영이나 남기남, 김기덕의 영화들은 어떨까요? 글쎄요. 모두 미국에서 활동했다면 정말 컬트 영화 감독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김기영 열풍을 주도한 사람들은 관객들이 아니라 평론가나 영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김기덕 역시 관객들보다는 평론가들의 지지를 더 받았고요. 남기남은 컬트가 될만큼의 추종자들을 모으지 못했지요. 그들은 모두 흥미로운 사람들이지만 자생적 '컬트 팬'들을 생산한 적은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미국식 'B급 영화'나 '컬트 영화'를 표방했던 [마스카라]나 [절대사랑]과 같은 영화들은 어떻습니까? 흠... 전 이 영화의 열성팬들을 만난 적 없습니다. 여러분도 없을 걸요.

당연한 일이지요. 컬트는 지극히 미국적인 현상이니까요. 몇 십 년 전 남의 나라에서 시작된 사회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서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컬트 현상이 영화의 질적 가치를 향상시키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쩌다 컬트 영화가 되었다고 해서 그 영화들이 모두 '저주받은 걸작'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부러워할 수는 있습니다. 이 현상은 인기 없는 작품이어도 꾸준히 소스가 보급되고 토론의 장이 열리는 문화적 환경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컬트 현상 자체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도 이런 환경은 부러워해도 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못 누리고 있는 환경이니까요.

3.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얼핏보기에 미국식 컬트와 별 상관이 없는 작품처럼 보입니다. 이 영화는 날씬하고 깔끔하게 만들어진 주류 영화이며, 그보다 더 히트한 주류 영화의 속편입니다. 자극적이거나 일탈적인 요소는 별로 없고, 오히려 세련된 '예술 영화'를 지향하고 있지요. 동성애 소재가 이런 소재에 수줍은 편인 한국 관객들에게 조금 충격적이었을런지 몰라도, 정작 표현 방법은 예스럽고 얌전하며 순진하기까지 합니다.

오히려 전편인 [여고괴담]이 고전적인 컬트 영화의 모양새에 가깝습니다. B급 호러 영화식 'cheesy'한 자극과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메시지가 재미있는 부조화를 만들어내던 작품이었잖아요.

하지만 이 두 영화가 일으킨 반응은 정석과 정반대였습니다. [여고괴담]은 매우 정상적인 히트작이었습니다. 비판의 대상이 된 교사들이 약간의 소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별 부담 없이 이 영화를 받아들였고 즐겼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평론가들에겐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흥미롭게 볼만한 구석이 많은 영화니까요. 많은 평론가들이 이 영화에 호의적이었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평론가들도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관객들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극단적입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가 따분하고 공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쪽엔 소수의 열정적인 매니아들이 중독된 듯 끝도 없이 되풀이보며, 조금이라도 욕설 비슷한 소리가 들리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듭니다.

그들은 '컬트 팬'들입니다. 김기영이나 남기남 팬들보다 훨씬 '컬트 팬'의 정의에 잘 들어맞는 사람들이지요.

한 번 일일이 따져 볼까요? 그들의 열정은 결코 평론가들에 의해 조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영화팬들의 '스노비시한' 과시욕을 내세운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그 영화가 좋은 겁니다. 그건 공식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들어가보면 압니다. 이들의 열정은 결코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 아닙니다.

그 열정은 아카데믹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일반 관객들입니다. 대부분은 홈페이지 게시판에 들어왔다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더듬거리다 조용히 빠져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영화를 싫어하는 일반 관객들의 압력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대중의 불평은 집단적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선 평론가의 악평보다 훨씬 큰 압력이지요. 실제로 이들 중 몇 명은 이 영화의 팬이라는 이유 때문에 놀림까지 당합니다!

왜 이들은 이 영화에 몰두하는 걸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영화를 보며 여고 시절의 추억을 되새겼던 사람들도 있었겠고, 동성애 소재에 매료된 사람도 있었겠고... 아니면 그냥 예쁜 신인 배우들이 좋았을 수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유가 아닙니다. 그 모양이지요. 이들은 정말로 자생적 컬트 팬의 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에드 우드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도하지 않은 열성팬들을 끌어모은 영화입니다. 단지 에드 우드의 영화들은 형편없는 Z 무비였지만 [두 번째 이야기]는 상당히 난해하기까지 한 '예술 영화'라는 게 차이랄까요.

4.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걸까요? [여고 괴담 두 번째 이야기]가 정말 드문 국산 컬트라는 것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일까요? 아까까지만 해도 전 '컬트'가 그렇게까지 엄청난 현상은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대단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재미있는 일이긴 합니다. 모든 희귀한 현상은 희귀하다는 이유만으로 일단 재미있으니까요.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요소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스노비즘의 영향 없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소수 열성팬들의 존재는, 우리 관객들이 보기만큼 떼거리가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이건 앞으로 더 다양한 영화들을 나올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지요.

인터넷의 역할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새로운 도구는 예전 같으면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렸을 사람들을 결집해 하나의 팬 집단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영화 팬들의 꽤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성적 소수자들에게 마음 놓고 자신의 감상을 표출하게 하는 자리를 제공하기도 했지요. 둘 다 모두 발전적인 것들입니다.

앞으로 이 '컬트 팬'들은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요? 모르겠군요. 이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요소들은 아주 많으니까요. 그러나 그 중 가장 큰 요소는 역시 소스의 지속적인 보급일 겁니다. 과연 우리나라의 비디오 시장과 방송이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요? (0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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